과학과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실존하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맥락을 공유하며 서로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의 새로운 발견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용을 하기도 하고,

예술가들의 작업이 과학자들에게 신선한 화두를 던지고

시야를 넓혀주기도 한다.


- 서민아, 『빛이 매혹이 될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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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컨슈머 -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
J. B. 매키넌 지음, 김하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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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책의 장르나 내용에 대한 예상이 틀렸다.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는 부제 때문이기도 했는데, 애초에 짐작하기로는 현실 경제에서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경제학, 혹은 경영학 차원에서 분석한 내용일 줄 알았다. 물론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책은 디컨슈머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더러 디컨슈머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를 어필하는 사회학에 가까운 책이었다.

 

그리고 살짝 당황했던 또 하나의 포인트는 이 책을 낸 출판사가 “문학동네”라는 것. 내가 아는 그 “문학동네”가 맞는 건가? 뭐 “문학동네”에서 늘 문학만 내라는 법은 없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발견한 출판사명을 보고 살짝 웃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은 “당위”를 주장한다. 우리는 지금 하는 것처럼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고 있어서, 더 이상 지구의 환경과 자원이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뭐 이 부분은 직관적으로도 쉽게 짐작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회가 선택한 경제구조가 이런 과소비를 바탕으로 쌓아올려져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비가 GDP(물론 이 의심스러운 계산수치는 여러 비판을 받고 있다)를 올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누가 남의 집 유리창을 깨고, 지나가던 사람을 칼로 찌르고, 키우던 반려동물을 잔혹하게 죽인다고 해도 GDP는 올라간다. 그 때마다 우리는 새 유리창을 사고, 치료에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하고, 새로운 동물을 살 테니까.

 

저자 역시 이런 우려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동의한다. 분명 디컨슈머가 늘어나면 경제는 침체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그들의 삶의 질이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쁘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물론 경제의 성장률은 지금보다 떨어지겠지만,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성장률은 거의 0에 수렴했었다. 우리는 그래도 살 수 있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소비에 중독된 채 불태워버리던 시간이, 이제는 좀 다른 일들을 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잇고, 우리의 생활에 여유를 더해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볼 여지도 있지만.

 



 

어지간히 소비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는, 당장 이 책의 조언처럼 소비를 줄인다면 꽤나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열 개가 넘는 화장품을 화장대에 놓고 쓰고 있다면, 옷장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옷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입을 게 없다고 푸념을 하고 있다면, 한 번만 보고 책장에 꽂아둔 책들이 20권이 넘어간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이런 개인적인 불편함을 넘어 역시 관건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축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신성한 권위”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책의 제안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내기엔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탐욕은 이상적인 계획을 쉽게 좌절시킨다는 게 그동안의 역사가 아니었는가. 탐욕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여기는 천박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무엇인가 달라질 여지가 있을까.

 

아마도 곧 다가올 기후위기도, 우리나라의 치명적인 인구감소도, 전 세계적인 청년층의 박탈감과 일탈도, 우리는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티핑 포인트를 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와서, 어쩔 수 없이 이제까지의 삶을 방식을 바꿔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어쩌면 그 때는 디컨슈머로서 살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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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로 바꿉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서 듣거나 읽은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복음의 개인적 선포로 바꾸는 게 설교입니다.

설교는 물을 포도주로 바꿉니다.

설교는 빵의 명사와 포도주의 동사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꿉니다.


-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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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기도의 길 - 다시 깨어나는 거룩한 상상력 사회 속의 교회, 교회 속의 사회
에스더 드발 지음, 이민희 옮김 / 비아토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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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읽어 본 사람이라면 켈트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주로 아일랜드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외에도 켈트족이라는 고대 민족이 떠오른다면 역사덕후일 가능성이 높고, 셀틱 FC라는 축구팀을 떠올린다면 해외축구빠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스코틀랜드에 있는 이 축구팀에 셀틱(Celtic)이라는 명칭이 붙은 건,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팀이라서 그렇다. 비슷한 케이스로 NBA에 있는 보스턴 셀틱스라는 농구팀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그 동네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두 팀 모두 메인 색상은 녹색이다.


신학 쪽에서는 켈트 교회라는 명칭이 익숙할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그 켈트 교회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켈트, 즉 아일랜드 지역은 유럽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지리적으로도 가장 멀고, 로마나 파리, 마드리드 같은 오래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들로부터도 멀다.


중세 초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니, 그 시기도 다른 데에 비하면 꽤 늦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더해지면서 켈트 교회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다른 지역과 왕래가 많지 않으니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고, 반대로 자체적인 문화가 깊게 발달했다. 물론 그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제법 잘 알려진 켈트 십자가나 클로버 모양의 상징, 그리고 녹색이라는 상징색 정도를 빼면 사실 나도 아는 게 많지 않다.




이 책은 바로 그 켈트 교회의 여러 전통들을 다룬다. 분명 내용상으로는 신학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책으로 분류하기엔 또 내용이 좀 말랑말랑하다. 책 제목에 “기도”라는 단어가 들어있는데, 저자는 켈트 교회 전통 안에서 작성된 여러 기도문과 시(기도의 성격이 강한)들을 통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신앙의 모습에 대한 스케치를 제시한다.


저자가 켈트 신앙 전통을 소개하기 위해 시나 시처럼 읽히는 기도를 선택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초기 켈트 사회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장르를 산문이 아니라 운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71). 심지어 그들은 수도원 규칙조차 시의 형태로 작성했다. 여기서부터 신학대전이라는 거대한 논문에 닻을 내리고자 했던 중세의 주류 신학과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에는 켈트 교회 신앙의 다양한 양상들이 설명된다. 삶을 여행으로 보는 독특한 관점부터, 일상 속에서 삼위일체를 가까이 경험하는 방식, 시간의 흐름을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시켜 인식하는 방법,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세상의 악을 피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삶 등등. 다분히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경험하며, 동행하는 법을 전수해 왔다.




서방의 주류 신학이 앞서 말했던 대로 이지적인 차원에 집중해왔다면, 켈트 교회의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점인 듯하다. 그리고 이건 대체로 서방신학 전통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앞서 이 책이 신학책이라기엔 내용이 좀 말랑말랑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켈트 신학을 담담하게 분석하고 서술하기 보다는 경탄의 자세로 바라보며 계속 닮고자, 그리고 닮아야 한다는 요청과 함께 길을 써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좀 과한 건 아닌가, 그들에게는 수만 명씩 모이는 복잡한 도시라는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했던 건 아닌가 하는 식의 반문이 가끔 떠오르는 것도 사실.


하지만 기독교 전통 안의 풍성한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지나치게 지적인 영역만 강조하는 건 신앙의 다른 부분을 파괴하기도 한다. 믿음은 머리로만 갖는 게 아니니까. 특히 일상의 삶과 믿음을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켈트 교회의 신앙은, 삶과 신앙이 유리되기 일쑤인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분명 좋은 자극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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