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옹호하다 - 전통의 의미와 재발견, 회복에 관하여 비아 시선들
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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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전통 위에 서 있다. 우리가 하는 사고와 판단과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든 전통의 영향 아래 있다. 그것이 전통을 따르는 것이든, 전통으로부터의 의도적 일탈이든. 하지만 현대 문화의 근간이 되는 계몽주의 이래로 우리는 전통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폄훼해온 것도 사실이다. 옛것은 고루하고, 미개하며, 뒤쳐진 것이라는 인식이다.


흥미롭게도 개신교 진영에서도 결과적으로 비슷한 입장을 내세워 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에서 “전통”이란 용어는 “교회 관계자의 지배” 같은 음울한 분위기를 띄곤 했다. 여러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을 앞세우던 가톨릭교회의 당국자들과 치열한 충돌을 벌이면서 그들의 입장을 단단히 세워갔다. 이 과정에서 전통이란 성경의 진리를 가리는 무엇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개신교 전통 역시 그들의 정통성을 초기 기독교 시대의 전통에서 찾고 있으니까. 사실 기독교라는 신앙 자체가 수천 년 전의 문서에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두고 있으니, 이보다 보수적인 것도 없지 않은가.





이 책은 바로 그 “전통”이라는 주제를 인문학적으로, 또 기독교 신학적으로 다룬다. 한 마디로 하면 “전통은 소중하다”는 말이다. 심지어 전통을 비판하려고 하는 사람도 일단 전통이 어떤 건지 알기는 해야 하지 않던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는 멍청한 짓을 하는 것뿐이고, 종종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비난하던 것과 비슷해지기도 한다는 게 아이러니다.


성경과 전통 중 어떤 것이 더 앞서는가 하는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우리가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책들은 교회의 전통 가운데서 확정된 것이고, 그 전통은 성경을 통해 전해진 복음의 내용에 따라 형성된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서 전통은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전통에 대한 지나친 강조(혹은 추종)가 자칫 성경의 권위를 훼손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특히나 꽤 보수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우려는 더욱 커 보일 듯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마 다양한 종류의 전통(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교단 같은 조금 더 큰 그룹에서 만들어진 것이든)을 사용해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해 봤자 소용이 없다.





전통의 지위에 관해 흥미로운 비유가 하나 책에 등장한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전능한 존재로 믿고, 그 결정을 보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그건 아이가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다. 그렇다고 부모의 결점을 이유로 부모를 존중하지 않고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춘기에 머물러 있다는 증표다.


부모와 성숙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부모가 전능하다는 믿음과 부모의 연약함에 대한 경멸을 넘어, 상속인이자 자유인이라는 지위를 누린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부모의 역할을 이해하면서 감사하지만, 나아가 거기에 완전히 맹종하거나 종속되지만은 않는다. 전통이 우리에게 부모와 같다는 말이다. 전통을 회복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을 추종할 필요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전통을 혐오하며 반(反)전통으로 나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는 말이다. 좋은 지적이다.


마지막 장은 저자의 탁월한 통찰이 담긴 문장으로 시작한다. “전통은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신앙이고,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이들의 죽은 신앙”이다. 우리는 전통을 단지 옛날 사람들의 뭔가 부족하고 모자란 인습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렇다고 오로지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C. S. 루이스는 “연대기적 속물주의”라는 태도를 매우 싫어했다. 오직 새로 나온 것, 그 자체가 어떤 권위를 지니고라도 있는 양, 옛것에서 눈을 돌려 최신의 유행만 좇는 행태를 가리킨다. 그러면서 루이스는 권한다. 요즘 나온 책을 한 권 읽었다면 다음엔 고전을 한 권 꺼내 펼치라고. 그게 안 되면 최소한 요즘 나온 책 세 권을 본 후에는 반드시 고전을 한 권 보라고. 그건 우리가 동시대 사람들의 편견에 빠지지 않기 위한 중요한 조언이다. 어떤 면에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전통의 회복과 옹호와도 연결되는 듯하다.


이미 우리 안 깊이 배어 있는, 그리고 우리가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전통의 존재와 위치, 그 의의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인상적이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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