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야 하는 것은 옛사랑뿐만이 아니다. 

새로 비밀번호를 설정한 전자키의 예전 비밀번호 또한 잊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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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회상일 때, 나는 혼자 얼굴이 붉어진다. 왜냐면 철학개론 시간에 녀석과 논쟁을 벌일 때마다 나는‘인간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곧잘 했기 때문이다. 말은 그러면서 정작 실제로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니,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발표시간이 끝나면 기억조차 못했다.

나도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녀석도 잘생기진 않았다. 그럼에도 항상 몇몇 여학생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녀석.

그 중에는 과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도 끼어 있었다.

녀석에 못지않게 발표 잘하는 내가 왜 녀석과 달리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을까?

돌이켜보면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우선은 표정이다. 수시로 미소를 띠는 부드러운 표정의 녀석과 다르게 나는 우울한 가정환경 탓인지 밝은 표정이 못되었다. 누가 나를 잘못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듯 어두운 표정이었다. 게다가, 옷차림도 녀석은 항상 정갈했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날씨가 무더워지자 녀석은 마침내 그 대단한 검남색 외투 대신 마치 동사무소의 모범공무원 같은‘하얀 반팔 남방과 검은 바지’차림으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는 여전히 검게 물들인 군복 차림이었다. 당시에 그런 군복 차림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내 경우에는 유행을 따랐다기보다 그 옷을 갈아입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게 바른 해명이다. 마땅히 갈아입을 만한 옷들도 없었던 데다가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내 성격이었다. 그 탓에 내게서는 늘 퀴퀴한 땀내가 나지 않았을까?

그런 남학생이라면 아무리‘철학개론 시간마다 앞에 나가서 발표를 잘한다’ 해도 여학생들이 따를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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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공지천 주변 공원에서 이런 문장이 쓰인 팻말을 보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평상적이지 못한 문장에 나는 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우선은‘그대를 무척 보고 싶었다 ’는 과다(過多)감정의 고백으로 해석해 봤다. 그러고도 개운치 않아서 보다 깊은 뜻으로 해석해 봤다. ‘지금 그대를 눈으로 보고는 있지만 내 마음 속 그대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철학적으로‘눈에 보이는 외물(外物)과, 외물 저편에 있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표현한 문구라 할까?

더 생각하려다가 자리를 떴다. 발이 시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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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이 너무 건너뛰었다. 다시, 철학개론 시간마다 녀석과 내가 맞수가 되어 ‘의견발표를 빙자해 논쟁을 벌이던’시절로 돌아가자.

여기서‘논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녀석도 내 의견을 비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늘 다음 순서인 나한테 비판당하는 처지에 서자 어느 날 녀석은 발표에 앞서 ‘먼저, 지난주에 이군이 발표한 주장에 대해 제 생각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하며 학우들의 양해를 구했다. 그 날부터 자기도 비판의 대열에 들어섬으로써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철학개론 강의시간 중에 전개되는 논쟁이었으므로, 녀석과 나는 ‘논쟁이 말다툼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둘 다 그런 정도의 인격은 되었다. 둘 사이의 논쟁이 매주 이어지면서, 간간이 미소까지 지어가며 발표를 점잖게 잘하는 녀석 못지않게 나라는 존재도 학우들 사이에 ‘재미나게 발표 잘하는 친구’로 금세 떠올랐다.

그러면서 내게도 과의 여학생 두 명이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따르며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점잖기가 대단한 녀석한테나 있는 일인 줄 알았더니 내게도 그런 일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별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여학생들이어서 무성의하게 대꾸해주고 그랬더니 얼마 못 가 제풀에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여학생들이라 해서 모두 예뻐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필 예쁜 구석 하나 없는 여학생들만 내 뒤를 따르면서 수시로 말을 건네는 데는 나도 모르게 부아도 치밀면서 과히 좋은 대답을 해 주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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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있어요‘의 노랫말의 아름다움

 

노래 제목을 요즈음은‘애인 있어요’라 하는데 발표 처음에는 분명히‘애인… 있어요’라고 했다. 중간에 들어간 ‘…’는 말없음표(말줄임표)로써 여기서는‘머뭇거림’을 보여준다. 노랫말 속의 화자가 대화 상대에게 처음에는 애인이 없다고 말하려다가, 있다고 말을 바꾸는 머뭇거림의 가슴 아픔을 제목에서부터 보여주었다.

노랫말의 내용을 산문으로 구성해 봤다. 관련 TV 드라마와 무관한 상상력의 소산이다.

 

남자와 여자는 한 직장의 동료다. 남자가 여자보다 서너 살 위 선배다. 어느 날 퇴근길에 동행하게 돼 자연스레‘커피를 함께 마시게’ 된 두 사람. 커피숍에서 남자가 먼저 왠지 외로워 보이는 여자한테 물었다.

“아직도 넌 혼자인거니?”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혼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요.”

서른이 다 됐는데도 짝사랑이나 한다니, 그런 여자가 안쓰러워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친구들 중에 취업이 늦었던 탓인지 애인도 없이 사는 한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지, 이 여자와 그 친구를 한 번 만나도록 내가 나서보자.’

“그럼 말이야, 내가 아는 좋은 사람이 있는데 한 번 만나볼래?”

여자는 이번에는 미소도 짓지 않고 침묵한다. ‘거절’의 의사가 여자의 굳어진 표정에 역력하다. 사실 여자는 지금 속으로 이런 항변을 하고 있다. ‘모르고 있군요. 내게 멋진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그럼 왜 그 애인을 안 보여주느냐고요? 그건… 내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라 꼭 숨겨둔 거여요.’

굳은 얼굴로 고개까지 숙인 채 말없이 앉아 있는 여자. 남자는 속으로‘이 후배가 왜 이럴까? 내가 괜히 커피 마시자 했나 보다’생각하며 난감해졌다. 여자는 여자대로 아랫입술까지 지긋하게 깨물며 마음속 항변을 이었다. ‘그 사람은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그냥…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겁니다.’

남자는 별 생각 없이‘아직도 넌 혼자인 거니?’물었다가 뜻 모를 여자의 긴 침묵에 난감하다 못해 곤혹스럽다. 이 자리를 어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렇다고 불쑥 일어서기도 뭣해 핑계를 궁리한다. 사실, 지금 눈앞의 여자는 남자가 호감을 가질 만한 스타일이 아니다. 게다가 남자에게는 몇 달 뒤 결혼식을 올릴 약혼녀도 있다.

여자는 아랫입술까지 깨물며 슬픔을 참느라 눈가에 눈물까지 어린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고백한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걸 모르세요?’

 

노랫말 끝에 이런 기막힌 반전이 있을 줄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데 있지 않고‘아직도 넌 혼자인 거니?’물은 바로 그대라는 사실. 영화‘식스센스’ 급의 반전결말이다. 제목을‘애인… 있어요’라고 묘하게 붙인 까닭이 드러난 것이다. 짝사랑을 소재로 한 노래들 중 이런 기막힌 반전결말은 나는 처음 보았다.

한편, 왕년에 ‘고복수’라는 가수가 ‘짝사랑’이란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이 노래의 앞부분이다.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 출렁 목이 맵니다

 

혼자 하는 짝사랑이지만 ‘으악새(억새)’라든가 ‘조각달’ 같은 사물로써 화자의 가슴 아픔을 드러냈다. 그건 화자가 남자라서 가능했을까? ‘애인… 있어요’의 화자는 쉬 가슴 아픔을 드러내놓지 못한다. 눈앞의 그대한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에다가, 자신을 여성이 아닌 직장 동료로만 보는 눈빛에 일찍이 절망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대에 대한 슬픈 사랑 고백을‘입술에 영원히 담아둘’수밖에 없다. 입술처럼 우리 얼굴에서 가벼이 움직일 수 있는 게 어디 또 있을까? 여자는 그런 입술로 사랑 고백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인다. 결국 인내의 한계선까지, 서해 바닷가 밀물처럼 서서히 차오르는 슬픔의 눈물.

여자는‘나는 그대를 갖고 싶지 않아요, 욕심내지 않아요,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라며 끝내 그대에 대한 갈망을 순정으로 승화한다. 모든 것이 급변한 시대에 짝사랑 같은 감정은 구시대 유물인 듯싶었는데 이렇듯 지순할 줄이야.

 

사실‘애인 …있어요’가 어느 날 대중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맨발의 디바 이은미씨 공이 아닌가 싶다. 짝사랑 상대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머금는 여자― 그렇기에 너무나 아픈 가슴을 이은미씨는 처절한 창법으로 구현해냈고 그 결과 우리나라 대중가요 사(史)에 한 획을 그었다. 가수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따로 있는데 ‘애인… 있어요’도 그 중 하나가 됐다. 쟁쟁한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를 경쟁하듯 부르기 시작했다.

이 대단한 노랫말을 지은 분이 어떤 분인지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최은하’라는 분이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광고홍보학 박사 학력에,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남서울대학교 광고홍보학 외래교수를 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참고로 ‘애인…있어요’ 노랫말 일부를 인용한다.

 

아직도 넌 혼잔거니 물어보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 건가 봐

좋은 사람 있다며

한번 만나보라 말하죠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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