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준비는 다 되었다.

구멍가게 옆으로 비좁은 골목이 나있다. 무질서하게 들어찬 민박집들 사이로 생겨난 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산으로 오를 수 있다. 김 과장은 좁고 퀴퀴하기가 사타구니 같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다른 데는 몰라도 골목길은 다니는 사람들 발길에 지난 번 내린 눈이 다 녹았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걸레쪼가리 같은 꼴들로 추하게 남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살짝 얼어 있기까지 해서, 하마터면 김 과장은 미끄러질 뻔했다. 옆의 담벼락을 잡지 않았더라면 몸을 다칠 뻔했다. 왜 이리 이 골목이 다른 데보다 싸늘한 거야?

그늘진 산기슭에 있어서 다른 데보다 기온이 낮은 게 아닐까?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골목 모양이 긴 굴뚝같은 역할을 하면서 바깥의 찬 공기를 잘 빨아들이니까 다른 데보다 한층 낮은 기온을 유지한 것일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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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추운 춘천의 겨울 밤. 전철 교각에 그려진 조명빛이 강추위에 저항하듯 더욱 선명해 보였다.


* 셉테드란,‘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범죄예방 환경설계)’의 약칭이다. 도시계획 및 건축설계 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최소화 시키는 일련의 노력과 과정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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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 쪽으로 걷는다. 다니는 차들도 없으니까 지팡이로 천천히 아스팔트 도로를 탁 탁 짚으며 간다. 등산복에 묻은 햇빛들을 떨어내며 도로를 가로질러 어둑한 산그늘의 마을 쪽으로 가는 남자. 박 사장은 그런 뒷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금 시각이 오후 두 시 반이다. 이런 시간에 혼자 산을 간다고? 보름 전에 내린 눈이 산에 적지 않게 남아 있을 텐데 등산한다고? 어디 눈뿐인가, 산의 곳곳이 얼음판으로 변해서 위험할 텐데. ……아는 민박집이라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오늘은 그 민박집에서 자고 내일 오전에 산에 올라갈 계획으로 말이다. 그러려면 여자와 함께 민박집으로 가는 게 보통인데 저 남자는 뭐야? 하긴 저런 낡은 경차에 동승할 여자는 없겠지. 쪽팔리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이나 하며 박 사장이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그 남자― 김 과장은 구멍가게 앞에 섰다. 가게 간판이 짧은데 그나마도 왼쪽 ‘미’부분이 떨어져나가 ‘니슈퍼’이다. 여닫이문이 덜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니까, 담요를 두른 채 졸고 앉았던 구멍가게 주인이 화닥 깨어 눈을 떴다. 이런 가게는 말하지 않고 손짓으로도 충분하다. 김 과장은 진열장의 먼지 덮인 위스키 한 병을 손으로 가리켜 그걸 넘겨받은 뒤 만 원 한 장을 건네고는 거스름돈을 받았다. 배낭 속에 위스키 병을 집어넣고서‘니슈퍼’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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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느닷없이 K한테 말했다.

“당신 입가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어.”

사실 그런 일이 있다면 굳이 말로 할 게 아니라 여자가 슬그머니 자기 손수건으로 K의 입가를 닦아주면 되지 않나? 둘이 나란히 창가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K도 어지간한 사내다. 미소 띠며 그 고춧가루를 닦아 달라는 뜻으로 얼굴을 여자한테 더 가까이 하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 한 번 문질러버리곤 그만이다. 여자가 이번에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춧가루가 그대로 남아있어.”

마침내 K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춧가루 묻은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정 보기 싫으면 당신이 직접 닦아주면 안 되냐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지.”

하면서 여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칠칠치 못하긴!’이란 뒷말을 우물거리는 듯싶다. K는 더 이상 여자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통보하듯 말했다.

“더 앉아있을 거야? 나는 갈 거야. 창가라 추워서 더 앉아 있기도 힘들어.”

여자는 창밖 풍경을 보며 말이 없다. K는 여자가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기에, 적지 않게 실망했다. 코트 주머니 속의 자동차 키를 꺼내 들고는 카페의 계산대로 가는 K. 먼저 나가더라도 둘이 마신 찻값은 치러야 예의다.

‘호수 카페’는 넓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바지에 있어서 데이트 족들의 명소다. 문제는, 영하의 날씨가 보름 넘게 이어지며 호수 물빛이 검푸르다 못해 음산한 납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느닷없이 K한테 ‘입가에 고춧가루’따위의 기분 나쁜 말을 툭 뱉은 것은 이런 음울한 풍경 탓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카페에 다른 때보다 손님들도 몇 없었다.

‘젠장, 애당초 이런 추운 호숫가 카페를 찾아온 게 잘못이지.’

K는 카페 옆 공터에 주차돼 있는 차 문을 열었다. 시동을 걸어 호숫가를 떠났다. 보름 전 내린 눈이 빙판이 돼 차를 아주 천천히 몰아야 한다. 여자하고의 일로 기분이 상해 호숫가를 훌쩍 떠나고 싶은 K의 심정을 전혀 몰라주는 빙판 길. 이래저래 기분 되게 나쁜 오후다.

한 시간 후.

K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다가 인터폰 소리를 들었다. 수화기를 들자 대문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K는 얼른 인터폰의 버튼을 눌러 대문이 열리게 했다.

호숫가에서부터 걸어왔는지 여자가 얼굴이 파랗게 언 모습으로 현관에 들어섰다. K는 여자의 가죽코트를 받아들며 여자보다 먼저 서둘러 말했다.

“전화하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차를 몰고 태우러 갔을 텐데. …… 아까 미안했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더라고.”

“고혈압 환자를 남편으로 둔 내 팔자지.”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탓에 텅 빈 느낌의 단독주택. 모처럼, 오랜만에 젊었을 적 데이트 하던 기분을 내려했던 부부는 다시 적적한 현실로 돌아왔다. 적막한 분위기를 깨듯 여자가 말했다.

“당신 배고프지 않나?”

“응 배고파.”

“조금 기다려.”

여자는 주방에 들어가 라면 두 개를 끓일 채비에 들어갔다. K는 소파에 앉아 다시 TV 뉴스 보기에 집중했는데 여전히 고춧가루 한 점이 입가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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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닭갈비’집 박 사장이 산그늘에 깔려 있는 어둑한 마을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낮인데도 등을 켜놓고 손님들 기다리고들 있지만, 그러면 뭐하나? 강아지 한 마리 안 지나가는데……. 이럴 때는 우리 식당이 그만이지, 전등 하나 켜 놓지 않아도 햇빛이 잘 들어서 이렇게 밝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손님이 없을 수가 있나. 이맘때면 대학생들부터 오티니 엠티니 찾아와서 우리 마을 모두들 정신없이 바빴는데…… 올해는 이렇게 썰렁하니, 나 참.

속으로 그러고 있을 때 웬 낡은 경차 하나가 도로에 나타났다. 방향지시등도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이 쪽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왔다. 산그늘이 도로까지 드리운 때라서 그 차는 무거운 자주색이었다가 이쪽으로 들어서면서 햇빛을 받아 밝은 색으로 바뀌었다. 예전 같았으면 박 사장은 이럴 때 문을 열고 나가 그 손님을 맞는 시늉이라도 했다. 지금은 그냥 실내에서 지켜보기만 한다.

식당 옆 주차장으로 들어서더니 멈춰서는 경차. ‘우리 식당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딴 데 일을 보러갈 사람이다.’고 박 사장은 단정했다. 한적한 도로라 해도 ‘도로변 주차’는 단속대상이니까 남의 주차장을 슬그머니 이용하는 모습이겠다. 검은색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잿빛배낭을 등에 메는 것을 보고 박 사장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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