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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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에게는 꽤나 불쾌하고 아픈 명칭일 수도 있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있다. 기자와 쓰레기를 더한 멸칭이다. 분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단어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역시나 소위 기자라는 이들이 벌이는 행태 때문이다.

이미 정파적으로 한 쪽에 확고하게 줄을 선 기자들이 벌이는 낯간지러운 찬양쇼나 닥치고 까고 보는 걸 무슨 대단한 비판의식의 표출이라는 자아도취, 문제를 가리기 위한 물타기 기사나, 뻔히 돈을 받고 쓰는 게 보이는 광고성 기사들, 자신이 적대적으로 여기는 정치세력을 비난하기 위해 몇 년 전 스스로가 썼던 기사의 논조를 180도 바꾸면서도 아무런 해명 따위도 하지 않는 뻔뻔함 뭐 이런 행태들이 모아진 결과일 것이다. 어디 재활용도 안 되는 악성 쓰레기.

물론 이 모든 것이 기자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도 가족이 있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마당에 위에서 시키는 걸 거부하는 건 여느 직장처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리라. 또, 일개 기자가 가질 수 있는 통찰의 한계도 분명하지 않은가. 때로 그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보이는 건, 몇몇 수준 이하의 개체들의 난동이 크게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최근 우후죽순 생겨난 온라인 신문과 무자격 기자들도 한 몫을 했을 수 있고.

이 책의 저자인 김인정 또한 기자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다른 기자다. 기레기의 홍수 속에서, 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이렇게 말하면 좀 박한 평가가 되려나) 애쓰는, 어쩌면 좋은 기자 중 한 명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어떻게 하면 좋은 기자가 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한 가득 채워져 있다.

책에 실려 있는 다양한 고민의 핵심에는 어떻게 고통을 기사로 써 내야 할까라는 질문이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기사로 접하는 사건들은 대개 누군가의 고통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맞고, 죽고, 학대당하는, 사기와 온갖 억울한 일들로 뉴스와 신문의 기사면이 채워져 있는 것. 그러니 저자의 고민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냥 보여주면 그만이 아니다.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하는데, 대개의 사건은 연속적이라 어디서부터 들을지를 결정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많은 경우 복잡한 문제로 깊이 들어가기 보다는 그저 겉핥기식으로 사건을 묘사하는 데 그치곤 한다. 당연히 그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아니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제대로 된 인식을 갖추기도 어려워진다.

​누군가의 아픔을 전시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구도에서 지방의 뉴스는 늘 무슨 문제가 있을 때나 등장하는 특별출연자역에 한정되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 기사에서의 논조의 문제 등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기사란 단순히 어떤 사건의 내용을 요약 서술하는 것 이상이라는 게 금세 드러난다.

AI의 발달로 이제 기사 역시(신문기사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뉴스까지도) AI가 대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AI가 과연 탐사보도를 할 수 있을까? 비대칭적인 정보의 양을 가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문제를 적절하게 다룰 능력이 있을까?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편견어린 시선을 스스로 필터링하고 뭔가 나아갈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AI의 객관성을 우리는 늘 신뢰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역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건 단지 기자라는 명함만 파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저널리즘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며 오랫동안 준비한, 그리고 밥벌이라는 중요하고도 치열한 영역 가운데서도 소위 기자정신을 지켜내려는 배짱이 있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사실 무언가 해답을 제시해 주는 책은 아니다. 저자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해 왔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잔뜩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하는 고민을 함께 해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유익이 있지 않을까. 물론 저자의 모든 관점에 동의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 관심이 있다면, 또는 기자라는 직업에 흥미가 있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언론이 어쩌구 하면서 한 마디 얹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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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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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됐다. 시리즈 제목이 퍽 간결하다. 그냥 “카이사르”. 앞선 시리즈 제목이 “로마의 일인자”, “풀잎관”, “포르투나의 선택”, “카이사르의 여자들”처럼 나름 임팩트가 있었는데, 이번엔 그냥 이름 네 글자만 떡 실려있다. 뭐 애초에 이 시리즈가 카이사르에게 집중하고 있었으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구나 싶기도 하고.(하지만 또 바로 다음 시리즈의 제목은 멋지다)


이번 책의 주 무대는 갈리아다. 로마화 된 남부 갈리아가 아니라 일명 “장발의 갈리아”라고 불리는 북부, 군사적으로는 정복되었지만 아직 로마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호시탐탐 독립을 시도하던 땅이다. BC 54~53년의 일이니 갈리아전쟁이 5년째에서 6년째로 넘어간 시점인데, 사실상 갈리아 전쟁을 마무리하는 시점인지라 화려한 전투 장면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물론 이 작가가 전술적 이해도는 좀 낮아서 전투 장면이 실감나지는 않다).


그래도 월동지에 머물던 한 개 군단이 전멸되는 사건이 일어나긴 하는데, 곧 카이사르가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아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고, 갈리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할 큰 사건이 하나 남아있지만 아마도 그건 다음 권에서 다룰 것으로 보인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이 시기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일과, 이듬해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마저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다. 정치적으로는 전자 쪽이 좀 더 큰 영향을 준 일이었는데, 로마의 유력자 두 사람을 혈연으로 이어준 율리아가 죽음으로써, (물론 앞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미 깨진) 삼두정치는 사실상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책에서는 원로원의 보수 세력인 보니파가 정략결혼으로 폼페이우스를 포섭하는 과정만 나오는데, 결국 그렇게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보수파의 추대로 카이사르와 대결을 하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아마도 이 시리즈의 가장 치열하고 빛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추측.





이 시기 로마의 원로원파가 굳이 카이사르와 손잡고 있던 폼에이우스에게 접근했던 이유는, 사실상 당시 정국이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포퓰리스트에 가까운 클로디우스라는 인물과 보수파의 수하인 밀로라는 인물이 각각 자경단을 조직해 시도 때도 없이 폭력사건이 일어나고, 평민집회에서 뽑힌 호민관들은 자신을 당선되게 도와준 후원자들의 지시에 따라 거부권을 남발하며 고등정무관 선거를 막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밀로가 클로디우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혼란해 진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폼페이우스를 경계하던 카토 같은 극 보수파조차도 폼페이우스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주어서 상황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어느 시기든 정치가 혼란해지면, 사람들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영웅적 지도자를 찾게 되는 법이다. 문제는 그렇게 쫓기듯 선택하는 영웅이 제대로 된 영웅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거지만.


여느 때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남은 책이 8권 밖에 안 된다는 게 아쉬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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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눈이 보여 주는 것 - 문학, 질문하며 함께 읽기
홍종락 지음 / 비아토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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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번역자로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에도 좋은 번역으로 여러 책을 통해 만난 홍종락 번역가의 신작(이지만 이제야 읽게 되었다)이다. 며칠 다시 도진 감기로 책 한 자 못 읽다가 복귀하는 첫 책으로 썩 괜찮은 선택이었다. 내용도 그리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렵지도 않고, 책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성격상 여러 책들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담겨 있어서 부담도 덜하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 책은 저자가 읽었던 여러 책들 중 몇 권을 뽑아 소개하는 구성이다. 소개되는 책들의 공통점은 모두 문학이라는 점. 소설이다. 저자가 기독교라는 배경을 갖고 있지만, 여기 소개되고 있는 책들이 모두 기독교 소설인 건 아니다. 물론 그걸 어떻게 읽어내느냐 하는 부분에서는 저자 개인의 취향이 물씬 드러난다.


각각의 책에서 저자가 뽑은 핵심적인 내용들을 짤막하게 소개한 뒤에는, 이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할 만한 질문들이 덧붙여져 있다. 아마도 저자가 이 책들을 가지고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만들었던 질문이었을까. 덕분에 여기 소개되어 있는 책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다음 독서모임에 사용할 때 도움도 꽤 될 것 같다.





책 제목이 특이하다. 전혀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제목인데, 알고 보니 C. S. 루이스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다루는 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루이스의 또 다른 대표작인 “나니아 연대기”도 소개되어 있고, 꼭 직접 루이스의 책을 다루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다른 책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루이스의 책 속 한 구절들을 인용해 덧붙인다. 덕분에 이 책은 내 ‘루이스 컬렉션’에 들어가게 됐다.


역시나 이런 책을 보면 내가 읽어야 할 책이 아직은 한참 더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스물다섯 개의 장에 소개된 책들 중에는 물론 이미 읽은 책도 있지만, 여전히 만나보지 못한 책들이 더 많다. 얼마나 다행인지.


다만 이런 종류의 책이 그렇듯, 책 전체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는 법이고, 책 내용의 일부만으로 전체의 흐름을 설명하되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결말을 스포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 전체 윤곽이 잘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내가 읽었던 책에 관한 소개 부분을 보니, 이 정도만 가지고는 전체 내용이 잘 안 잡힐 수도 있겠는데 싶은 생각이 몇 번 들었다.





글에서 얼마나 저자가 성실하게 읽었는지가 느껴진다. 문장에서는 겸손하게 자신이 느낀 바를 전달하려고 애쓴다. 뭔가 강한 맛이 살짝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문으로 꽉 채워내는 구성이 개인적으론 좋았다. 많은 책들이 무슨 후기 같은 것들을 넣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거기까지 가면 그닥 김이 빠져서 굳이 읽고 싶은 생각까지 안 들 때가 많지만, 이 책은 말 그대로 서지사항이 표시된 바로 앞 장까지 꽉 채워져 있다.


앞서 나왔던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과 함께 기독교인들이 읽어 볼만한 소설들의 목록을 얻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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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6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노란가방 2024-03-26 20:11   좋아요 0 | URL
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 ^^
 
마이너리티 디자인
사와다 도모히로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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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만 보면 어떤 내용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책이었다. 물론 제목에 사용된 단어야 익숙하지만, ‘이게 이렇게도 연결될 수 있다고?’ 하는 느낌. 저자는 일본의 한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카피라이터였다. 청춘의 나이에 입사해 몇 년 간 일에 몰두하며 살았던 그는, 입사 10년 만에 얻은 아이가 시각 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엔 충격에 빠진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저자의 삶의 궤적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그는 우선 실제 장애인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을 소개받는 식으로 200여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한 후, 그는 비로소 약점은 다양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 사회는 비장애인을 표준삼아 구성되어 있다. 모든 것이 여기에 맞춰 구축되고 제작되고 유통된다. 만약 장애인들이 여기에 맞춰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꾼다면, 그래서 장애인들을 비롯한 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본다면 그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구부러지는 빨대라든지 한 손으로 불을 켜는 라이터는 모두 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해 제작되었다가 이제는 널리 퍼진 발명품들의 예다.





광고전문가로서 저자는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훈련을 오랫동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과 같은 장애인들의 ‘약점’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살려내야 할 무엇으로 보기로 한다. 이 때부터 소수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하나로 저자 자신의 약점이기도 한 스포츠(나와 비슷하게 몸으로 하는 운동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저자) 영역에도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른바 ‘유루스포츠’가 그것.


유루스포츠란 일본어로 느슨하게(유루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가리킨다. 손에 비누칠을 하고 하는 핸드볼경기인 핸드소프볼, 애벌레 모양의 침낭 비슷한 경기복에 들어가 구르고 기어가며 하는 애벌레 럭비, 강한 충격을 가하면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센서가 장착된 공을 사용해 아기울음소리가 나면 상대에게 공을 넘겨야 하는 아기 농구 같은 것들이 책에 소개 된 유루스포츠의 예다. 단지 누군가를 우대하기 위해 핸디캡을 마련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예 승리하는 방식을 자체를 바꿔 기존의 강자들과 약자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스포츠를 만들어보자는 개념이다.


물론 이 주장이 더 빨리 달리고,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들자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엘리트 스포츠에 매몰되어 대중이 직접 참여해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좀 더 본질적인 체육활동에 집중해 만들어 본 또 하나의 스포츠 영역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이제까지 광고회사에서 더 많은(Scale) 사람들에게 더 빨리(Speed) 알리고, 짧은 기간(Short)에 그 역할을 마쳐왔다. 하지만 이제 눈을 돌려 좀 더 천천히(Slow), 작은 것부터(Small), 키워가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는(Sustainable)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라는 자기파괴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소진해버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래야 또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아도 되는 존재일까?


저자는 이 질문을 단지 자신에게만 한 것이 아니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적용해 볼 것을 권한다. 책 후반에는 어떻게 하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며 살 수 있는지에 관해 간략한 로드맵을 제시한다. 요새 유행하는 퍼스널 브랜딩과도 약간 맥이 닿아있는 느낌인지라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물론 모두가 이런 창의적인 일을 하며 살 수는 없을 게다. 누군가는 틀에 박혀있지만 필요한 일을 해야만 사회라는 곳이 굴러갈 테니까. 하지만 그 안정된 틀이 누군가의 희생을 깔고 가야만 하는 거라면, 틀을 흔들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어렵게 쓰이지 않았으면서도 좋은 메시지를 던져 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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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우리 가족뿐입니다
김민철 지음 / 죠이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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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는 책이다. 이천의 한 상가 건물 지하에 위치한 교회, 그리고 부임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내와 자녀들만 함께 예배하고 있는 상황(물론 중간에 함께 예배했던 분들이 계시긴 했다)이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이다. 목회자로서 참 낙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저자가 느끼고, 감당하고, 극복하고 있는지 꾹꾹 눌러쓴 흔적이 보인다. 오래된 상가 지하의 교회가 그렇듯, 여름엔 습하고, 겨울엔 추운 상황, 가끔은 배관에 문제가 생겨 예배실 한 가운데로 물이 흥건하고, 아마도 냄새도 심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저자는 예전을 따라 예배를 꿋꿋이 진행해 나간다. 일견 그게 무슨 고집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애초의 교회의 사이즈라는 것이 어디 정해져 있는 게 아닌 이상, 매주 가족과 함께 예배한다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저자 역시 다양한 시도를 해 본 것 같다. 교역자가 바뀌었으니 현수막도 걸어보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광고하기도 하고, 쓰레기봉투를 나누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나름 해볼 수 있는 것들을 해 봤지만, (책에 따르면) 저자가 오기 전 교회의 이미지가 워낙에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문장이 자주 보인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까 궁금해지는 부분. (교회성장학과 관련해 반면사례로서도 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다른 선택을 하지 않고 계속 현재 자리에서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보통 이런 경우라는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들어가거나(나이 때문에 제한될 수도 있긴 하다), 현재 있는 곳을 정리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어떤 게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


책 가운데에도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내적 소명은 내가 이 일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리키고, 외적 소명이란 그 일에 실제로 뛰어들었을 때에 어느 정도 열매가 보일 때를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저자의 (적어도 이천에서의) 목회사역은 외적 소명 부분을 검토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이를 좀 다르게 읽어낸다. 적어도 아직까지 이 사역을 하면서 생계가 이어지고 있으니 좀 더 해도 된다는 사인이 아닐까 하는. 뭐 나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살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나와는 다르게 저자는 가족도 있으니...


사실 어떤 감동이나 그런 것 보다는 염려가 더 많이 드는 독서였다. 왠지 모를 동질감, 그리고 이왕이면 이런 분이 좀 더 잘 됐으면 좋겠다는 격려와 안쓰러움이 복합적인 그런 감정이랄까. N잡까지 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회의 표준 사이즈라는 게 어디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교회도 하나 존재하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현재 교인은 없지만, 저자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를 불러서 강사로 세워주시는 선배 목회자들, 그에게 기꺼이 일을 맡겨주신 출판사 사장님, 특히 교회에 물이 샌다는 말을 듣고 함께 와서 수리에 동참해 준 지역의 동료 목회자와 성공회 신부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저자를 만나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깊은 대화를 했던 여러 사람들도 아마 저자의 사역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에세이에 가까운 책이지만, 그 가운데 날카로운 교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저자가 처음 고흥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교회를 개척하려고 했을 때, 감리교 교단의 지방 조직 내 알력다툼을 원만히 끝낸답시고 양쪽 파벌에서 지지하는 개척인가를 모두 허락하지 않기로 했던 사건이라든지,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는 교회들에서 은퇴를 해야 할 목사의 전별금을 후임 목회자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목사를 청빙한다던지 하는 것들은 한국 교회 내 고질적인 악습이다.


그리고 저자와도 밀접하게 관계있는 소위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다. 저자가 속한 감리교단에서는 2016년 이중직을 금지하되 미자립교회에 한해서는 허락한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애초에 미자립교회의 목사자들을 먹여 살릴 것도 아니면서, 일까지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결정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지적을 한다.


이런 결의는 교단에서 목회자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로 느껴진다는 것. 차라리 이중직을 금지하고, 목회자들에게 최저생계비(전부가 아니면 일부라도)를 지급한다던가, 또는 생계에 곤란을 겪는 목회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좀 더 적극적인 행정을 하는 대신, 그저 이중직을 풀어 줄 테니 알아서 먹고 살라는 식으로만 느껴졌나 보다(물론 꼭 그런 취지로 개정된 건 아니겠지만).


각 교단에서 운영하는 직영 신학교에서는 한 해에도 수천 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지만(물론 그 가운데는 제대로 된 교육을 안 한 곳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역의 진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모두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는 식이다. 가톨릭처럼 그들의 거취를 중앙의 행정에서 조절하는 식이 아니라도, 근본적으로 목회자 수요와 교계 현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인데, 관련 논의가 등장한 지 20년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대안은 없어 보인다. 어어 하다가 0.7 이하로 내려가 버린 출생률처럼, 아마 이 문제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리진 않을까.



저자의 선택에 완전히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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