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이면 올해를 기준으로 서른일곱(만으로). 딱 내 나이다. 영화는 그 나이 대의 이 시대 여성들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다양한 종류의 차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에는 막내 남동생에게만 집중되는 할머니의 사랑에 서운해지고,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좋아하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다시 손녀가 아닌 손자를 보게 해 달라는 시어머니의 압박과 너보다 더 잘 버는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면 안 된다는 힐난이 켜켜이 쌓여 올라간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여기에 그런 주인공의 어머니가 겪었던, 한 세대 이전의 차별들까지 비춰줌으로써, 이런 문제가 단지 지금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영화 속 지영이 종종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은, 그녀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굴레 같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로 보였다.(마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가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주요사건에 참여했던 것처럼.) 때문에 이 영화가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비판은 이런 문학적 기법이라는 대답 아래 묻힌다.

 

     사실 같은 시절을 살았던 내 경우만 봐도, 여동생보다는 모든 면에서 내가 더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는 분명 더 많은 자원의 할애가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 가장 우려했던 것은, 영화가 과연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제대로 된 방법을 준비했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자칫 이런 논의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의 수인 남녀 대결과 같은 텅 빈 깡통 수준의 이야기로 전개되면 어떻게 하나 싶은 우려. 그런데 다행이 감독은 그런 대립에 대한 우려를 보기 좋게 피해간다.

 

     ​여기엔 부분적으로 소위 좀 쎈 여자의 캐릭터를 지영의 언니가 가져가고, 남동생과 남편의 성격이 또 여기에 대놓고 맞서 싸우지 않았던 데 기인하지 않나 싶다. 덕분에 지영은 자신이 진 무게를 충분히 힘들어하면서도 분노가 아닌 또 다른 해답을 찾아나가는 데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누가 누구와 싸움으로써 해결될 일은 아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과 같은 성별을 가졌던 인류 전체를 대표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책망 받을 이유도 없고, 우리가 하지 않은 업적을 두고 어깨를 으쓱할 자리에 있지도 않다. 진영논리, 정체성의 정치 따위가 개입되면서 문제가 한없이 노답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부부가 조금씩 힘을 합쳐 문제를 고민해 나가는 이 영화 속 그림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대립이 아니라 협력이다. 태생적으로 지니는 특징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 힙을 합쳐야 한다. 자기 입장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건 기껏 백분토론 식의 (상대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주장만 반복하다 어떤 접점도 찾지 못하고 끝나는) 시끄러움만 생산해 낼 뿐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영화에서 여성 피해자론만 읽고 (사실이 과장되었다며) 불쾌해 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남성 가해자론을 읽고 앞선 분노에 집어넣을 장작만 얻을 지도 모르겠다. 어딜 가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 해버리는 관점들이 문제다. 상대성이론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문제 또한 그런 식으로 한 쪽 면만 보고 간단히 적과 원수를 만든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우리에겐 더 많은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다. 이 영화는 그런 차원에서도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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