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베르메르 베이식 아트 2.0
노르베르트 슈나이더 지음, 정재곤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이나 예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몇몇 화가들이 있긴 하다. 그 중 한 명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요하네스 베르메르다. 요하네스는 라틴어식 이름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그는 아마 얀이라고 불렸을 게다.


사실 그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그림보다는 종교개혁이라는 특정한 시대와 연관해 그의 그림을 보여주는 책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그가 활동하던 17세기 유럽은 종교개혁과 그에 이어진 전쟁으로 시끄러웠고, 네덜란드 역시 가톨릭의 본산이었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과 종교개혁(특히 칼뱅주의)가 연결되면서 이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칼뱅주의에 기초한 정치적·사회적인 개혁에 나섰다. 대표적인 칼뱅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카이퍼는 정치인으로 나서 반혁명당을 이끌고 수상에 오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가 베르메르의 작품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봤던 그림은 유명한 “우유를 따르는 하녀”였는데, 여기엔 소명의식이 배어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베르메르의 작품들을 큼직한 도판과 함께 몇 가지 주제로 엮어 소개하는 내용이다. 일단 책의 판형 자체가 커서 그림도 크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는데, 설명도 의외로 많고 자세하다. 마치 미술관에 가서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처럼, 작품 속 다양한 도상들의 의미, 당대에 그런 사물이나 인물의 배치와 동작이 어떤 상징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들으며 그림을 보다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다.


사실 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챕터별로, 주제별로 명쾌하게 나눈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미술사 교수인 저자는 이 작업을 성실하게 해 냈는데, 덕분에 당대의 상황에 대해 조금은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가 그려내는 모습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네덜란드의 상황이었다.


국가적으로는 엄격한 칼뱅주의식 개혁이 추진되었고, 따라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금욕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칭송했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모습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것들을 향한 열망도 있었다는 거. 특히 그의 그림에는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 은근 또 다양하게 드러나는 점도 재미있다.


잠시 미술관에 다녀온 느낌을 준다. 가끔은 이렇게 머리를 식히는 느낌으로 하는 독서도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으로 저항하다 -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
다카쿠와 가즈미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부 시절 서양철학사 전반을 몇 학기에 걸쳐 배웠다. 교양철학부터 서양고대, 중세, 근현대 철학에, 사이드로 몇몇 철학과목까지. 보통은 이런 식으로 철학사를 따라가면서 철학을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건 철학사지, 철학 그 자체는 아니지 않았을까?(물론 단순한 역사만이 아니라 그 철학자들의 주장을 통해 철학적 고민과 탐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배울 수 있지만)


이 책의 저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학자들의(그리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좁은 의미의 철학’일 뿐이고, 실제 철학은 훨씬 넓은 의미의 활동이라는 것.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을 “개념을 운운하는 것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라고 정의한다. 이건 또 뭔가 싶을 정로 생뚱맞은 표현인데, 또 그 설명을 가만히 들어보면 일리가 있다. 어떤 개념을 일관성 있게 사용하면서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 이 세상의 특정한 측면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저항적인 활동이 철학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설명해도 좀 이해가 어려운 건 사실. 그래서 저자는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네 가지 실제 예를 들면서 철학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각각 영화와 사회운동, 소설과 편지라는 다른 장르에서 이 작업을 진행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은 말을 사용해서 철학이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그 중 사회운동과 관련된 3장에서는 아누족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일본 열도의 북부에 살았던 북방계열 민족인 아이누족은 남방 계열의 현 일본의 주류 세력에 밀려 오랫동안 억압과 착취를 당해왔다. 이 문제를 공론화한 아이누족 출신의 정치인 가야노 시게루는 ‘주식’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런 사회의 폭력에 저항하는 철학적 투쟁을 감행한다.


아이누족의 주식은 연어였는데, 일본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침탈하면서 대량으로 연어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어족자원이 고갈되자 금어기나 어로면허제도 같은 것을 도입해 아이누족이 연어를 잡는 것을 막았다는 것. 문제는 자기들이 일으켜놓고, 선주민들을 제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했던 일본 정부에 대해, 가야노는 “주식”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동시에 사회에 대한 저항을 했다. 이런 게 철학이라는 거다.


5장의 주인공은 마틴 루터 킹이다. C. S. 루이스와 함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저자이기도 한 그는, 많이들 알고 있다시피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저자는 킹이 쓴 “버밍햄 교도소에서 온 편지”라는 글 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사회 문제에 대항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당시 미국은 법적으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잘못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그것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기한 없는 계도기간을 두는 모순적 상황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흑인에 대한 차별도 결국 해소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면서 킹을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의 강경한 태도를 꾸짖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킹은 “기다리라”는 말은 결국 인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차별의 철폐는 바로 지금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시간’이라는 익숙한 개념을 ‘지금 여기의 시간’이라고 새롭게 정의하면서 사회문제에 저항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고, 이 역시 저자가 말하는 철학하기의 방법이다.




책의 부제가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이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저자는 철학의 특징을 ‘저항’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늘상 책상에서 어려운 책이나 읽다가 가끔 알아듣기 힘든 말이나 하는 철학자들이 무슨 저항을 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저항’은 꼭 반정부적 활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저항이란 기존 질서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젖어서 더 이상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벗어나, 익숙했던 것들을 새롭게 보게 만들고, 그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이런 차원에서의 철학이라면 그건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민(民)이 주(主)가 되는 게 민주주의 아니던가.


당연히 소위 말하는 개똥철학 따위는 철학이 아니다. 그건 개념을 일관되게 정의하지도 못하고,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새롭게 만들지도 못하는 잡담 수준의 발화일 뿐이니까. 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누구나 하는 말이 다 철학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고하고 효과적으로 말을 하기 위해선 연습과 훈련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런 철학이 필요할 때, 저자도 지적하듯, 오늘날에는 냉소주의가 좀 더 판을 치는 것 같다. 온갖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면서도, 정작 큰 문제 앞에서는 다들 그저 자기 살 구멍만 찾아 나서느라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않는다. 진영논리에, 정체성 정치에 빠져서 우리 편을 옹호하는 데에만 힘을 뺀다. 제대로 된 철학 교육이 어린 시절부터 좀 필요하겠다 싶은데, 학벌주의에 매몰된 사회에선 그 또한 쉽지 않을 것 같으니 큰일이다.


작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로 괜찮은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턴의 무정한 세계 - 우리 역사에서 다시 시작하는 과학 공부
정인경 지음 / 이김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책 제목부터 설명이 필요한 책이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라니, 이 무슨 문학적인 표현이란 말인가. 사실 책 자체는 과학사를 훑어가는 과학책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제목을 붙인 건, 뭔가 다른 책들과 차별화를 꾀하겠다는 의미였을 것이고, 이건 이 책이 담고 있는 네 개의 파트 소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 ‘다윈의 잔인한 표본실’, ‘에디슨의 빛과 그림자’, ‘아인슈타인의 휘어진 시공간’이다.


고전역학을 완성한 뉴턴, 진화론의 다윈, 발명가로 유명한 에디슨,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들을 배치해 놓고 각각의 시대를 소개하는 식으로 책의 내용은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에 저자는 각각의 파트에서 다루는 내용과 관련된 20세기 초 한반도의 인물들을 함께 배치하면서, “우리의 눈으로”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각 파트의 시작은 20세기 초 조선의 작가들이 쓴 글의 일부를 배치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뉴턴의 시대를 다룬 1부는 이광수의 “무정”의 한 대목으로 시작해,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해법으로 과학을 통한 “민족 개조”를 주장했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춘다.


뉴턴에서 정립된 서양과학은 한 마디로 “세계의 수학화”였다. 자연을 양적으로 수량화하고, 이를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살아있는 것들 또한 단순히 수량적으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저자는 뉴턴에게 “무정한 세계”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또, 그렇게 일찌감치 (뉴턴이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활동을 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인조 말에서 영조 초에 이른다. 그 시대 우리의 과학 수준은...) 과학을 통한 발전을 이룬 서양은 과학만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과학주의에 빠져들었고, 이를 통해 아직 과학적 지식을 갖지 못한 미개인들을 문명화한다는 명분으로 제국주의적 침탈을 합리화했다. 앞서의 “무정”은 그런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복사한 측면이 있었고, 저자는 이를 비판적으로 본다.


2부 다윈의 이야기는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시작해, 다윈의 진화론에서 나온 사회진화론과 여기에 근거해 “미개인”을 살아있는 그대로 전시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일제의 모습이 설명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의 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3부에서는 20세기 초 경성의 일상에서 전기의 중요성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에디슨에게로 넘어간다. 분명 과학기술계에 많은 공헌도 한 에디슨이었지만, 저자는 그의 탐욕스러움에서 드러나는 “과학의 가치중립”이라는 신화의 환상을 문제 삼으며, “조선의 과학기술”을 부정하면서 일제가 이식한 수준 이하의 식민지용 과학을 옹호하던 이들을 아울러 비판한다.


아인슈타인을 다룬 4부는 천재 시인 이상과 함께 시작한다. 단순히 시를 잘 써서 ‘천재’라고 불렸다고만 생각했던 이상은, 공부 쪽에도 꽤나 수재에 속해서 조선인들에게 매우 좁은 문만 열어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일본인 동기를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제의 건축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한동안 일제의 건축과 관련한 일에 종사하던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이 조선의 발전과는 상관없음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빠진 채 총독부에서 나와 쇠약해져 가는 몸을 붙잡고 시를 쓰기 시작했던 것.


저자는 이상의 시 속에서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의 향기를 읽어내면서(물론 이상이 이런 이론들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가 조선을 부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가차 없이 비난한다.






저자는 서양 과학의 발전사(그리고 애써서 탈아시아해 서양의 일원이 되려고 했던 일제의 시도) 속에서, 그 주요 요소들이 20세기 초 조선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그런 과학 발전이 과연 조선에도 유익을 끼쳤는지를 인문학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다.


과학발전을 이룬 서양을 따라가는 것이 문명화이자 진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서양인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미개인으로 전시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시대는 무정하고 잔인한 시대였다. 여기에 서양을 직접 접하고 공부하기보다 일제라는 필터를 하나 더 거쳐서 접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조선에게 상황은 더욱 왜곡되어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결국 다양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으니, 서양의 과학이 약속한 유토피아는 적어도 당시 조선에게는 거짓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우리의 과학”이란 뭔지가 좀 불분명하다. 저자는 책 초반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분하면서 후자를 좀 비판적으로 보는데, 사실 둘 사이의 정의의 구분보다 어려운 건, 실제로 그래서 과학을 어느 선까지 가져다 댈 것인가 하는 실천적 차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은 의외로 쉽지가 않다.


또, 식민지 조선의 과학이 갖는 울분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의 과학이라는 게 조선인들에게도 수준 높은 과학교육을 시행하는 것과 조선의 발전을 위한 건축을 해야 한다는 정도라면, 그건 과학 차원보다는 식민지 통치방식의 문제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책 말미의 뉴라이트 진영의 헛소리에 대한 비판은 공감이 가지만.


요컨대 책의 시도 자체는 참신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분명 공감이 가는 결론들이 있긴 했는데, 그게 하나로 잘 모아지지는 않았던 느낌. 결론부에 하나의 장을 추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책의 각 부분의 주제적 짜임새가 좀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각각의 내용들은 교양으로 알아 둘만한 내용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 교회에서 구현해야 하는 장애 정의(Disability Justice)
에이미 케니 지음, 권명지 옮김 / 이레서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접한 용어가 있다. 에이블리즘(Ableism)이라는 말이다. 장애를 뜻하는 Disabled의 반대말인 에이블(비장애)에 ism을 붙였으니, 비장애인주의 정도로 번역해야 할 텐데, 의미를 좀 더 풀면 비장애인들이 표준이 되어 자연스럽게 장애인들을 배제(차별)하면서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정말 이런 게 있을까 싶지만, 세상이 어떤 곳인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여기고 혐오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변태적 욕구자가 아니라도, 인간은 그동안 해 오던 것과 다른 존재, 다른 방식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보수적 성격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존재다. 사실 일상 가운데서 우리는 장애를 비하하는 수많은 언행들을 하고 있고, 나아가 그들이 겪는 불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로(특히 ‘경제적인 이유로’) 이슈화 자체를 덮어버리곤 한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이런 조금은 민감하고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 쓰였다. 어린 시절부터 한 쪽 다리에 장애를 안고 살아오면서 직접 다양한 문제들을 겪은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오기도 한다.






저자는 다양한 부분에서 불평을 터뜨린다. 대개의 경우 장애라는 상황은 의학적으로 치료나 극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현실이고 그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거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꽤 무례한 방식으로 쑥 들어와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이건 저자 자신이 기독교인이기에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상황이기도 하고, 미국이라는 사회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할 게다.


아무튼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영적 능력, 혹은 기도로, 혹은 장애인 본인의 믿음의 수준에 따라 장애가 극복되거나 치료될 수 있다는 주장을 끝없이 하는 것 같다. 그런 말들이 장애인들의 속을 어떻게 파헤치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로. 또, 온갖 종류의 민간요법들을 가지고 와서 마비된 다리를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달려드는 부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들을 하나같이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으로 대우하면서 그들이 무슨 특혜를 부당하게 받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그렇게 괴롭히지 않아도 이미 그들은 충분히 불편하고 괴로운데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 이런 사람들을 향한 저자 나름의 대답인 것 같다. “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녀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몸에 대해서 수용하고, 그걸 바꿔야 할 무슨 문제 상황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5장부터 시작되는 책의 두 번째 파트에서 저자는 장애라는 주제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장애 표현들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피는 5장은 흥미롭다. 하나님은 장애인들이 전혀 불편함이 없이 함께 어울리는 나라를 기대하셨다.


그리고 약간의 불편했던 6장이 이어진다. 여기서는 장애를 부정적인 은유로 사용하는 언어습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사실 여기에는 영어 표현의 특성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데, 장애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들(deaf, crippling, blinding, paralyzing, lame 같은)은 2차적인 의미로 뭔가 모자란 존재들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애인 본인들에게는 그 단어가 2차적인 문맥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장애에 대한 비하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이걸 그저 민감하다고 무시해도 될까.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을 빗댄 비하표현들이 결코 적지 않으니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까지도 그러니까 바꿔달라는 저자의 요청이 어느 정도까지 수용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결국 이 부분은 성경의 재번역 문제, 그리고 여기에 개입될 특정한 신학적 지향(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이 부분에 관해 몇 개 장을 할애한다)의 선택 같은 좀 더 복잡한 문제와도 결부될 테니까.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좀 바꾸는 정도는 좀 더 쉽게 시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경우들은 단지 우리가 그동안 해 왔던 것을 바꾸라는 요구에 대한 불쾌함 수준 그 이상이 아니니 말이다. 십자가 앞에서 단지 우리의 고집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믿는 걸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이 정도의 자극을 해 주는 책이라면 내 기준으로는 좋은 책에 들어간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이 100%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특히 장애를 기준으로 세워가는 신학 부분은 저자의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만들어 지지는 않는 법이다.


예컨대 저자는 장애인들에게 나와 천국에서는 그들의 장애가 없어질 거라는 식의 위로를 하는 것이 현재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으로 느껴진다고 강하게 반발한다(1장). 비슷한 맥락으로 찬양 가사 중에 일어서라거나 달리라거나 하는 표현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도 말한다(6장).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장애가 천국의 복됨을 설명하는 한 가지 요소라고 선언한다(5장). 자, 그러면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35:6)은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물론 이 책은 신학책이 아니고, 특별히 교회 내(그리고 일부 사회 안의) 장애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차별적 조치들을 환기하고, 문제를 풀어가자는 내용이 중심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라면 우리가 충분히 곱씹어 들어야 할 내용이다. 무엇보다 장애인들이 교회에서도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기독교인들)는 뭔가 중요한 건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교회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받고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이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계셨던 사람들을 돌아볼 것을 요구받는 것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약국 안 책방 - 아직 독립은 못 했습니다만 딴딴 시리즈 2
박훌륭 지음 / 인디고(글담)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동안 약국에서 화장품도 팔았다. 사실 외국에선 드러그 스토어라고 해서 약국에서 온갖 것들을 파는 걸 보긴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뭐 그랬었다. 하지만 올리브영이니 뭐니 하는 화장품 멀티샵이 늘어나면서 이 기능을 거의 가져가 버렸다. 현직 약사인 이 책의 작가는 그렇게 (화장품이 빠지면서) 비어버리게 된 자리에 책을 채워놓기로 한다. 이른바 샵인샵 책방의 시작이다.


이 책은 그렇게 조금은 충동적(?)으로 시작한 책방 경영기다. 경영기라고 해서 무슨 전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소소한 작가의 경험들, 책방을 운영하며 있었던 일들 중 기억에 남는 장면들 등을 소소하게 엮어낸 책이다.





비슷한 종류의 작은 서점의 운영자들이 쓴 책을 몇 권 본적이 있는데, 이건 또 약국 안에 있는 책방이라는 콘셉트가 흥미로웠다. 작은 동네서점의 가장 큰 고민은 임대료 같은 고정비용지출 부분인데, 확실히 약국이라는 기본적인 시설이 바탕에 있어서 그런지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적다. 이와 관련해 책 표지에도 적혀 있는 “아직 독립은 못 했다”는 문구는 아쉬움 보다는 일종의 여유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사실 저자는 굳이 서점을 독립시키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요새 유행하는 일종의 부캐 느낌이랄까. 약국 안에 책을 들여놓고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 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조금 더 싸게 들여올 수 있다는 이득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 같다. 먹고 살 걱정만 없으면 책만 보며 책에 관한 일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에겐 그저 부러울 따름.




책 말미에는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조언이 실려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책방을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뛰어드는 사람들을 위한 경영적 차원에서의 조언은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부업으로 시작한 동네서점 이야기라는 한계이겠지만, 뭐 이런 모양으로 또 하나의 책방이 만들어지는 것도 재미있긴 하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와의 공통점도 느껴진다. ‘역시 책 좀 보는 사람은 저런 데가 있지’ 하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얇은 책이라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른다. 작가의 즐거운 도전이 좀 더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