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일을 마쳤을 때 시각이 오후 7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자니 가는 동안 20분에, 아내가 밥상 차리는 데 10여 분 해서 8시는 넘어야 가능할 것 같았다. 결국 부부는 저녁밥을 사 먹고 가기로  뜻을 모았다.
  주문한  밥이 빨리 나오는 어느 시골 식당을 찾았다. 요기를 해결한 뒤 식당 앞 테라스에서 잠시 쉴 때 남편은 눈앞의 야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그 야경을 촬영했다. 아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밤 풍경 같은데 뭘 촬영했지?"
남편이 답했다.
"내가 81년  82년에 이 동네에서 셋방 살았잖아. 직장이 여기 있었으니 말이지. 그 때 이 시골에서 얼마나 쓸쓸하고 외롭게 지냈는지! 그러니까 나는 지금 36년 전 한창 젊었으나 쓸쓸했던 나를 사진 찍어본 거라고."
   그 말에 아내가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 두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당신이 그 때 어떤 여자와 결혼하려다가 실패한 게 아니겠어? 그런 당신을 구제해준 게  바로 나잖아. 여하튼 당신은 항상 나를 고마워해야 해."
   외견상, 부부는 시골 야경을 말없이 바라보며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아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어서 집에 가야 해. 빨랫거리가 밀렸어.당신은 집에 가면 쉬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
"알았어."
그 밤,  남편은 36년 전의 자신을 그 시골에 두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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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던 K가 산길에서신음하며 죽어가는 청설모한 마리를 보았다. 사실 신음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주둥이를 벌린 채 몸을 간간이 떠는 놈의 모습에 신음소리를 듣는 듯싶었다. 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동네에 있는 작은 산이라 엽사의 짓일 수가 없었다. K의 지식으로는 엽사는 매년 당국의 허락 아래 정해진 구역에서나 동물을 수렵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 산 같은 곳은 절대 불가하다. 그렇기도 하고 엽사가 엽총을 갖고 다니며 사냥한 게 고작 청설모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뱀에 물린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청설모가 신음하며 누워 있는 산길 위치를 봤을 때 위의 참나무나 소나무 가지에서 떨어진 듯싶은데 그런 높이의 나무에 오르는 뱀은 우리나라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의 뱀 중에는 나무그루를 휘감고 올라가 새를 잡는 놈도 있다지만, 우리나라 뱀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K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 뱀은 고개도 빳빳이 쳐들지 못하고 그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게 전부 아닌가.

매나 부엉이 같은 맹금류한테 당한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겼다면 매나 부엉이가 청설모를 산길에 내버려둘 리 없었다. 나뭇가지에 갖다 놓고 찢어먹기 시작하거나, 둥지로 갖고 가 새끼들한테 먹이거나 해야 한다. 청설모를 이대로 산길에 방치할 리 없었다.

결론이 나왔다. 이 청설모는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다가 실수로 밑의 산길로 떨어져 목숨이 위태롭게 된 경우였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속담이 왜 만들어졌겠나?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혹시 다 늙은 청설모라면 살 만큼 살아서 자연사를 기다리는 장면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의 청설모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으로 치면 청년으로 여겨지는, 몸의 털이 윤기 나는 모습이었다. K는 마음 같아서는 이 죽어가는 청설모를 수습해 어디 편안한 다른 장소로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K는 그러지 못하고 산길을 부리나케 내려왔다. 무서워서였다. 놈이 무섭다기보다는 같은 생명체로서 언제고 맞이해야 할 죽음이 불현듯 무서워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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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 두뇌 활동을 하며, 동물의 뇌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구조가 뿌리에 존재한다는식물 두뇌가설이 있다.

 

오늘 아침 아내가,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남편한테 말했다.

여보, 지금 바쁘지 않으면 창고 한 구석에 있는 종이박스 두 개 좀 마당에 내다 줘요.”

남편이 신문의 정치면을 접으며 퉁명스레 물었다.

박스에 뭐가 들었는데 그래?”

다알리아 구근들이 들어있어요. 지난가을에 화초 많이 기르는 분한테서 얻은 것들인데 겨울을 나느라고 창고 구석에 갖다 놓은 거에요. 이제 봄이니까 밭에 갖다 심어야죠.”

창고 옆으로 보일러 파이프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다알리아 구근들이 얼지 않고 겨울을 난 것 같았다. 남편은 창고로 가 문제의 박스를 마당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구근들이 한두 개가 아닌 여럿이 들어 그럴까, 제법 묵직했다. 순간 남편은 며칠 전 보았던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일간 뉴욕포스트, 기술지 MIT테크놀로지 리뷰에 따르면, 신생 기업 넥톰’(Nectome)은 인간 두뇌를 완전한 형태로 냉동 보존해 뇌에 저장된 기억이나 의식을 디지털 테이터로 컴퓨터에 업로드하고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 넥톰은 알데히드 안정 냉동 보존법(ASC)로 불리는 최첨단 방부처리기술을 활용해 뇌를 보존한다. 이후 보존된 두뇌에서 사람의 의식을 디지털 방식으로 되살린다.

 

박스가 묵직하니, 남편은 아무래도 사람의 묵직한 두뇌를 든 듯싶다. 집 마당에 화사하게 봄 햇살이 떨어지는데 정작 남편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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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 연주자 둘이 나란히 서서 어제 내린 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그 동영상을 지켜보던 K는 자기도 모르게 놀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북에서 온 연주자들이 감성 짙은 곡을 연주하다니……. K는 그 가사를 잘 알고 있다.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 맑은 이슬 떨어지는데/ 비가 내렸네/ 우산 쓰면 내리는 비는/ 몸 하나야 가리겠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

마치 서울 어느 유명 카페에서 출장 온 연주자들처럼 몸을 흐느적이기도 하며 색소폰 연주에 심취해 있는 북에서 온 사람들. 살벌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 같았던 그들도사람이었다. ‘어제 내린 비의 촉촉한 감성에 젖어 있는 모습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환갑 넘은 K어제 내린 비연주에 쉬 빠져든 까닭이 있다. K의 젊은 시절, 몇 번을 데이트해도 K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던 여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K에 대한 경계심이라기보다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라 봐야 했다. 그것은 자신을 지켜가며 좋은 남자를 맞으려는 여자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비가 촉촉이 내리던 그 날 거리에서, 여자는 K의 어깨에 자신을 기대었다. 몇 번을 데이트해도 항상 일정 거리를 두고 걷던 여자의 투항(投降)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K가 든 우산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여자는 비에 젖을 판이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 촉촉이 내리는 비에 여자 마음이 이미 젖어 있었으니까.

여보. 애 좀 봐요!”

아내가 방문을 열고 소리치는 바람에 K는 화들짝 놀랐다. 아내가,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맡긴 손주를 데려오며 말을 이었다.

장 좀 보고 올게.”

K가 하는 수 없이 동영상의 볼륨을 바짝 낮추고 손주를 인수받는데 웬 지린내가 풍긴다. 손주가 그 새 오줌을 쌌나 보다. 어제 내린 비 동영상에 촉촉하게 젖던 K는 한숨을 내쉬며 손주의 축축한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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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느닷없이 K한테 말했다.

당신 입가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어.”

사실 그런 일이 있다면 굳이 말로 할 게 아니라 여자가 슬그머니 자기 손수건으로 K의 입가를 닦아주면 되지 않나? 둘이 나란히 창가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K도 어지간한 사내다. 미소 띠며 그 고춧가루를 닦아 달라는 뜻으로 얼굴을 여자한테 더 가까이 하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 한 번 문질러버리곤 그만이다. 여자가 이번에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춧가루가 그대로 남아있어.”

마침내 K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춧가루 묻은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정 보기 싫으면 당신이 직접 닦아주면 안 되냐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지.”

하면서 여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칠칠치 못하긴!’이란 뒷말을 우물거리는 듯싶다. K는 더 이상 여자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통보하듯 말했다.

더 앉아있을 거야? 나는 갈 거야. 창가라 추워서 더 앉아 있기도 힘들어.”

여자는 창밖 풍경을 보며 말이 없다. K는 여자가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기에, 적지 않게 실망했다. 코트 주머니 속의 자동차 키를 꺼내 들고는 카페의 계산대로 가는 K. 먼저 나가더라도 둘이 마신 찻값은 치러야 예의다.

호수 카페는 넓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바지에 있어서 데이트 족들의 명소다. 문제는, 영하의 날씨가 보름 넘게 이어지며 호수 물빛이 검푸르다 못해 음산한 납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느닷없이 K한테 입가에 고춧가루따위의 기분 나쁜 말을 툭 뱉은 것은 이런 음울한 풍경 탓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카페에 다른 때보다 손님들도 몇 없었다.

젠장, 애당초 이런 추운 호숫가 카페를 찾아온 게 잘못이지.’

K는 카페 옆 공터에 주차돼 있는 차 문을 열었다. 시동을 걸어 호숫가를 떠났다. 보름 전 내린 눈이 빙판이 돼 차를 아주 천천히 몰아야 한다. 여자하고의 일로 기분이 상해 호숫가를 훌쩍 떠나고 싶은 K의 심정을 전혀 몰라주는 빙판 길. 이래저래 기분 되게 나쁜 오후다.

한 시간 후.

K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다가 인터폰 소리를 들었다. 수화기를 들자 대문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K는 얼른 인터폰의 버튼을 눌러 대문이 열리게 했다.

호숫가에서부터 걸어왔는지 여자가 얼굴이 파랗게 언 모습으로 현관에 들어섰다. K는 여자의 가죽코트를 받아들며 여자보다 먼저 서둘러 말했다.

전화하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차를 몰고 태우러 갔을 텐데. …… 아까 미안했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더라고.”

고혈압 환자를 남편으로 둔 내 팔자지.”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탓에 텅 빈 느낌의 단독주택. 모처럼, 오랜만에 젊었을 적 데이트 하던 기분을 내려했던 부부는 다시 적적한 현실로 돌아왔다. 적막한 분위기를 깨듯 여자가 말했다.

당신 배고프지 않나?”

응 배고파.”

조금 기다려.”

여자는 주방에 들어가 라면 두 개를 끓일 채비에 들어갔다. K는 소파에 앉아 다시 TV 뉴스 보기에 집중했는데 여전히 고춧가루 한 점이 입가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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