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부르크라는 미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유티인 은행가의 7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여섯살 때 티푸스를 앓았다고 한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절대로 그를 흥분시키지 말라는 처방을 내렸고, 가족들은 그를 안정시키기 위해 웬만한 요구는 모두 들어 주곤 했다. 그 다음이 문제다.
"영악한 바르부르크는 이를 이용하여 어린 동생들을 때리거나 부려먹었다고 한다"
그는 책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나중에는 이런 짓도 한다. 집안의 가업을 물려받는, 소위 장자권을 한살 아래인 동생에게 팔아 버린 것. 조건은 "그가 원하는 모든 책을 사 줘야 한다는 것"
책값이라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어린 동생은 잠시 생각한 후에 형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생은 평생 동안 형의 엄청난 책값을 치르느라 고생을 하게 된다"
몇권이나 되기에? "그가 모은 각 분야의 책들은 모두 6만여 권에 달했다"
6만권이라니, 한권당 1만원씩만 쳐도 6억이다. 그가 죽고난 뒤 그 책들을 밑천삼아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만들어졌고, 그 유명한 곰브리치가 그 연구소의 소장을 지낸 바 있다니, 동생이 허리가 휘도록 돈을 모아 그 연구소를 만든 셈이다 (<천천히 그림읽기>, 조이한.진중권 저)
6만권, 정말 엄청난 숫자다. 이 정도라면 한번씩 펼쳐 보기도 힘들었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에서 책을 많이 읽기로 유명했던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그가 청와대에 입성할 때, 소장하고 있던 장서가 트럭 몇대에 실려 옮겨졌다는데, 그게 2만권인가 그랬다. 감옥생활을 오래 했고 연금을 하두 많이 당해 이런 숫자가 가능했다지만, 평범한 사람은 도달하기 힘든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시인 박노해는 7년의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1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7년에 1만권이면 1년에 1400권, 하루에 4권 꼴이다. 난 맘잡고 책만 읽어도 하루 한권을 읽기도 힘들던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감옥이란 곳이 책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땅이라고 해도 말이다.
알라딘에서 활약중인 '평범한 여대생'님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많은 책을 읽는 분이다. 책을 읽을 때마다 알라딘에 서평을 게재했다고 전제하면, 그가 2003년에 읽은 책은 177권, 거의 이틀에 한권 꼴이다. 이 숫자 역시 보통 사람으로서는 달성하기 불가능한 숫자 같지만, 이런 추세로 50년을 읽는다해도 1만권 돌파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난 30년을 거의 책한권 읽지 않고 살아왔다. 서른을 넘기고부터 뒤늦게 책에 눈을 떠 열심히 읽고 있지만, 1년에 100권씩 30년을 읽는다해도 3천권이 고작이다. 그래서 난 말한다. "권수가 뭐 중요하냐. 중요한 건 어떤 책을 읽느냐 하는 거다" 물론 내가 읽는 책이 뭐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니니, 이 말 역시 별반 설득력이 없다. 책을 읽을수록 진작에 읽지 않은 것이 후회되고, 지나온 30년이 한스럽다. 남들이야 "지금이라도 읽는 게 어디야"라고 말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난 스포츠신문을 보는 젊은 애들을 보면 차라리 책을 읽는 게 어떠냐고 말을 하고, 시험 잘본 애들에게 상으로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에게 물을 먹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책의 소중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나의 행동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여튼간에 책을 읽노라면 언제나 느낀다. 남은 인생이 너무 짧다고. 읽을 책은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