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책방 인터뷰.
오늘은 반려동물 등록 및 구독 서비스 스타트업 페오펫의
최바울 대표님을 만나 인터뷰를 해보았습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고 계시는 분들은 특히 주목!
아침에만 피는 버섯은 아침저녁을 모르고
여름 한 철 쓰르라미는 봄가을을 모릅니다.
……
몸에만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앎에도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습니다.
<소요유>
- 장자, 『마음으로 읽는 장자』 중에서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하는 질문은 인류의 지성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물어왔던 질문이다. 철학과 종교에서는 이 질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쉽게 합의를 이루지는 못했다. 오늘날에는 좀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려는 시도들도 있다. 이른바 뇌과학의 영향으로, 선악과 같은 도덕, 윤리의식을 뇌의 기능으로(그러니까 순수하게 물리적인 효과로) 치환하려는 태도다. 그러나 이 역시 모든 질문에 합리적인 대답은 아니기도 하다.
이 책은 영유아들의 행동을 연구하면서 인간이 선과 악을 언제부터 구분하게 되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결과를 제시한다. 사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실험 변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비윤리적이니까)를 지니는데, 저자는 그런 변수가 최소한으로 생기는 영유아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실험을 꾸밈으로써 이 문제를 피해가 보려고 시도한다.
물론 여기에도 어려움은 있는데, 말을 할 줄 모르는 아기들의 의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는 점이다. 이 부분은 아아들의 표정과 눈동자의 움직임 등을 분석하는 최신 기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봤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선택지에 더 오랜 시간 눈길이 머문다는 것. 이게 절대적으로 맞는 추측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실험이고, 저자의 결론도 명쾌하다. 아기들은 생후 1년이 되기 이전에 이미, 가장 단순한 형태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구분할 줄 알고, 대다수가 선한 행위 쪽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실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들 가운데는 그렇게 단순하게 선악을 구분하기 쉽지 않은 것들도 잔뜩 있기에, 아기들의 행동에서 발견된 결과를 지나치게 확대해석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실험 결과는 책에서 묻는 “도덕은 타고나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소위 진화심리학의 상투적인 표현(어떤 것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생존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존재론과 정의론의 기괴한 융합)을 사용해 가며, 어떻게든 (입증되지도, 관찰된 적도 없는) 과거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며 이어져 온 진화적 생존 적응설을 꺼내지만, 애초에 그런 설명을 할 거라면 굳이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필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연구의 방법론은 신박하긴 했지만, 선악이 무엇인지를 묻기에 아기들은 그리 적합한 스승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재산은 내 인격의 수준만큼 필요한 것이지
내 인격의 수준보다 많이 가지면
재산의 노예가 됩니다.
- 김형석, 『교회 밖 하나님 나라』 중에서
사실 모든 예술은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추상예술조차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어떤 면을 포착해서 과장하거나 의도적인 왜곡, 축소를 통해 예술가가 경험한 감흥과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회는 예술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해 왔다. 중세는 교회 예술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용도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던 중세 교회 예술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들었고, 그런 것들을 관리하는 교회 또한 함께 부유하고 화려해져만 갔다. 화려함에 익숙한 교회는 자연스럽게 부패해버렸고, 가장 본질적인 말씀의 선포는 약해지다 못해 희미해졌다.
종교개혁자들이 예술을 의심스럽게 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시기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식화 된 교회의 각종 부속들을 제거하고, 본질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시기였다. 마치 과식을 해서 체한 사람이 기름진 음식을 끊고 죽만 먹어야 하는 것처럼. 개혁자들은 미술과 음악, 건축 등 여러 부분에서 소박한 (때로는 금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양식을 선호했다.
아쉽게도 이 때문인지 개신교회 안에서 예술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물론 개혁파 화가라고 인정받는 얀 베르메르 같은 걸출한 작가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그 양과 질에서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이전 시대 이른바 “성화”라고 불렸던, 기독교적 주제를 담은 좀 더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작품들이 부족한 것은 퍽 아쉬운 일이다.
이 책은 가톨릭 사제이면서 화가이기도 했던 지거 쾨더라는 인물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전체에 걸쳐서 컬러 도판이 잔뜩 실려 있고(무려 103개), 그 그림을 해설하는 다양한 필자들(무려 28명이다)의 글이 덧붙여져 있는 형태다.
물론 눈으로 읽는 것은 그 필자들의 글이고, 개중에는 꽤 인상적인 통찰들도 보이지만, 역시 이 책의 백미는 그림이다. 독특한 화풍인데, 계속 보다보니 특징 같은 것들도 눈에 좀 들어오고(문외한인 나에겐 꽤 큰 발견이다), 성경 속 이야기와 오늘날 우리의 현실 사이의 시간과 공간적 간격을 그림 속에서 극복하는 모습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게 예술의 능력이지 않을까.
상당수의 그림에서 손이 자주 보인다. 하나님의 손을 상징하는 장치로 보이는데, 성경 속 수많은 인물들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하나님의 손이 전쟁과 증오로 시끄러운 오늘 우리의 세계에도 임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