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 커피 체인에서 멍청한 광고를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언제까지 진행될지 모르는 불매운동으로 매출도 꽤 줄어든 것 같고, 보다 심각하게는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회장이라는 사람이 워낙에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중은 더욱 의심을 하고 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사건이 잠잠해지지 않자, 마침내 일주일도 더 지나서 회장이 공개석상에 나와 사과문을 읽었다.(대체로 사과를 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번에는 사과문의 내용도 지적을 당한다. 미안하기는 한데, 이 문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도 있지 않겠느냐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이 그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는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하면, 그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호의적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과연 이 진정성이라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일까? 이 책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진정성이라는 무엇일까? 오늘날 이 단어는 각자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아라”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라면 앞서 언급한 회장도 나름의 진실성/진정성을 가지고 대중 앞에 나온 것이다. 최소한 그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평소가 갖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으니까.
서문에서 저자는 한 작가의 글을 인용하면서, “진정성 이전에는 성실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남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애초에 진정성이란 그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책은 이 진정성이라는 것이 다양한 영역에서 얼마나 오염되고, 제멋대로 생각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셀럽 문화의 중심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그놈의 “킴 카다시안”!)과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기이한 반응들을 읽다 보면 이 진정성이 얼마나 많은 정의를 갖고 있는지, 그래서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진정성”이란, 결국 그냥 그가 우리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그 ‘우리의 마음’도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 한 때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던 다양한 “제품들”(책에는 힙스터들의 아이템이 언급된다)은 시간이 지나면 또 그저 촌스러운 무엇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변덕스러움은 또 다른 증거이고.
물론 이렇게 보면 ‘진정성’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읽힐 지도 모르겠다.(실제로 책에는 그런 뉘앙스가 좀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건 앞서 언급했듯, 진정성을 그저 나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모호하게 정의하는 현대적 견해에 따른 것이지, 진정성을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와 행동으로 보는 좀 더 오래된 전통적 견해로 보면 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진정성을 정의하는 일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좀처럼 합의를 이룰 수 없는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책에는 꽤 흥미로운 예시들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문화적 도용”, “성 정체성” 같은 것들. 애초에 이민 2, 3세대라면 그들이 주장하는 문화적 유산과의 유대는 이미 빈약해진 상황인데도 누군가 자신들이 전유하는 문화적 양식을 조금 따라한다고 도용 운운하며 비난하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것.
진정성이란, 우리가 서로 만나서 손을 잡을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되어야지, 서로의 차이를 더욱 부각시켜 대립과 싸움만 일으키는 데 사용된다면, 그들이 말하는 진정성은 그저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핑계가 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진정성 논의를 의미 없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문제는 언제나 도를 넘는 태도다.
오늘날 우리는 대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고 거의 전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대규모 난투극이다. 어쩌면 이미 제3차세계대전은 시작되었는데 우리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세 번째 대전쟁은 앞서의 두 전쟁과 양상이 다르다. 이전의 전쟁은 국가들 사이의 연합끼리 맞부딪혔다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은 국가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실 국가 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들이 맹렬하게 대립하는 일은 역사상 수없이 되풀이 되어 온 일이긴 하다. 일부의 투쟁은 종종 내전이라고 불리며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런 무력을 사용한 대립은 일종의 대화이기도 했다. 대화가 끝나면 어쨌든 상황은 수습되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쟁은 도무지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전 시대의 큰 진영들 사이의 대립은 조금 누그러진 듯하지만, 이제는 수도 없이 세분화된 수많은 정체성들이 각각의 참호를 파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리한 참호전을 벌이고 있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증오의 깊이도 함께 깊이 패인 상황이다. 정치적 견해와 인종과 성별을 비롯한 수많은 차이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소명”으로 유명한 저자 오스 기니스는 40여 년 간 살아온 미국 사회를 갈라지게 한 다양한 요소들을 바라보며 수많은 갈등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유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 책의 논지의 중심에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 설정이 놓여있다.
중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이지만, 저자는 미국의 헌법 정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특히나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관해서 프랑스와 영국의 해결책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혁명으로 교회의 문에 못을 박아 매장하려 했고, 영국은 국가교회의 형태로 종교를 남겨두었으나 매우 제한된 형태의 의식으로만 유지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에서 교회는 정치에 종속되고 말았다. 반면 미국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도리어 종교의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
문제는 오늘날 이런 미국 헌법의 정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는 양편의 공격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 편에서는 세속주의에 기반해 국가와 교회를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고(내지는 아예 종교의 영역을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다시 한 번 교회와 국가(권력)의 일체화를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오늘날 문화전쟁을 통해 서로를 맹렬하게 비난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분열시키는 중이다.
저자는 양측의 주장의 연원과 현실을 충분히 살핀 후, 현재 양 진영에서 주장하고 있는 ‘신성한 공적 광장(국가와 종교의 밀착)’과 ‘벌거벗은 공적 광장(국가와 종교의 극단적 분리)’은 모두 문제를 해결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양심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결된 종교의 자유(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시민교양에 기초한 공적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양면 전쟁은 가장 어려운 전쟁 유형 중 하나다. 어지간한 강대국도 양면에서 강한 적과 마주하는 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데 제대로 된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힘든 전장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C. S. 루이스도 그의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딜레마다. 한 쪽을 상대하는 것도 벅찬 데, 이 쪽에 대응하다 보면 저쪽 편이냐는 공격을 받기 일쑤라 치열한 진영논리 속에서 고립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이런 입장이 언제나 두루뭉술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꼭 혼란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극단적인 주장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끄는 법이니까. 그러나 극단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낳는다. 트럼프로 노골화된 미국의 문화전쟁이 민간인을 향한 총질도 마다하지 않는 무장 사병집단(ICE)으로 확장되는 모습은, 지난 친위쿠데타 사건을 겪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 다 단순히 똘아이 같은 대통령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광장을,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자리가 아니라, 귀를 막은 채 끊임없이 자기주장만 되뇌는 집회장으로만 인식하는 강력한 집단적(이 쪽이나, 저 쪽이나) 사고가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결국 돈과 권력이 있다.
확실한 건 우리의 광장에 필요한 건 거대한 돌덩이로 총 든 형상을 세우는 게 아니라, 대화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지방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있는 이 즈음, 우리나라의 상황은 결코 낙관할 수 없을 것 같다. 온라인에 가득한 혐오는, 이제 누구도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나와 다른 진영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퍼부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대화의 광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의 배후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상황을 분석하고 풀어낸다. 훌륭한 솜씨다. 몇 번은 다시 읽으며 책 속의 논리를 깊히 익히고 싶은 책. 상반기 읽은 책 중에 베스트.
콘스탄티누스가 세상을 떠난 뒤, 로마 제국은 다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 휘말립니다. 세 아들과 두 조카에게 나누어졌던 제국은 곧 숙청과 반란, 내전 속에서 콘스탄티우스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촌, 젊은 철학도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합니다. 훗날 ‘배교자 율리아누스’라 불리게 될 인물의 등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