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녀가 나오는 드라마를 '팜므 파탈(Femme fatal)'이라 한다. 학생 때 '위험한 정사'에 나오는 어느 여배우의 리얼한 연기를 보면서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인상이 어찌나 강했는지 나중에 바람 같은 건 절대 피우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름을 잘 모르겠는 그 여자는 나중에 '에어포스 원'이란 영화에서 부통령으로 나왔는데, 하등 무서울 상황이 아님에도 그녀를 보고 몸을 떨었던 건 어릴 때 기억 때문이다.
음모와 배신이 지배하는 드라마에는 어김없이 악녀가 등장한다. 내가 본 악녀들의 기억을 잠시 더듬어 본다.
1. <미스터 큐>의 송윤아: 난 송윤아를 그때 처음 봤다. 도발적인 눈매에 지적인 풍모까지 갖춘 그녀, 드라마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하지만 이쁘기만 한 그녀를 누가 미워할 수 있으랴. 송윤아는 악녀가 갖추어야 할 카리스마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고, 그렇기에 드라마 전체를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언젠가 다른 프로에서 낙하산을 매고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릴 때, 안하겠다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결국 뛰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맘가짐이면 크게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확실한 브라운관의 스타다.
2. <토마토>의 김지영; 난 <전원일기>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당근 김지영도 모른다. <토마토>가 내가 그녀를 처음 본 드라마다. 그리 미모가 뛰어나지 않았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봤을 때 놀랐다.
[모 신인배우는 촬영시간에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배역을 박탈당했다.... 한시간이 지나서 촬영장에 나타난 김지영에게는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깐 억울하면 스타 되는 수밖에!]
김지영이 스타야? 어쨌든, 미모가 약간 떨어짐에도 김지영은 뛰어난 연기력으로 악녀의 역할을 잘 수행했는데, 바로 그 떨어지는 미모 때문에 난 김지영을 마구 미워했다. 지금도 TV에 나오는 김지영을 볼 때마다 착하디 착한 김희선을 괴롭히던 그 악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3. <진실>의 박선영; 첫인상은 중요하다. 앞의 경우처럼, 박선영을 본 것도 그 드라마가 처음이었다. 그런 선입견 탓에 다른 곳에서 박선영이 나오면 난 TV를 돌려 버린다. 악녀도 악녀 나름이지, <진실>에서 그녀는 정말로 악독했다. 악독하게 느껴진 건 연기를 잘했다는 말이 되지만, 어쨌든 그 방법과 발상이 해도해도 너무했기에 난 지금도 그녀가 싫다. 나중에 손지창과 같이 자살할 때는 조금, 아주 조금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 드라마가 한창 인기일 때, 내가 꾼 악몽에 그녀가 등장한 적도 있을 정도다.
4. <명랑소녀 성공기>: 여기서도 악녀가 하나 나온다. 이름을 잘 모르겠으니 극중 이름인 '나희'라고 하자. 악녀의 조건 중 하나가 미모가 어느정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나희는 최악이다. 게다가 장혁에게 매달리는 꼴이 자존심이라곤 전혀 없어 보인다. 언젠가 기차에서 본 신문기사에는 그녀가 커다랗게 나와있다. "미움 받아야 뜨죠!"라는 제목으로.
미움은 최소한의 조건이 있어야 생기는 법이다. 미모도 그렇지만 연기력도 영 엉망인지라 그녀에게 생기는 건 증오가 아닌, 동정심이다. 그 기사에 의하면 "그녀의 몸매를 알아본 광고주들로부터 CF가 쇄도중"이라는데, 그게 정말일까? 위에서 언급한 세 드라마와는 달리 <명랑소녀 성공기>가 성공을 거둔 것은 악녀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닌, 장나라와 장혁 때문이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건, 연기자로서는 굉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행운을 명성으로 이어가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나희의 실패는 운만으로는 스타가 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