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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보트
에쿠니 가오리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두꺼운 옷을 입을수록 추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약 。。。。。。。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어느 동네건 적응이 될 만 싶으면 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는 가족이 있다. 엄마(요코)와 딸(소코)은 그렇게 정확한 목적지도 없는 유랑을 거듭한다. 

 
 

 

     젊은 시절, 피아노를 전공했던 요코는 자신을 가르쳤던 모모이 교수와 나이 차를 뛰어넘는 결혼을 감행한다. 하지만 둘은 단 한 번의 관계도 없는 이상한 부부였고, 요코는 유부남인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결국 그와 사이에 아이까지 갖게 되었지만, 남자는 마침 경영하던 레코드 가게가 망하게 되면서 요코의 곁을 떠난다. 꼭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아직 갓난 아이인 소코와 함께 전국을 방황하게 된 요코. 소코가 커서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여전히 요코의 습관적인 이사는 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정착하게 되면 그를 찾아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아서라는 요코는, 끊임없이 소코에게 아빠와의 로맨스를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준다.

 

 

 

     끊임없는 이사 이야기로 끝날 것만 같았던 이 이야기에, 갑자기 이 단조로운 흐름을 가로막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소코였다. 어느 덧 소코도 나이가 들었고, 그녀는 엄마의 비현실적인 삶에 싫증을 느끼게 되는데..
 

 

 감상평 。。。。。。。                     

 

     ‘냉정과 열정사이’,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볼 수 있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글쓰기 스타일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 이른바 교대로 글쓰기인데, ‘냉정과 열정사이’에서는 두 명의 작가가 두 명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반짝반짝 빛나는’에서는 한 명의 작가가 두 명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각각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방식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일이다. 작가는 소코와 요코의 입장에서 교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참 재능 있는 작가인 것만은 인정한다.

 

 

     작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 이번 이야기의 내용 역시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다. 주인공 소코는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고, 떠난 남자에 대한 꿈과 환상으로 만든 세계에 살면서, 끊임없이 그를 찾아 딸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 불륜과 망상의 절묘한 조화라고 할까.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이 이야기를 굳이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을 번역한 이정환 씨의 해석이 그렇다. 역자후기에서 그는 사랑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으로만 보며 ‘어떻게 느끼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런 세계관에서 나오는 결론은 사랑이라는 순간적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요코는 성숙한 여성이고, 소위 ‘현실’에 눈을 뜬 소코는 미성숙한 여성(p. 268)으로 밖에 안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사랑이 그렇게 불확실하고 순간적으로 변하는 감정적 변화일 뿐일까? 그렇다면 그렇게 불확실하고 자주 변하는 것에 왜 사람들은 그렇게 큰 확신을 가지고 매달릴 수 있는 걸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순간적이고 말초감각만을 짜릿하게 해 주는 오로지 감정적인 사랑에 매달려 사는 요코야 말로 미성숙한 인물이 아닐까.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감정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딸에게 적절하게 제공되어야 할 양육환경에 대한 배려까지도 내던져버린 미성숙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여기에 초콜릿과 담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녀의 유아적 양상을 드러내주는 소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 없이 자기를 방어하면 할수록 그녀 자신이 더욱 약해보이는 것은 왜일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의 소설을 읽어보면 좀 다른 느낌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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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0-157 1
로빈 쿡 지음, 서창렬 옮김 / 열림원 / 1999년 6월
평점 :
품절


"햄버거를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왜 사람들이 그걸 먹을까, 놀라게 되요.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난 반쯤 채식주의자였는데, 이제는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됐어요."

"농무성 소속의 고기 검사관이 그런 말을 하다니, 꽤나 걱정이 되는군요."

"햄버거 안에 들어가는 것들을 생각하면 뱃속이 메슥거릴 지경이라구요."

"뭐가 들어가는데요? 근육을 말하는 건가요?"

"근육과 다른 많은 것들요. 선생님은 '첨단 고기 회수 시스템'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마샤가 물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소."

킴이 말했다.

"그건 소뼈에 붙은 모든 고기 부스러기들을 깨끗이 발라내는 고압 장치에요. 그 장치를 사용해 회색의 죽 같은 걸 얻게 되는데, 그들은 그것에 빨간 색소를 넣어 햄버거에 첨가한답니다."

"역겹군요."

"그리고 중추신경 조직도요. 척수 같은 거. 그건 항상 햄버거에 들어가지요."

"정말이오?"

"정말이고 말고요.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나쁜 거라구요."


- 책 내용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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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 스릴러 작가로 유명한 로빈 쿡의 소설이다. 제목 O-157은 몇 해 전인가 우리나라에도 크게 유행했던 대장균의 이름으로, 주로 쇠고기를 제대로 익혀먹지 않을 때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치사율도 높은 편 이어서 당시 전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에 나오는 세균도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제대로 익히지 않은 고기가 들어간 햄버거를 먹은 주인공의 딸이 세균에 감염되고,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자, 주인공은 그 원인이 되는 가축가공업체에 잠입해 감염경로를 밝히고자 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저자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공장에 잠입한 주인공은, 공장에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보낸 폭력배를 죽이고 도망치는 곳에서 소설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자료를 방송기자에게 보내고, 계속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다짐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건의 본질적인 해결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사실, 늘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이 어쩌면 현실과 더 동떨어진 일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생활에서는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은 대부분 억압받고, 진실이 감추어지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한편 저자는 이런 스토리 라인 안에서 여러 가지 오늘날의 현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저자와 주인공이 모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데서 짐작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의료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로 기업화 된 병원에서 생명을 다루는 작업이 얼마나 효율성과 경제성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환자나 의사 모두, 병원의 운영자에게 있어서는 돈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판단이 된다. 이런 모습은 저자의 다른 작품인 『DNA』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서 주인공인 의사는 온통 꽉 죄어진 삶을 살게 되고, 그 삶 가운데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단순히 기계화된 관계만을 영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만 하게 되고, 당연히 그런 곳에서 온전한 관계가 이뤄지기 어렵다. 이 부분에 관한 저자의 묘사력은 매우 대단해서 읽고 있는 나마저 숨이 막히도록 답답함을 느꼈다.


      세 번째로 정부부처와 대기업(여기서는 육류가공공장)간의 담합도 지적하고 있다. 감독을 하면서 보호를 해야 하는 이중적인 입장에 선 정부부처는 어진간해서 자신이 감독해야할 기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농무부는 자국의 쇠고기 산업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들이 올바로 공정을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감독해야할 책임도 있다. 때문에 가공과정에서 엄격한 검사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세균이 검출되었다면, 결국 그 산업이 피폐해지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을 보호해야하는 정부 부처의 입장에서 결코 좋지 않은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처럼 로빈 쿡의 소설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한 가지 마음먹은 것이 있다면, 햄버거와 같은 것은 정말 먹지 말아야하겠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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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학 스릴러의 대가 로비쿡의 책이군요. 한때 로빈쿡의 소설에 빠져 지내던 때가 생각나는 군요. 이 책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서 더욱 스릴있고 무섭게 느껴질 것 같군요. 최근에 로빈쿡의 신간이 나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예전처럼 다시 그의 의학 스릴러에 빠져 들고 싶은 기분이네요.ㅎㅎ

노란가방 2007-09-03 10:30   좋아요 0 | URL
네.. 작가의 글솜씨도 괜찮고,
주로 의학계 내부의 비리나 위험들을 고발하는 종류의 소설이라 그런지 의식도 있어보이고.. ^^
 
베르베르 독자들이 쓴 나무 2
강창모 외 지음 / 열린책들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재미있는 시도의 책이다. 책을 쓰는 사람이 작가이고, 독자는 그 책을 읽는다는 전형적인 공식을 뒤집는 기발한 상상의 책이었다. 바로 독자가 쓴 책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직후, 베르베르가 새로운 책을 썼나보다 하고 주저 없이 빼서 펴보았지만, 웬걸 이 책은 베르베르의 작품이 아니었다. 전작인 『나무』를 읽은 그의 한국 독자들이 베르베르와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쓴 것들을 모아 놓은 글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책 가운데서 가장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은 이 책을 만든 방식이다.

 

        저자들의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다양하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상상을 할까 하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수 백편의 글 가운데 뽑아서 엮어진 글들인 만큼 하나하나 기발한 상상력이 가미된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마추어 작가들의 글이라서 그런지, 베르베르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인간성에 관한 심오한 고찰이나, 사회 전반의 부조리에 대한 풍자와 우스개를 섞은 비판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표면적인 풍자나 비판의 선에서 그치고 마는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늘 서평을 쓸 때마다 인용해 놓고 하는 한 두 개의 멋진 문장을 이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풋풋함이 또한 읽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한 가지 요소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도 작가 목록에 끼어있다는 사실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책을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린 친구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고등학생들도 상당수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이 친구들이 잘 성장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멋진 작가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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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정상인들이 다른 사람이 취하는 행동의 이유를 언제나 이해하지는 않는다.

정상인들이 행동의 이유나 의도에 대해 언쟁하는 모습을 보면 명백하다.


 




. 줄거리 。。。。。。。                    


     주인공 루는 자폐인이다. 그는 사물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졌고, 회사에서는 그런 루의 재능을 이용해 회사에서 만든 프로그램의 오류를 찾아내는 일을 맡겼고, 루는 그 곳에서 동료 자폐인들 몇 명과 함께 근무를 하고 있다. 비록 일상생활에 있어서 약간의 어려움은 있지만, 매주 수요일이면 참석하는 펜싱 클럽에서 만난 마저리라는 아가씨를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등, 루는 그런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무난하게 지속하며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루의 회사에 크렌쇼라는 새로운 상사가 부임을 하면서 위기의 징조가 나타난다. 처음부터 루와 같은 자폐인들에 대해 삐딱한 시각을 보여주던 크렌쇼는, 마침내는 그들 모두를 새로 개발된 수술대에 올려서 ‘정상인’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회사 측에서 루와 동료들에게 제공하는 여러 가지 부대 서비스 비용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루가 ‘정상인’이 된다면 더 이상 그런 서비스를 제공할 이유가 없어지니 말이다.

     하지만 새로 개발된 그 치료기술은 아직 한 번도 사람에게 시술된 적이 없었고, 뇌에 자극을 주는 그 방식은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지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크렌쇼는 루와 그 동료들에게 새 프로젝트(뇌 시술)에 참여할 것을 해고의 위협을 하면서 강요한다. 과연 루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 감상평 。。。。。。。                    

 

     자폐증이라는 병(그것은 신체의 일부에 생긴 병이지 미친 것이 아니다!)도 기억상실증과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병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식으로 문학작품과 영화 등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 기억상실증이 병 자체의 성격 때문에 그런 배지를 달게 되었다면, 자폐증의 경우는 그 병의 의도치 않은 결과 때문에 붙이게 되었다는 점에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물론 병을 함께 지켜봐야 하는 가족이나 동료들에게 그것들은 생각처럼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KBS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자폐인들을 다룬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 역시 자폐인들이 가진, 특정 분야에 대한 놀랄 만큼 뛰어난 특징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 번 보면 그대로 그림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 뛰어난 피아노 즉흥곡 연주 및 작곡 능력, 그냥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의 긴 수식을 빠르게 계산하는 능력, 한 도서관 전체에 꽂혀 있는 책들을 그대로 암기하는 능력 등 비자폐인들의 경우 상상할 수도 없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시각이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레인 맨’을 보라) 이런 방송 프로그램 등이나 영화 등은 공통적으로 자폐인들에 대한 이유 없는 두려움이나 적대적 감정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시도들로 인해 자폐인들이 더욱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엘리자베스 문의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루 역시 숫자와 패턴에 관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증상을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소재로만 등장할 뿐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소재(그래서 그를 비범한 누군가로 만드는 데 사용되는)로 다뤄지고 있지는 않다. 소설의 루는 그저 비자폐인들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할 뿐이다. 소설은 ‘장애를 가진 자폐인이 어떻게 다른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반대다. 때문에 소설 속의 주인공 루는 끊임없이 장애와 비장애가 어떻게 다른가를 묻는다. 결국 그들 모두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인 것이다.

 

 

     주인공 루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비자폐인들도 늘 옳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자폐인인 크렌쇼와 돈의 ‘비정상적인’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 작가는 직접적인 적대행위는 아니더라도,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들을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냄새를 맡는다. 젖은 잎, 바위에 붙은 이끼, 지의, 바위 자체, 흙…… 자폐인들이 냄새에 너무 민감하다고 쓰인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개나 고양이의 민감한 후각은 거북해하지 않는다.’

     ‘자폐인들이 작은 소리에 너무 민감하다고 쓰인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동물들의 경우에는 아무도 거북해하지 않는다.’

 

 

     한편, 소설적 과장을 대놓고 들이대지 않고 있다는 점은 저자의 뛰어난 글 솜씨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 루는 마저리라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삶이 마저리에게만 매어 있는 모습은 아니라는 옮긴이의 지적은 그 한 예이다. 그것은 그의 삶의 일부이고, 그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고도 많은 문제들과 얽혀 있다. 저자는 그 모든 문제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고, 이는 소설의 내용에 좀 더 많은 생동감을 더해 준다.

 

 

     책을 읽고 나서 자폐라는 증상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책이 가진 사회학적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야 하나? 이야기의 플롯이나 등장인물들 사이의 균형, 주인공의 심리 등 문학적인 면에서도 손색이 없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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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는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상황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아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튀어나와 놀라게 된 것 아닙니까,

대단한 극적 효과지요.


 


. 줄거리 。。。。。。。                   

 

     단 한 명만 빼 놓고 모든 사람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끔찍했던 상황이 끝난 지 4년, 사람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그 때의 기억을 묻어버리기로 약속을 한 듯하다. 하지만 수도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시 그 때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날 일어난 백지투표 사건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새벽부터 쏟아지는 엄청난 비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투표장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의 역할을 했고, 오후가 되어서도 좀처럼 투표장에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사상 최악의 낮은 투표율을 기록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즈음, 드디어 비가 그치자 일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떠올려보라, 엄청난 사람들이 같은 시간 집에서 나와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공중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그 촉수를 구역별로 마련된 투표장으로 뻗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는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개표가 시작되면서 더욱 경악스러운 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상 초유의 백지투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전체 투표수의 70% 이상이 아무 정당에도 투표를 하지 않은 말 그대로 백지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었던 것. 일주일 후 실시된 재선거에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져, 무려 83%에 달하는 백지투표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정부는 말 그대로 혼란에 빠진다. 총리 이하 각 부의 장관들은 연일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결국 모든 책임을 수도의 주민들에게로 돌리는 결론을 도출한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부의 모든 기관들을 수도 밖으로 이관시키고(우리나라였으면 관습헌법 위반으로 문제가 되었겠지만), 이 경악할 일을 꾸민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비밀요원들을 침투시키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가두고 심문하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던 중 수도에서부터 날아 온 한 통의 편지는 사건에 대한 접근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 감상평 。。。。。。。                    


     전작인 ‘눈먼 자들의 도시’보다 훨씬 더 정치적 색채가 많이 가미된 책이다. 아마도 ‘선거’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드는 듯하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이 특정 정당에 투표하는 대신 백지투표를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역시나 이색적인 상상은 이 책에 재미를 부여하는 핵심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강하게 부각되는 부분은 정부를 비롯한 권력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이다.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집행하는 자리에 있는 그들은, 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는 데에도 전문가였다. 누가 봐도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임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 분명한 대량의 백지투표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찌감치 이번 사건은 현 정권에 대한 불신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 버리고, 도리어 이 일을 주도한 세력을 반정부인사나 불순한 선동가로 몰아세운다.

 

     한편 정부의 무책임한 계엄령과 정부기관들의 이전으로 일어난 무정부상태에서도 수도의 주민들이 보여준 의연함은 매우 대조적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각종 언론을 통해 곧 폭동을 비롯한 심각한 혼란이 수도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지만, 그들의 말과는 달리 실제 수도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도 주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 지하철 폭발이나 일으키는 정부 당국자들이었다. 그들은 법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초법적인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 모든 내용들을 통해 저자의 이력에도 있는 공산주의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정부와 같은 권력자들을 근본적으로 믿지 못하고, 시민 혹은 인민들의 대동단결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회주의적 발상. 물론 저자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제한과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폭력’.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주제 사라마구는 전혀 폭력이 동원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제안하고 있다. ‘투표’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도구를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연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에서 현실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과연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누구도 실제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저자 역시 소설 상의 도시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인 스케치로만 그려져 있을 뿐, 그 세부적 구조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도 주민들의 모습은 그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을 정도다.

 

 


     전작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기발한 발상으로 인간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본성을 실감나게 그려낸 저자는, 이번 작품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비록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시력은 가지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진실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에 전작과는 달리 지나치게 정치색이 많이 칠해져 있어서 오히려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가 좀 더 드러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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