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파울로 프레이리 외 지음, 프락시스 옮김 / 아침이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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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와 1930년대 “하이랜더” 성인교육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던 마일스 호튼의 대화집이다. 두 사람 모두 교육과 관련된 일로 유명한 인물인지라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교육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성장기라든지 하는 개인적인 일화도 등장한다.


프레이리에 대해서는 그가 쓴 책을 앞서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는지라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호튼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된 내용이 많았다(여전히 내 지식은 얕다). 그가 시작했던 “하이랜더”는 흑인들의 문해교육을 하기 위해 시작한 학교 밖 교실이었다.


당시 미국 테네시주는 투표권자 등록을 위해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수의 흑인들과 노동자들은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다. 호튼과 그의 동료들은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한 교실을 열었는데, 이 때 그 교육의 이념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다. 전문가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대신, 배우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도록 하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함께 학습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프레이리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프레이리 역시 체제를 강화하기만 하는 공교육의 방식과 내용에 반대하며 조금은 다른 방식의 교육을 꿈꾸던 사람이었으니까. 예컨대 프레이리는 “공부란 사랑과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정해진 수업 시간표에 따라서 학습을 요구받는 행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사랑에는 시간표가 있을 수 없”으니까(58).




가르치는 사람이 전문가의 권위를 덧입은 채,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주입하려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교와 학원,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발견되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는 대단이 있느냐며, 현재의 방식을 그냥 되풀이할 뿐이다.


물론 여기엔 현재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권력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교수가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저런 전문가가 되었는데 하는 식의. 문제는 이런 식의 테크노크라시가 지나치게 확산되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을 소수의 몇몇 기술관료들이 멋대로 결정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각종 세금이 줄줄 새는 건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큰 이권이 걸린 일들을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공론화라는 작업이 좀 더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단순한 여론 조사와 달리 조금 더 깊이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일을 결정하겠다는 건데, 여기에도 반발이 적지 않다. 재판 과정에 일반인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일을 우리나라 법조계에서는 여전히 극렬하게 반대한다. 지난 정부 때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일반 시민들을 모아 공론화 위원회를 만들어 의사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자칭 원자력 전문가들이 나서서 그 사람들이 복잡한 원자력 발전의 개념에 대해 뭘 안다고 결정을 하느냐는 식으로 꼰대짓을 했었다. 정작 그 일로 영향을 받는 건 그 “아는 게 없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인데도.




호튼과 프레이리가 제안하는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분명 대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표준적인 교육과정을 만들어 평균적인 수준의 지식 주입으로 필요한 노동자를 양산하겠다는 산업화 시대의 교육모델과는 크게 다르다. 노조운동이니, 시민운동이니 하는 반발은 산업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독재적 정권에게도 눈엣가시였을 게 분명하고.


하지만 이미 정보화사회로 넘어가고, 인공지능이 사람이 하던 수많은 일들을 대신하게 될 미래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 지금, 여전히 그런 과거의 교육 패러다임에만 매몰되어 있는 건 분명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이 시대에는 스스로 배울거리를 찾아나서고, 탐구하는,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이 두 사람의 주장이 더욱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곳저곳에서 공교육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다는 뉴스들이 들려온 지 오래다. 이제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 상황이란 말인데, 우리는 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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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궁극적인 스캔들은,

자기 내어줌이 긍정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있다.

당신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고 당신을 파괴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희생하지만, 가해자의 권력을 안정시켜 줄 뿐이다.

자기 내어줌이 서로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지만,

실패의 고통과 폭력도 예상해야 한다.

폭력이 몰아칠 때, 자기를 내어주는 행동은

곧 어둠에 가려진 하나님 앞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 될 뿐이다.

자기를 내어 주는 행동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이 어두운 면이

바로 십자가의 스캔들이다.


-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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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이 얼마나 즐거운 건지 아세요?

시냇물은 언제나 웃어요.

겨울에도 얼음 밑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요.

초록 지붕 집 근처에 시내가 있어서 참 좋아요.


- 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간 머리 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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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의 이콘 신학
레오니드 우스펜스키 지음, 박노양 옮김 / 정교회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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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화상”이라고 불리는 이콘은 오늘날에는 가톨릭교회나 정교회의 예배와 신앙생활에 중요하게 남아있다. 대신 내가 속해 있는 개신교회 전통에서는 이 부분이 크게 강조되지 않는다. 잘 알지 못하면 다양한 오해가 생기기 마련인지라, 이렇게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영영 알아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일부러 손에 들어 본 책이다.


성화를 직접 그리기도 하고 연구하는 저자가 쓴 책인데다가, 우리나라 정교회에서 직접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낸 책이기도 하니 그 내용은 어느 정도 정교회의 공식입장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책은 이콘에 관한 비판적 검토나 설명보다는, 정교회가 갖고 있는 이콘 신학의 내용을 설명하고 옹호하는 데 좀 더 집중한다.(책 앞에 실려 있는 추천사에는 정교회 한국대교구장의 내용에 대한 보증까지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콘이라는 것이 정교회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정교회에서 이콘이란 “전체로서의 정통 신앙 그 자체의 표현”(10)이다. 그렇다면 이콘에 대한 공격, 혹은 부정은 정교회 신학과 신앙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이건 좀 과장이 아닌가 싶은데, 이런 이콘에 대한 강한 애착은 8세기 경 동로마제국에서 있었던 강한 反(반)이콘주의자들의 핍박과 파괴로 인한 큰 피해의 기억에 기초하는 것 같다. 소위 성상파괴운동은 단순한 성상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으로도 이어졌던 것이다. 역사의 예를 보면 이런 종류의 핍박은 그 핍박을 받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정교회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이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인간의 형상을 띄고 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구약의 형상 금지 규정을 가지고 이콘을 공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신앙적 유익을 얻을 수 있다(54). 이게 그 중심 논리다.


이 논리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정교회는 이콘에 대한 공격을 성육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인간적 형상을 거부함으로써,… 물질 일반의 성화를 거부”(200)하고 있다는 것이다. 휴~ 과연 이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걸까? 다른 식으로 생각할 여지는 없을까?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진술에 대한 동의와, 그러니까 교회가 다양한 그림이나 조각으로 성자와 그 주변 인물들,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을 만들고 공경해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 필연적인 논리적 연결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 이콘을 만들고 사용하지 않으면 물질의 성화라는 교리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는 공격 역시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장 사이에 논리적 연결의 긴밀성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나는 저 진공청소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이 반드시 내가 청소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닐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이콘에 관한 정교회 신자들의 애착과 사랑을 비웃을 필요는 없다. 더더욱 그들의 이콘을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책 속에도 소개되는 프랑크푸르트 공의회의 견해와 비슷하다. 이콘의 사용은 허용하지만, 그것에 전례적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예술과 역사적 기록으로 이콘을 보는 것이다(196).


물론 우리가 일상의 다양한 공간과 사물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이콘을 통해서, 특히 그것이 제작되는 과정에 반영된 다양한 신학적 장치들을 알고 바라봄으로써 특별한 유익을 얻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건 이콘의 신성함이나, 그 사물이 갖는 특별함 때문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힘이 아닐까.


이콘을 하나의 도구로서 이용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로 삼는다면 크게 문제가 될 건 없겠지만, 종종 정교회의 주장에는 여기에 그보다 더 큰 무슨 힘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느낌이다. 물론 이게 그저 느낌일 뿐이라면, 지나친 논쟁보다는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과의 우호적인 교제가 늘어났으면 하는 생각이다.


책에 많은 수의 컬러 도판이 실려 있어서 중간중간 보는 맛을 더해준다. 재미있는 건 그 중 “서미경 다띠안나”라는 이름의 한국인 화가의 작품이 자주 보인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림 속에 한글도 적혀 있다. 다만 이 도판들이 본문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제시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 살짝 아쉽다. 물론 이 책 자체가 그림의 설명이 아니라 이콘에 관한 “신학”을 소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니 문제는 아니다.


이콘에 관한 정교회 신자들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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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재난이 들이닥쳤을 때

어떤 심대한 의미를 찾았다고 서둘러 발표하는 일이

어둠의 한복판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어떤 도덕적 의무감과 긴급함에서 나온 행동인지,

아니면 타자의 고통을 빌미로 자신의 신념을 일련의 수사들로 표현해

공감을 받아내려 하는 기회주의에서 나온 행동인지를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바다의 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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