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딱 한 번 주어지는 찬양 인도 시간을 위해
팀은 얼마나 많은 정성으로 기도하고 준비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다 보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10분 안에
성도들에게 특별한 영적 이벤트를 경험시키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를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자칫 일상에서 실패한 삶의 예배를 만회하기 위한
과도한 퍼포먼스에 매달리게 될 우려가 큽니다.
- 전영훈, 『그 한 사람 예배자에게』 중에서
벌써 10년 전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으로 전 세계적인 이슈를 만들었던 피케티의 근간이다. 그 사이에도 열 권 가까운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나왔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오랜만에 피케티의 책을 손에 들어 본다. “21세기 자본”에서 상속 등으로 형성된 금융 자본(사실상의 지대)의 수익률이 임금소득보다 월등히 높은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이번 책에서는 (제목처럼) 평등이라는 가치가 인류 역사에 어떤 식으로 등장해 퍼져나갔는지를 (생각보다는 짧지 않게) 정리해 낸다.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인류의 노력으로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좌파답게, “인류의 진보는 기정사실이며, 평등을 향한 여정은 승산 있는 싸움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 과정이 늘 장밋빛이거나 레드 카펫이 깔려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류는 평등을 향해 다양한 장치들과 규칙을 만들었고, 실제로 교육과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평등이 확대되어 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논지이다.
물론 이 과정은 앞서도 말했듯 매끄럽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노예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영국 정부는 (노예가 아니라!) 노예의 소유주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했다. 또,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식민 본국은 막대한 빚을 과거의 식민지들에게 안겼다. 결과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었고, 식민지는 독립했지만(평등의 증가), 여전히 불평등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런 불평등을 강화하는 장치들이 공고화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여론을 형성하는 각종 미디어와 싱크탱크들은 독점화 된 부와 권력을 평등하게 이전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막을 힘과 의지가 충만하다. 그들 대부분이 이미 부와 권력을 손에 준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저자의 단골 레퍼토리인 누진세 제도의 강화, 세금 도피처들을 돌며 희희낙락하는 탈세범들을 제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세금 부과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부자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면 경제성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반론에 관해서 저자는 역사적 데이터를 가지고 오는데, 미국의 예를 보면 1870년부터 2020년까지, 오히려 누진세를 강화했을 때 경제성장률이 높았다는 것. 사회적 불평등을 일정 수준 이하로 만드는 것은 전반적인 사회적, 경제적 성과를 내는 데 영향이 있다는 말이다.
다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런 목소리가 과연 언제쯤 힘을 얻을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결과물을 내서 반대자들까지 설득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국가에 의한 생산 수단의 소유와 중앙집권화된 계획 체제라는 특징을 지니는 사회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전 세계적 범위의 초국가적 세금을 도입하는 것만큼 “중앙집권적이고 계획적인” 체제가 또 있을까.(저자도 자신의 주장과 비슷한 제안을 하는 프리오의 주장에 대해 “극단적인 중앙 집권 국가나 다름 없”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226)
책 후반에는 교육의 평등, 남녀 간의 임금격차와 사회적 평등, 종교에 대한 대우 등등 사회 전반적인 평등에 관한 조금은 짧은 주장들이 담겨 있는데, 이 역시 문제의 지적은 확실했으나, 실질적인 해결책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다.
단적으로, 교육의 평등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걸 공교육의 차원에서 구현해 낼 방법은 있을까? 얼치기 평등주의적 교육이론에 따라, 모든 아이들에게 (애초의 학업성취도와 상관없이) 똑같은 수준의 교육(이 경우 상대적으로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는 학생에게 맞출 수밖에 없다)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평등한 것일까?
물론 이 책에서 제시된 평등의 요구는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의 감각에 어울리는 일들이다. 하지만 평등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릴 때, 자칫 그 또한 우리를 옭아매는 사상적 밧줄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평등은 목적이 아니라 문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최근 주목하고 있는 저자 중 한 명인 레베카 맥클러플린의 새 책이다. 100페이지도 안 되는 작고 얇은 책인데, 제목에 나온 것처럼 부활이라는 주제에 집중해서 쓰였다. 책은 크게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은 복음서의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에 관한 내용이고, 2장은 십자가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3장은 드디어 부활의 실제성에 관해, 마지막 4장은 부활의 신학적 의미에 관한 내용이다.
역시나 가장 관심이 있었던 건 3장이었는데, 저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는지의 여부는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근거를 통해서 설명해야 한다는 오래된 방식을 꺼내든다.
저자는 복음의 급속한 확산은 부활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간접적인 근거에서 시작해, 애초에 부활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귀의할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도 없었을 것이며, 이 메시지는 이른 시기부터 교회의 중심적인 메시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또, 부활은 일부러 꾸며낼 이유도 없었고, 심지어 (만약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면) 자신들이 조작한 메시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한다.
혹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일 수도 있다는 공격에 대해서는, 로마 군인들은 사람을 죽이는 데 전문가였으며, 실수로 살려두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리고 부활과 관련된 기사에 당시에는 합법적 증인의 자격을 갖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성들이 증인으로 등장한다는 점 또한, 이 기록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낮다고 말한다.
사실 이 이야기가 아주 새로운, 독자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이전부터 다양한 저자들을 통해서 말해져왔던 것들이기도 하니까. 다만 이 내용을 중심으로 앞뒤에 적당한 내용을 붙여서 잘 구성된 또 다른 좋은 읽을거리가 만들어졌다. 이 주제와만 관련해서 책을 찾는다면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을 듯하다. 하나의 좋은 전도책자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핵심적인 주제들을 쉽고, 부담 없이 읽어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물론 잘 쓰인 책이어야겠지만) 기독교 출판 시정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