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


영화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모론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전제한다. 얼마 전 시내버스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죽은 세 명의 사람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설계된 사고라는 것. 아이러니한 건 주인공 영일(강동원)과 그의 패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정확히 바로 그 작업이었다. 의뢰를 받고 사고로 위장해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


영일은 자기들보다 훨씬 더 크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룹이 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른바 ‘청소부’라는 존재. 어느 날 영일 패거리는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아버지를 살해해 달라는 그의 딸의 의뢰를 받게 되고, 의뢰를 위해 작전을 진행하던 중, 자신들이 더 큰 조직, 청소부의 타겟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이야기.


뭐 여기까지는 나름 설계가 잘 됐다 싶은데, 문제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솜씨. 무엇보다 영화 말미에 설명되는 ‘청소부’의 정체가 모호하다. 그건 영일이 만들어낸 상상의 존재인가, 아니면 정말로 존재하는 조직일까. 결국 영화가 끝난 후 나오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헐겁다.


영화의 메인소재가 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조직이니 만큼, 그 설계 과정이 얼마나 촘촘하고 절묘하게 만들어지느냐가 영화를 보는 중요한 재미 포인트였다. 초반에 한 사람을 재건축 공사장으로 끌어들여 처리하는 과정은 나름 긴박하게 전개되긴 했지만, 역시나 너무나 많은 우연적 요소가 남아 있어서 ‘일을 저런 식으로 한다고?’ 하는 의문이...


주인공 조직의 또 다른 주요 사건인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의뢰건도 마찬가지다. 온갖 의혹으로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코앞에서 후보자 한 명만 정확하게 제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일을 위해 사용한 방법이 너무나 위험하다. 계획의 일부만 틀어졌어도 단번에 대형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일.


두 개의 조직이 서로를 견제하는 과정이 일종의 첩보물처럼 펼쳐져야 하는데, 이건 그냥 가끔 유튜브 알고리즘에 뜨는 기이한 도미노 영상을 보는 것 같다. 물론 그게 실제고 신기하긴 한데, 왠지 현실감이 없는 듯한... 저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려면 반드시 정교한, 그것도 조금의 변수도 없는 그런 계획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 딱 영화 속 작전을 보는 느낌이 그랬다.





캐릭터의 매력.


또 하나의 어필 포인트는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여야 했는데, 이 부분도 아쉽다. 각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 충분히 어필된 걸까. 뭔가 과거를 가진 인물들이 잔뜩 나오긴 하는데, 그 ‘과거’가 충분히 공감되는 과거인가 하는 부분은 확신이 가지 않는다. 뜬금없이 등장한 트랜스젠더 캐릭터는 할리우드를 따라하고 싶었던 건가 싶고, 이들이 왜 모였는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동지애의 근원에 대해서는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여기에 주인공 중에서도 주인공인 강동원의 영일 역은 자기 혼자 고민하지 누구와 나누는 법이 없다. 물론 누굴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답답함도 늘어나고, 결곡 자기 혼자 나서다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끝나버리니 더더욱 매력이 떨어진다.


어쩌다 보니 별로였던 점만 잔뜩 언급해버렸는데, 뭐 그래도 영화관에 앉아 있는 내내 딴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좀 있었던 거고. 전반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엔 아쉬웠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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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사전 - 그 맛있는 디저트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가이 후미에 지음, 이노우에 아야 그림, 김수정 옮김 / 윌스타일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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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인적으로 디저트류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보통 디저트라고 불리는 것들은 설탕 범벅인지라, 건강을 생각해서도, 또 지나치게 단 걸 먹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편이라 딱히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손에 든 건, 역시나 조금 쉬어가려는 독서 타임이었기 때문.


책은 주로 유럽 지역에서 전해지는 100가지 디저트류를 차곡차곡 설명해 담아낸다. 제목에 사전이라고 붙어 있긴 하지만, 가나다순으로(혹은 ABC순으로) 정리된 건 아니고, 시대에 따라 구분을 지어두었다. 디저트류라는 게 어디 누가 몇 년도에 만들었다는 식으로 정확히 정의되지 않은 게 많아서, 나름 알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최대한 정리해두었다고 한다. 크게 중세, 근세, 근대, 현대의 항목 아래, 다양한 디저트류가 소개되어 있다.


각 항목은 그 디저트의 유래,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나아가 관련되어 알고 있으면 좋을 만한 다양한 상식, 역사적 지식 같은 것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책의 가치를 더욱 올려주는 건, 직접 손으로 그린 삽화들. 전체 항목의 4/5 정도는 그림작가가 그린 그 디저트의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대체로 서양의 디저트는 빵류인 것 같다. 이름도 생소한 온갖 디저트의 설명을 읽다보면, 식사를 하고서 또 이렇게 잔뜩 밀가루를 목으로 넘기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또 설명을 한참 읽다 보면 이건 무슨 맛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긴 한다. 기본 재료가 대부분 밀과 꿀, 설탕, 버터에, 다양한 추가재료가 더해지는 식인데, 참 화려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푸딩류에 관한 설명이 가장 이색적이었는데, 원래 푸딩은 영국의 선상 요리로, 오랜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식재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남은 빵 부스러기에 고기 비계(?), 달걀물 등을 섞어 쩌낸 게 그 시초라고 한다. 재료가 꽤나 신기하다. 언젠가 영국 전통 요리 중 하나인 블랙푸딩이라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우리의 선지와 비슷하게 돼지 피에 이것저것을 섞어만드는 거라고 하니...


몇몇 디저트에는 흥미로운 유래가 전해진다. 예를 들면 한 귀족의 파티를 앞두고 주방에서 대판 싸워 파티시에가 그만두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 난감한 상황에 한 젊은 하녀가 자신의 할머니가 해 주셨다는 디저트를 만들었는데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귀족은 그 하녀의 이름을 이 새 디저트에 붙여주었는데, 그녀의 이름이 마들렌이었다나.


또, 파리의 주식거래소 근처에서 장사를 하던 한 파티시에가 젊은 금융가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매력적인 디저트를 고민하던 중, 이왕이면 금괴 모양으로 만든 간식이라면 그 동네에서 더 호응을 얻을 거라고 생각하고 구어낸 디저트가 있다. 바로 휘낭시에인데, 그 생김새를 생각해 보면 여전히 금괴 모양인 것 같기도 하다.





큰 고민 없이 차분하게 재미로 읽어볼 만한 책. 디저트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옆에 끼고 하나씩 찾아다니며 도장깨기를 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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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6-11 0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건강때문에 디저트류는 먹지 않지만 사진만 봐도 군침이 도네요^^
 
교회 옆 미술관 - 타자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
구미정 지음 / 비아토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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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뽑았다. 교회 옆 미술관. 뭔가 2000년대 초반 추억의 영화 중 하나였을 것 같은 제목이다. 책은 성경 속 장면과 그 장면을 그림으로 옮긴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곁들여 주면서 설명해 가는 방식을 취한다. 딱 제목 그대로. 비슷한 기획으로 나온 책도 몇 권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바로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이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 저자는 성경 속 등장하는 스물네 명의 여성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나름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서문에서 저자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글쓰기”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고, 저자 자신도 여성이기도 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에 주목해보자는 시도는 뭐라 할 이유가 없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던 책 가운데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레이첼 헬드 에반스가 쓴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1년”이 있었다. 또, 최근에 읽었던 레베카 맥클러플린의 “여인들의 눈으로 본 예수”도 나름 짜임새 있게 쓰인 책이었다. 거기에 이 책은 명화들을 함께 싣기까지 했으니 잘만 했다면 훨씬 더 재미있는 책이 될 법도 했다.


다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저자가 한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잡지의 연재되는 글의 경우 분량의 제한도 있었을 테고, 그래서 논지도 굉장히 압축적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때문일까. 몇몇 꼭지의 글들은 확실히 논리 전개가 좀 무리하다 싶은 경우가 보인다.


보통 각 장의 글들은 도입부와 성경 본문의 소개, 그리고 그림에 관한 언급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도입부와 성경 본문으로의 연결이 썩 매끄럽지 못한 경우가 자주 보인다. 그래도 개중에는 알아둘 만한 상식 같은 것들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하지만, 이번엔 결론부의 주장이 살짝 비틀려 있는 경우도 보인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했던 살로메에 대해 굉장히 동정어린 시선을 보낸다. 그 어린 아이가 뭘 알았겠느냐며, 어머니의 사주에 의해 하는 수없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한 화가의 그림 속 살로메의 표정이 어두운 것에서 마치 엄청난 증거라도 얻은 듯 “부패한 권력”이 휘두르는 “야만적인 폭력”의 “희생자”로 그녀를 성화시킨다. 그런 살로메를 비난하는 것이 마치 희생자를 “할퀴는” 일인 양 비난까지 한다.


비단 이 항목 하나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마리아에게서는 “순종적인 여성상”을 벗겨내려고 애쓰고, 룻과 보아스를 다룬 장의 제목에서는 ‘자매애’에 대한 찬사가 붙어 있다. 이게 맞나 약간 당황했는데, 앞서 페미니즘 관점에서 이야기를 쓰려다 보니 나온 헐거운 해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여성은 언제나 희생자이고, 피해자이고, 옳은 쪽이라는 고정관념의 발현이랄까(앞서 추천한 두 권의 책들과 이 책의 가장 큰 차이다).





물론 그렇다고 책의 내용 전체가 영 눈에 안 들어왔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 좋은 통찰을 보여주는 장들도 있었고, 이전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에서 본문을 비춰주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전체적인 글의 짜임새가 좀 아쉬웠다. 다른 관점으로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본문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건 그냥 팬픽의 수준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잔뜩 실려 있는 컬러 도판을 보는 맛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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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상이 잘못 돌아가나
G. K. 체스터턴 지음, 서상복 옮김 / 연암서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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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몇 차례 체스터턴에 관한 리뷰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그는 영국 출신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쓴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추리소설을 어린 시절 즐겁게 읽었고, 조금 자란 후에는 그의 글이 C. S. 루이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호감을 갖게 된 작가다. 루이스는 가톨릭 신앙에 충실했던 체스터턴 등에게서, 뛰어난 지적 사고의 소유자가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견된다면, 그 신앙에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리를 했었다.


우리나라에도 추리소설 이외의 체스터턴의 글이 몇 권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그 중 앞서 읽었던 세 권의 책은 어느 정도 기독교 신앙에 관련된 글이었다면, 이 책은 좀 더 사회비평적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출판사도 앞서의 책들은 비아토르나 아바서원 같은 기독교 계통의 회사였지만, 이 책은 연암서가다.





책은 체스터턴이 살았던 20세기 초반 영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지적한다. 주거문제, 교육문제, 제국주의, 페미니즘 같은 당대의 네 가지 문제에, 아주 통렬한 풍자를 동원한 날카로운 비평을 쏟아낸다.


주제가 크게 네 가지라고는 하지만, 저자인 체스터턴의 입장은 한 가지로 모아진다. 그는 당대 새롭게 등장한 진보라는 이름의 사회적 실험에 강한 반감을 드러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기득권 세력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고, 나아가 아예 정치적 보수파와 진보파 양쪽이 서로 적대적 공생관계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강한 의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옹호하는 가치들을 보면 전통적인 것들이라는 점에서(중산층이 자기 소유의 제대로 된 집을 갖고, 귀족적 가치와 명예를 아는 교육을 하고,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근거한 역할을 제안하고 하는 등) 분명 체스터턴은 보수주의자, 혹은 전통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날 보수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심각하고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지, 원래 이 단어는 반드시 바꿔야 할 필요성이 없는 상황이라면, 혹은 더 나은 대안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전에 하는 것을 그대로 잇고자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탁월한 글재주의 소유자답게, 체스터턴은 수많은 사회적 주제들 사이를 종횡무진 활보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조금은 시니컬하게 쏟아낸다. 그리고 이 시니컬함이 종내 좀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중 한 명이 이 책의 번역자가 아니었나 싶은데.... 책 곳곳에 쓸 데 없는 역주를 너무 많이 달아 놨다. 저자에 대한 평가는 그의 글을 통해 독자가 직접 하면 그만인데, 이건 역자가 무슨 해제를 하듯 여기저기 이건 체스터턴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각주가 수두룩하다.


특히 페미니즘에 관한 저자의 의견에 대해 이런 시도가 잦은데, 예를 들면 170쪽의 19번 각주를 보면 여성주의에 대한 오용과 남용이 만연한 상황을 지적하면서 체스터턴도 그 중 하나라고 단정짓는다. 그러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바람직해 보이는 정의를 하나 끌어다 대는데, 역자가 제시하고 있는 정의는 정작 페니미스트들 사이에서도 합의되지 않고 있는 부분이고, 그 중 한 파의 입장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개입이 꽤 잦아서 ‘마음에 안 들면 굳이 번역은 왜 하겠다고 했는지’ 싶은 생각도 들 정도.


139쪽의 9번 역주도 가관이다. 여기서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니므롯에 관해 설명하면서 “유대인의 부족신 야훼가 인정한 뛰어난 사냥꾼”이라고 덧붙인다. 역자의 무신론적 전제를 굉장히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으로, 본인은 꽤나 학술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우쭐함까지 엿보인다. 가톨릭신자였던 체스터턴은 이런 각주를 보고 뭐라고 말할까. 이건 좋게 봐도 그에 대한 몰이해, 내지는 디스로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다.


물론 모든 각주가 이런 식은 아니다. 많은 경우 본문에서 언급된 어휘나 인물들에 관한 좋은 설명이 붙어있지만, 결국 음식에 들어간 머리카락 하나가 그 음식에 대한 평가를 좌우하게 되는 법이니까. 못내 자신이 “제대로 된” 평가를 덧붙이지 않으면 독자가 체스터턴의 의견을 따라가 버릴 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던 것일까.





체스터턴의 글 가운데 분명 시대적 한계를 지닌 것들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체스터턴이 반복적으로 지적하는 (일종의 철학적으로 이데올로기로서의) 진보적 입장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이 낳을 수 있는 위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번역자(와 출판사 관계자)가 극구 다른 의견을 쓰고 싶다면,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다른 책을 쓰면 될 일이다.


위대한 보수주의자였던 체스터턴의 맛을 느껴볼 수 있는 책. 시대적 간격이 있어서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고, 그의 주장에 대한 이견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논리적으로 그와 대면해 보는 건 분명 유익한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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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벨 집으로
게리 도버먼 감독, 베라 파미가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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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이상 관람가 공포.


영화는 주변의 온갖 심령현상을 유발하는 인형인 애나벨을 하필 자신의 집 지하실에 둔 워렌 부부에게서 시작한다. 그런 집에 딸 아이를 혼자 두고(물론 보모인 메리가 함께 있긴 했지만) 1박 2일 일정을 떠난 부모.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한 딸 주디와 보모인 메리는 그럭저럭 시간을 잘 보내나 싶었지만, 메리의 친구 다니엘라가 등장하면서 모든 게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들어가지 말라는 지하실에 굳이 들어가서 온갖 것들을 다 만지고, 심지어 워렌 부분의 집 이곳저곳을 뒤지기까지 하던 짜증유발자 다니엘라의 활약(?)으로 결국 애나벨이 깨어난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이런저런 공포 장면이 이어지는데, 생각보다 그 정도가 덜하다. 우선은 애나밸이라는 인형 자체가 동양의(예를 들면 일본의) 인형에 비해 훨씬 투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던 데다가, 다른 공포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덜컥거리는 느낌이랄까. 이게 왜 15세 이상 관람가인지를 알 것 같은 느낌.





목적이 좋으면 다 좋은가?


영화를 보는 내내 속이 터지게 만드는 다니엘라의 만행은, 알고 보니 자신이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심령 현상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는 워렌 부부의 집에 가면, 죽은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쯤 되면 애가 좀 생각이 모자란 건가 싶은데, 영화 내내 수많은 사망플래그를 세웠는데도 끝까지 무사하다(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부분 중 하나다). 심지어 영화 말미, 돌아온 워렌 부부는 다니엘라의 사정을 듣고는 그녀가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수를 써 주기까지 한다. 고등학생이나 돼서 벌인 분별력 없는 행동이 일으킨 수많은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은 채. 이것이 미국식 교육인 건가....





가장 위험한 건 부모.


근데 집에 이렇게 위험한 물건들이 잔뜩 있는데, 고작 지하실 문에 자물쇠 몇 개 달아놓는 걸로, 그리고 그 열쇠를 책상 아무 데나 던져 놓는 걸로 안심하고 떠나는 부모가 제일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보모를 구해 놓기는 했다지만, 저렇게 집 전체를 맡겨놔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의 태평함이 인상적이다.


뭐 하룻밤이야 무슨 큰일이 날까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런 지하실에 그런 물건들이 없는 평범한 가정 이야기고.... 애초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게 할 작정이 아니었나 싶은(그래야 영화가 되니) 허술한 설정에, 익히 예상되는 공포 시쿼스들.. 사실 영화를 보는 시간 내내 웃으면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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