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지휘자가 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1920년대 미국에서 최초로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되었던 실존 인물인 안토니아 브리코(크리스탄 드 브루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최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그리고 이런 영화는 대개 여성 감독이 연출을 한다)이 자주 보이는데, 이 영화도 그 중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비슷한 종류의 성장영화들처럼, 주인공은 초반부터 주변의 무시와 거절을 당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그런 장애를 극복하고 마침내 바라던 목표를 이룬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가로막는 장애는 우선 여자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편견과 지긋지긋한 성적 접근들, 그리고 애인이 꿈을 이루는 것보다 자신의 곁에 있기를 원하는 남주인공의 소견, 깨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관례들이다.

     사실 이건 100년 전이나 오늘이나 크게 다르지 않는 요소들이고, 이 말은 오늘날의 많은 청년들도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여전히 악전고투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해보지 않았던 것, 누구도 올라보지 못했던 자리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늘 이런 식의 방해를 극복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주인공은 이를 어찌어찌 자신의 의지와 주변의 도움으로 극복해 나가는데, 솔직히 그 과정이 비슷한 다른 영화들과 큰 차별화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실존 인물의 성취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고, 영화의 서사가 그렇다는 것. 주인공의 공부를 후원했던 진짜 인물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부분이 살짝 반전 비슷한 것이긴 했지만 큰 임팩트는 없었고, 사실 독일에서 작은 성공을 거두고 돌아온 후에도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성공했다기보다는 또 다른 도움들이 있었기도 했다.

      대신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시대극이라는 특성을 잘 살려 낸 배경들과 복식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다. 개인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진짜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여기에 지휘라는 독특한 소재가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영상이 끝나고 올라가는 자막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갖은 고생을 다하며 마침내 뉴욕 필 하모닉의 지휘자가 되고 이후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지만, 평생 동안 상임지휘자가 되지는 못했다는 내용. 최근까지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적지 않았던(예컨대 유명한 오케스트라에는 여성이 제1주자가 되거나 심지어 단원이 되는 것도 어려웠다고 한다) 음악계의 현실이 이렇게 드러난다.

     물론 연주의 실력이 객관적으로 떨어진다거나 한다면 모르겠는데, 카라얀 같은 유명한 지휘자가 선택한 연주자가 실력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도전자들은 단단한 장벽을 마주해야 하지만, (특히 음악계의) 여성들은 그들의 성별로 인한 차별이라는 조금 더 높은 벽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인 듯하다. 이건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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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블 텔레비전용 드라마였던 나쁜 녀석들을 영화화 한 작품. 경찰이 쉽게 해결하지 못한 미제사건들을, 수감되어 있던 범죄자들과 과격한 수사 및 진압으로 징계를 받은 경찰들로 구성된 팀이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꽤나 흥미로운 설정을 보여주었었다.

 

     영화화 되면서 달라진 점도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드라마에서도 이 팀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견제하는 역할이었던 강예원이 얼굴만 등장했다가 입원으로 처리되며 빠졌다는 점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여성 캐릭터로 김아중이 대체되었다. 강예원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드라마에서도 가장 약한 연기력으로 이질감을 주었던지라 이 조정 덕분에 영화는 좀 더 안정적인 연기로 채워졌다.

 

     또 영화 초반에 대규모 차량 폭발신 같은 것도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부분일 텐데, 문제는 비주얼 측면에서는 그 첫 번째 장면 이후에 딱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없었다는 점.(처음에 돈을 다 쓴 거냐...) 

 

     단지 비주얼만 볼품없었던 게 아니고, 내용도 얼개가 엉성하다.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범죄자를 탈출시키기 위해 폭발사고가 일어나고, 그 뒤에는 일본 폭력조직이 있고 하는 식으로 판은 크게 벌였는데, 막상 추적은 한심할 정도로 쉬웠고(경찰은 이것도 못했던 거야?) 해결 방식도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실제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설정이지만, 덕분에 선을 왔다 갔다 하며 범죄자들을 추적하고 제압하는 모습을 보는 통쾌함이 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그냥 가둬두고 정해진 밥만 먹는 벌을 주는 게 전부인 현 상황에서, 드라마로나마 나쁜 놈들에게 (문자적으로도) 한 방 크게 먹여주고 싶은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낀 달까

 

     사실 이건 소위 마동석 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동석표 영화들을 즐거워하는 건,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일 게다. 온갖 종류의 이유들(술을 마셔서, 나이가 어려서, 처음이라서, 심지어 반성하고 있으니..)로 형을 감경하고, 덕분에 피해자들은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는데도 금세 밖으로 나와 보복하게 만드는 일까지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이, 차라리 흠씬 두들겨 패는 영화 속 주인공에 열광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당장 보기엔 통쾌할 지도 모르지만,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훨씬 더 허술해졌고 딱히 인상에 남는 내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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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년생이면 올해를 기준으로 서른일곱(만으로). 딱 내 나이다. 영화는 그 나이 대의 이 시대 여성들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다양한 종류의 차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에는 막내 남동생에게만 집중되는 할머니의 사랑에 서운해지고,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좋아하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다시 손녀가 아닌 손자를 보게 해 달라는 시어머니의 압박과 너보다 더 잘 버는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면 안 된다는 힐난이 켜켜이 쌓여 올라간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여기에 그런 주인공의 어머니가 겪었던, 한 세대 이전의 차별들까지 비춰줌으로써, 이런 문제가 단지 지금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영화 속 지영이 종종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은, 그녀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굴레 같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로 보였다.(마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가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주요사건에 참여했던 것처럼.) 때문에 이 영화가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비판은 이런 문학적 기법이라는 대답 아래 묻힌다.

 

     사실 같은 시절을 살았던 내 경우만 봐도, 여동생보다는 모든 면에서 내가 더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는 분명 더 많은 자원의 할애가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 가장 우려했던 것은, 영화가 과연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제대로 된 방법을 준비했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자칫 이런 논의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의 수인 남녀 대결과 같은 텅 빈 깡통 수준의 이야기로 전개되면 어떻게 하나 싶은 우려. 그런데 다행이 감독은 그런 대립에 대한 우려를 보기 좋게 피해간다.

 

     ​여기엔 부분적으로 소위 좀 쎈 여자의 캐릭터를 지영의 언니가 가져가고, 남동생과 남편의 성격이 또 여기에 대놓고 맞서 싸우지 않았던 데 기인하지 않나 싶다. 덕분에 지영은 자신이 진 무게를 충분히 힘들어하면서도 분노가 아닌 또 다른 해답을 찾아나가는 데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누가 누구와 싸움으로써 해결될 일은 아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과 같은 성별을 가졌던 인류 전체를 대표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책망 받을 이유도 없고, 우리가 하지 않은 업적을 두고 어깨를 으쓱할 자리에 있지도 않다. 진영논리, 정체성의 정치 따위가 개입되면서 문제가 한없이 노답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부부가 조금씩 힘을 합쳐 문제를 고민해 나가는 이 영화 속 그림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대립이 아니라 협력이다. 태생적으로 지니는 특징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 힙을 합쳐야 한다. 자기 입장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건 기껏 백분토론 식의 (상대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주장만 반복하다 어떤 접점도 찾지 못하고 끝나는) 시끄러움만 생산해 낼 뿐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영화에서 여성 피해자론만 읽고 (사실이 과장되었다며) 불쾌해 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남성 가해자론을 읽고 앞선 분노에 집어넣을 장작만 얻을 지도 모르겠다. 어딜 가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 해버리는 관점들이 문제다. 상대성이론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문제 또한 그런 식으로 한 쪽 면만 보고 간단히 적과 원수를 만든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우리에겐 더 많은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다. 이 영화는 그런 차원에서도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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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마블이나 디씨의 세계관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영웅들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다.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적들을 물리치는 데는 이들 영웅들이 꼭 필요한 존재지만, 평시에는 그런 초인들이 또 위협적으로 느껴지니 어떻게든 그들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결국 양쪽 세계의 영웅들은 이런 사람들의 인식에 맞춰 어느 정도 스스로를 시민들의 제어 아래 두려고 한다.

 

엑스맨의 리더인 자비에(제임스 맥어보이)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일을 맡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엑스맨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려고 했던 건데, 참 살기 어렵다. 그런데 또 그럼 사람들의 우려도 아주 공감이 되지는 않는 것이, 영화 속 초인들을 강력한 무기’, 예를 들면 핵무기로 치환해보면 이해가 쉽다. 강력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그러나 그 무기는 나에게도 위험하다. 때문에 국제적인 억제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상황.

 

문제는 여기에서 그 무기들이 인격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점이 잊히면 안 된다는 점인데, 영화 속 사람들에게는 이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건 당연히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마블의 시빌워가 그런 것이었다면, 디씨에서는 영웅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이런 불안감이 일상적으로 비춰진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인 진 그레이(소피 터너)는 그런 임무 수행 중 엄청난 힘을 얻게 되고, 스스로도 잘 통제되지 않는 이 힘은 결국 주변 사람들까지(특히 일반인들까지)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에 그런 진을 더 파괴적으로 충동질하는 캐릭터와 그를 말리기 위해 나서는 엑스맨 진영의 싸움이 더해지면서 이런 영화에 빠질 수 없는 액션신이 더해진다.

 

전체적으로 구색은 갖추었다고 보이지만, 문제는 주인공인 진 그레이의 고민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액션들이 서로 그다지 긴박한 연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의 고민이라는 게 자신이 가진 통제되지 않는 엄청난 힘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자신을 버린 아버지(어머니는 그녀의 힘 때문에 사고로 죽었다)에 대한 배신감인데, 사실 이 두 가지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분노할 일인가 싶은 내용들이다. 그냥 반항적인 십대의 충동적 비행을 돌이키려는 선생님들의 투쟁으로 보이기까지 하니까.

 

이런 혼란스러운 진행 가운데서도 다시 한 번 두드러지는 건, 사건의 원인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그저 큰 피해를 입히며 싸우는 것들을 다 잡아 가두어야 한다는 식의 정부 대응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을 보면서 잘못의 경중, 사안의 본질을 외면한 채 정치나 재벌, 특정한 영역이 다 문제라는 식의 눈 감은 양비론이 얼마나 많이 퍼져 있던가. 진짜 문제는 그러는 동안 정말로 나쁜 이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물타기라는 게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엑스맨의 뮤턴트들은 어디까지 쪼그라들까. 이젠 십대 가출기까지 보고 앉아 있어야 하나 싶은데, 이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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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소 삐끼로 시작해서 이제 자신의 클럽까지 열게 된 찬우(박해수). 비록 유흥업소지만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운영하겠다는 나름의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검사 윤식(이창훈)이 있다.(다만 이쪽은 그간 주로 조연급으로만 출연해서 그런지 영화 안 비중이 제법 높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강한 존재감을 내비치지 못하는 느낌이다)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유흥업소 사장과 준법 의식 자체가 탑재되지 않은 검사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뭔가 그림을 만들어 내나 싶었지만, 주연을 거의 처음 맡았던 두 배우의 연기가 역할에 몰입되지 못하고 살짝 들떠 있는 느낌을 준다. 또 뭔가 판을 그린 것은 알겠는데, 그게 매우 제한된 인물의 대사로만 묘사되니 실감이 나지 않는달까.

 

결정적으로 영화 제목이면서, 주인공 찬우가 끊임없이 떠드는 양자물리학이라는 소재도 지나치게 가볍게만 다뤄지는 느낌이다. 정말로 양자물리학 이론 가운데에 생각하는 대로 일이 이뤄진다는 말이 들어있던가? 영화 속에선 별 맥락 없이 무작정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주인공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소재 그 이상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이 제목을 봤을 때 양자두 사람으로 해석해서 뭔가 언어유희를 시도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차별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최근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영화 속 검사와 같은 인물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수법의 강도는 다르더라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특별한 수사들에서 검사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대체로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물론 많은 사건들을 성실하게 담당하는 검사들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되겠지만.) 정치인들이나 재계 인사들처럼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이지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 힘을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재사용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뭐 이 영화가 그런 개혁의 대상이 된 검찰을 고발하거나 비꼬는 작품은 아니다.(그런 쪽이라면 차라리 영화 부당거래의 류승범이 훨씬 더 제대로 깐족댔다) 어쩌면 그런 걸 겨냥해서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검착 개혁이라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외려 최근 돌아가는 형세를 보니 검찰 쪽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작은 한 조각도 뺏기기 싫다는 형태로 달려들고 있으니, 이런 영화가 사회혼란을 조장하고 검찰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기소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농담이다)

 

 

 

 

 

특별히 인상적인 포인트가 보이지 않았던 영화. 어디선가 본 듯한 소재에, 어디선가 본 듯한 전개(그나마 생뚱맞은 부분도 많고), 별 감동도 없는 결말까지. 각자가 맡은 역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뽑아내지도 못하고, 게임의 NPC처럼 움직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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