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다>, 이는 이상한 표현이다.

사람들은 왜 <사랑에 오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가?

아마도 사랑이 일종의 추락이자 상실이라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깊은> 사랑이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사랑이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웃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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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발전과 기독교
손봉호 지음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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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한국 사회에 교회와 기독교가 들어온 지도 벌써 백 년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이 시기 우리나라는 전제적 왕조에서 식민지로, 그리고 다시 신생 독립국에서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부유한 나라로 숨 가쁘게 변해왔다. 이 책은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가 사회의 발전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에 관해, 역사관의 전환, 교육이나 의료, 빈곤퇴치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글들을 엮은 것이다.

 

 

2. 감상평 。。。。。。。   

 

     어떻게 보면 좀 낯간지러운 말만 가득한 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되었건 우리나라에서 자화자찬이라는 건 그리 점수를 따기 어려운 모습이니까.

 

     하지만 기독교가 무슨 사회악이나 되는 것처럼 평가절하하고, 아니 노골적인 조롱과 욕설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정상적인 모습은 아닌 게 분명하다. 공과(功過)라는 게 산술적으로 더하고 빼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기독교가 이 땅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건 단순히 ‘극성스러움’ 때문만은 아닌 게 분명한 거니까. 과오도 있지만, 그건 적극적인 악의 행사보다는 침묵과 관조(물론 이것도 결코 가벼운 잘못은 아니다)가 대부분이었고, 반대로 선의의 행위들도 많았다.(여기에서 최근 몇몇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벌인 개인적 돌출행동은 제외하자.)

 

 

     개화기,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던 시절, 한국의 기독교 전래는 다른 아시아권이나 남미, 혹은 아프리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서구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첨병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기독교는 외국의 침탈이 벌어지기 수십 년 전에 책과 사람들을 통해 이 땅 곳곳에 심겨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일본의 제국주의적 양태에 대항하는 구심점 중 하나의 역할을 했다. 또 당시 기독교는 서양의 문화와 기술을 수입하는 통로로서 작동하기도 했고, 이 땅의 초기 근대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은 거의 도맡아 설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경제적 성장이 꼭 어떤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경제적 분야에 대한 공헌만으로 기독교가 유익하다고 주장하려는 건 적절치 않지만, 몇몇 저자들과 그들의 글들에서는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 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기독교가 도대체 뭘 해왔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믿고 읽도록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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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2-1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가 사회 구원의 역할을 포기하고 개인의 구령에 전념하면서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란가방 2013-02-14 15:30   좋아요 0 | URL
적극 동의합니다.
창조세계 전반을 구속하는 큰 비전을 상실해 버렸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죠.
 

1. 줄거리 。。。。。。。   

 

     어린 시절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하려다 먼저 죽은 남동생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윤희. 자신을 원망하며 시도 때도 없이 구타를 하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면서도, 묵묵히 그 매를 다 맞고 있다.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비만 오면 옛날 그 기억이 떠올라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 숨어 있다 보니 어렵게 얻은 일자리는 금방 잃어버리기를 수차례.

 

     어느 날 동네 양아치인 고등학생 진호에게 동생과 찍은 하나 뿐인 사진이 들어 있는 지갑을 빼앗긴 윤희는 얼마 후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진호와 조우하게 된다. 조금씩 진호의 아픔을 알게 되면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게 된 윤희는, 이제 ‘누나’로서 진호를 구하기 위해 큰 걸음을 내딛으면서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실수와 잘못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소심한 성격 탓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이 무거운 책임감이라는 통로를 통해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런 책임감으로 인해 영화 속 윤희는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남동생을, 자신이 죽인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윤희가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구타를 당하는 것은 일종의 고행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그런 상처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거나 자책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구타는 그 순간 육체적인 고통에 집중하게 만들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윤희를 괴롭게 만드는 근본적인 과거의 상처를 계속 떠올리게 만들 뿐이었다. 이런 부분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진호나, 늘 술에 취해 살며 목적도 없이 윤희를 구타하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책임인지도,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감독은 ‘종교’라는 대안을 꺼낸다. 오래 전부터 종교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 시대의 지혜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맡기고 위로와 해답을 얻었던 대상이었으니까. 물론 영화 속에서 종교(혹은 기도)는 모든 것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만능키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윤희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었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얻게 되었고, 이후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건 그녀 자신의 용기와 결단의 힘이다.

 

     또, 영화는 그렇게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 낸 윤희를, 또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치유자로 그려낸다. 먼저 자신 안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직업적으로, 혹은 관성적으로 무미건조하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건드리는 영화 속 의사나 교사와 대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저 영화 속에서 종교가 일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며 낮게 평가하려는 사람들은, 한 줌도 되지 않는 자신의 지식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평가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한 근대인들(그리고 이 영화 속의 차가운 의사와 교사)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려고 했던데다 저예산 영화다보니, 화려하고 웅장한 영상보다는 그냥 우리 주변의 모습들을 편안하고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 연기자로 전업한 지 꽤 시간이 흐른 성유리는 이젠 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그녀와 콤비를 이룬 고등학생 역의 이주승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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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 - 렌티큘러 없음
라이언 존슨 감독, 브루스 윌리스 외 출연 / UEK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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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주인공 조는 청부살인업자다. 그가 살던 시대보다 30년 후에는 타임머신이 개발되는데, 이를 독점한 범죄조직은 자신들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캡슐에 넣어 과거로 보내고, 조 같은 업자들이 그렇게 보내져 온 사람들을 죽이고 처리하는 것. 말 그대로 완전범죄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전해온 놀라운 소식. 친구의 미래 존재가 살인대상이 되어 나타났단 것. 그리고 얼마 후, 조에게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

 

     미래의 조는 자신의 아내를 죽인 조직의 두목 레인메이커를 처리하고 아내를 살려내기 위해 직접 과거로 왔던 것이다. 시간으로 연결된 미래의 조와 현재의 조. 하지만 두 사람은 좀처럼 마음이 맞지 않는다. 마침내 어린 레인메이커를 발견한 두 사람. 미래의 조는 소년을 죽여 틀어진 미래를 바꾸려 하지만, 현재의 조는 그런 그를 보며 갈등을 하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영화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현재와 미래의 ‘나’가 조우하는 설정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이상 현재의 변화가 미래의 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십분 이용해야 하는데, 감독이 처음부터 이 점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들어갔기 때문인지, 시간 여행 중 두 명의 ‘자신’이 직접 만나는 경우는 피하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좀 다른 시도를 했던 것 같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영화의 마지막까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흥미를 자아낼 만한 부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시골의 농장 근처는 딱히 긴박감을 주기엔 적절하지 않고(우선 보이는 게 별로 없으니까), 두 명의 조가 생각의 차이를 보이고 싸우는 부분이나, 레인메이커가 될 소년을 죽이려는 미래의 조의 집착도 딱히 공감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 무엇보다 그 자신이 수십 명의 사람들을 돈을 받고 죽여 왔던 청부업자였으면서 말이다.

 

 

 

     처음부터 주인공을 살인청부업자로, 그것도 딱히 고민 없는 인물로 설정해 둔 것 자체가 패착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소재의 독특성, 그리고 결말의 반전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역시 영화의 기본은 탄탄한 인물설정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재미라는 걸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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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주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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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아람어 석사학위, 생물학 학사학위, 영화학 석사학위를 비롯한 잡다한 면허증들을 가지고 있는 앙투안. 가끔씩 대학에서 교수들이 펑크 낸 강의들을 대타로 채우는 강사 일을 하며 먹고 살고 있지만, 정교수 같은 게 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런 앙투완의 고민은 남들처럼 세상에 쉽게 적응을 할 수가 없다는 것.

 

    결국 자신의 지나치게 많은 지식이 사회부적응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그는 스스로 바보가 되기로 결정한다.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남드링 먹는 고열량 정크푸드를 시켜 먹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때우고, 가끔 출강하던 학교마저 때려치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쓰게 된 앙투완은 학창시절 친구의 도움으로 증권중개인이 된다. 일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스포츠카를 타고 명품 옷을 걸치고 헬스클럽 회원에 등록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지만, 그의 마음 속 한 구석은 여전히 편치만은 않다.

 

 

2. 감상평 。。。。。。。    

 

     너무 많은 지식은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똑같은 것을 봐도 그 이면에 감춰진 한심하고 절망적인 현실까지 봐야 하는 ‘지성인(이 말은 한 줌이나 될까 싶은 자신의 지식을 팔아 개인적 이익이나 추구하는 싸구려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의 삶이란 얼마나 피곤하고 고단할까. 작가는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바보’가 되어버리겠다는 소설 속 앙투완의 결심을 통해,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화려하고 성공적인 삶을 보이는 것들이 실은 생각 없이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라는 주장이니, 좀 엉뚱해 보이지만 단순하지만은 않은 내용이다.

 

    결국 작가는 한없이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다는 현대의 문명과 인간들의 자만이 뭘 얼마나 나아지게 해왔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인간의 유전자를 모두 분석해 내고, 허락만 된다면 언제든 복제인간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그들, 최첨단의 투자 기법으로 실제 하는 돈의 몇 십, 몇 백 배나 되는 엄청난 금액의 가상 거래들을 성사시키고 그 ‘컴퓨터 게임’의 대가로 엄청난 돈을 챙겨가는 그들, 초호화 요트에 개인용 비행기에 축구장처럼 넓은 집에서 흥청망청 살아가는 그들은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결국 인간의 가치를 물건으로 격하시키고,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을 그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조작하고 망치고 있는 건 그런 ‘잘 살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너무 어이없게 풀려버리는 결론부는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놓고 보기엔 좀 아쉽다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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