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인사동에 있는 '학교종이 땡땡땡'이란 술집(전유성 씨가 주인이다)처럼 어린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런 술집인데, 옛날 우리가 쓰던 책상들이며, 그시절 노트로 만든 메뉴판 등이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벽쪽에는 낡은 초등학교 교과서들이 놓여있다. 그당시 우리가 뭘 배웠을까 하면서 6학년 도덕책을 폈다. 그중 날 씁쓸하게 만든 한 대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눈이 많이 오는 날, 집배원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눈도 오고 날도 추우니 오늘은 우리집서 자고가시죠" 집배원은 두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돌릴 편지가 많이 남았습니다".....다음날 아침, 길을 가다보니 그 집배원이 손에 편지를 쥐고 죽어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배원은 자기 할일을 하다 죽어간 거란다"]

이 시점에서 난 이게 '도덕책'이 맞는지 다시한번 표지를 봐야 했다. 1984년도 꺼던데, 지금부터 불과 20년 전에는 이런 게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휘어잡았나보다.

'자기희생'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하지만 그걸 사회구성원들에게 암암리에 강요하는 건 국가의 폭력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가치는 아무것도 없다. 집배원의 편지를 하루 늦게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큰일 날 껀 없다. 큰일이 난다해도 자기 목숨까지 버리며 편지를 배달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 그 아버지라는 인간은 "할일을 다하다 죽었다"며 그를 칭송한다.

이 책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2차대전 당시의 '가미가제 특공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땅에 태어난 게 아니라, 진중권 씨의 말처럼 "그냥 우연히" 태어났다. 국가의 이익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은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조작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죽은 이승복은 맹목적인 반공교육이 낳은 희생자다. 그 어린 아이가 공산당이 뭔지 알고 그렇게 말했을까? 그런 걸 말리기는커녕 동상을 세우고 교과서에 수록함으로써 그를 찬양하는 것 역시 '가미가제' 이데올로기에 다름아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만을 받아 왔기에 우리는 아직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자각과 성숙이 덜된 게 아닐까? 국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개인의 행복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1984년으로부터 18년이 지났다. 군사독재는 종식되었고 민간정부가 들어섰으며, 사회 각 부분에서 더디긴 하지만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다. 지금의 도덕교과서는 그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요즘의 6학년 도덕교과서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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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학회 뒤풀이를 하는 도중, 갑자기 집에 가고싶은 생각이 나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기차표를 끊고나서 시간이 좀 남아, 피씨방에 갔다. 그런데 피씨방에 오는 동안 많은 유혹을 받았다. 내가 좀 있어 보이는 탓인지, 길거리에 나온 아줌마들이 이렇게 날 꼬신다.
"젊은 아가씨 있어"
"학생, 좋은 모텔 찾아?"
"5만원에 젊고 이쁜 아가씨 있어"

딱 한번 응답을 했다. "전 40분밖에 시간이 없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의 답, "아유, 충분해. 두번은 하겠다"

우리 나라는 불륜의 천국이다. 불륜에 이르는 수단은 그야말로 무궁무진이다. 그 수단들을 기억나는대로 써본다.

1. 단란주점 혹은 룸싸롱; 2차를 안가는 곳도 있긴 하지만, 우리 남자들 중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2 티켓다방: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날렸지만, 요즘은 맛이 간듯.
3. 전화방: 나두 한번 가봤는데, 확률이 그리 높진 않다.
4. 채팅; 내 친구 하나가 부인이 친정 갔다고 세이클럽에 들어갔단다. 게는 5분만에 여자를 꼬셨고, 새벽 3시에 만났다. 안이뻐서 그냥 헤어졌다지만 그걸 믿어야 할까?


5. 이발소; 친구 하나는 이발소를 선호한다. 웬지 불결해 보여 난 싫은데, 우리나라 이발소는 하여튼 머리깎는 곳이 아니다.
6. 터키탕; 터키 대사관서 항의가 올 정도로 퇴페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는 곳. 거기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7. 마사지; 한때 주차해둔 차의 유리창엔 마사지 업소의 휴대폰이 적힌 명함이 몇장씩 꽂혀 있었다. 한시간에 17만원이라는데, 그시간에 뭘할지 뻔하다.

8. 안마시술소; 우리집 앞에 있는데, 24시간 영업한다. 설마 거기서 안마만 할 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9. 비디오방, 노래방; 원하면 아가씨도 불러준다. 강서구청 뒤 노래방에 주부들이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고 해서 실태조사를 나가본 적이 있다.
10. 영등포, 청량리' 매매춘의 원조. 오랜 역사를 입증하듯, 엄청난 미녀들이 즐비하단다.('단다'에 주목)


생각해보면 더 있겠지만 그만 쓰자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게 있다. 대구서 탄 택시에 있는 스티커 한장을 집어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성 대리운전 1일 비서, 장거리 출장가능, 24시간 출장대기, 1만원대.... ]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 대리운전'이란 설명 아래는 한 미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대리운전하는데 지성과 미모가 왜 필요할까? 장거리 출장이 가능하다는 건 무얼 의미하나? 노래방이 그랬듯, 대구의 선진문물이 서울로 올라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그러니 조만간 서울서도 대리운전을 통한 매매춘도 충분히 가능할 듯 싶다. 조금 야한 영화는 아예 개봉이 미루어지는 도덕적인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괴이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성이 이렇게 음성적으로 성행하는 건, 성에 관한 담론들이 금기시되는 우리 사회의 위선 탓이다. 제대로 된 성교육은 그래서 필요한 법이다. 술이 알딸딸하게 취한 지금, 차도 없으면서 대리운전을 부르고 싶은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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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3-12-31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읽을 거리가 참 많네요^^

123 2011-05-21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구의 밤문화.ㅋㅋㅋㅋㅋ 그런데 ㅅㅅ할때 돈을 내는건 ㅄ아닌가요? 몸버리고 돈버리고 그렇게해서 얻는게 뭔가 세상에는 참 추잡한 사람들이 많네요
 

 

 

 

이 책은 유명한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쓴 글들을 모은 것으로, 그녀의 미모는 "여성운동은 못생긴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란 통념을 깨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추상적 얘기보다는 우리가 겪는 일상적 현실을 무대로 하기에 더더욱 공감이 갔는데, 씁쓸한 것은 70년대에 쓰여졌던 이 글들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유효하다는 거다.

책의 맨앞에 나오는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의 몇 부분만 소개한다.

[남자가 월경을 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되면 분명 월경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생리량은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댈 것이다. 초경을 한 소년들은 이제서야 진짜 남자가 되었다고 좋아할 것이다. 처음으로 월경을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과 종교의식, 가족들의 축하행사, 파티들이 마련될 것이다....

우익 정치인들은 생리를 하는 남자들만이 높은 정치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화성이 지배하는 주기에 따라 일어나는 신성한 월경도 하지 않는 여성이 고위직을 차지한단 게 말이나 되는가?)...

이런 식의 인사를 나누면서 손바닥을 맞부딪치기도 한다.
"어이, 오늘 좋아 보이는데?"
"응, 오늘이 그날이거든"

...<힐 스트리트 블루스>는 한 동네의 남자들이 모두 월경 주기가 같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신문들도 마찬가지다. "해수욕장에서 상어들이 월경중인 남성을 위협하고 있다" 또는 "월경중에 여자를 강간한 남성에게 법원이 관용을 베풀다" 등의 기사가 실린다. 그리고 극장에서는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피로 맺은 형제>가 상영되고 있다....

폐경은 긍정적인 사건으로 찬양된다. 남자가 이제 더이상 지혜를 축적할 필요가 없을만큼 충분한 기간 동안 월경을 했다는 표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말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거다.
[우월한 집단이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우월한 지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열등한 집단이 가진 것은 모두 그들이 겪는 부당함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페미니즘 하면 좀 고리타분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사람들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자신을 한번쯤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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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개미혁명>을 읽은 뒤부터 그의 팬이 되었는데, 그 뒤부터 그의 책이 나오는 족족 사고 있다. 어제 책방에 그가 쓴 <뇌>라는 작품이 있기에 대번에 사버렸는데, 그책을 사고나자 갑자기 베르베르에 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베르는 17살 때부터인가 그의 데뷔작 <개미>를 쓰기 시작한 천재임에도 그의 조국인 프랑스에서는 도통 인기가 없었다. 그런 베르베르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작가"라는 평을 들으며 대부분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있으니 괴이한 일이다. 외국 책을 번역하는 경우는 그 나라에서 뜬 책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베르베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탁월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베르베르도 이에 대해 매우 고마왔는지 <개미혁명>에서도 한국 남자가 나오고, <천사들의 제국>에서도 한국 여자 한명을 등장시킨다.

한국인이 베르베르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버스안에서 잠시 생각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천재에 대한 경배: 다른 나라는 안가봐서 모르겠지만 우리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정말 열성이다. 특히나 영재에 대한 관심은 가히 메가톤급인데, 베르베르는 보기드문 천재이니 그가 인기있는 건 당연하지 않는가.
2) 교양; 마광수 교수는 이문열이 뜬 이유를 "교양주의" 탓이라고 했다. 즉, 읽는 독자에게 뭔가 많은 게 머리에 남았다는 뿌듯함을 준다는 거다. 베르베르의 책 역시 그런 지적 포만감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개미혁명>을 비롯한 그의 책은 에드몽 웰스라는 가공의 인물이 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곳곳에 소개되어 있는데, 다른 곳에 가서 써먹기 딱 좋을 그런 내용들이다. 내가 다른 애들한테 아는 체를 한다고 하면 그 소스는 다 그거다. '상대적...'은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했다.

3) 유머: 다른 사람들은 숀 코너리라고 답하던데 난 007 시리즈 중 가장 좋아하는 제임스 본드가 로저 무어다. 로저 무어는 숀 코너리나 브로스넌이 갖지 못한 '유머'를 갖고 있다. 자연스러우면서 세련된 그의 유머는 외양만 비슷하다고 흉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베르베르의 책은 교양과 더불어 유머가 넘친다. 90년대 이후 우리 나라는 못웃기는 사람이 나쁜 인간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유머가 존중되고 있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르베르가 90년대부터 뜨기 시작한 건 그래서 당연하다.

4) 이름: 우리 조상들은 자고로 3.4조나 4.4조를 좋아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4.4조로, 듣기에 아주 편하다. 문학성이 뛰어난 요시모토 바나나가 4.3조라는 이유로 배척받는 걸 보면 그의 이름이 인기에 한몫을 했음을 알 수 있다.

"http://lestis.wo.to"라는 홈페이지를 운영 중인 최계현님은 <천사들의 제국> 독후감에서 이런 말을 한다.
1) '개미혁명'은 '개미'의 속편격이므로 "전작 '개미'를 읽지 않는다면 스토리 이해가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2) "천사들의 제국은 그 '타나토노트'의 후속편이다. 혹시나 타나토노트를 읽지 않고 천사들의 제국을 읽은 사람의 감상은 어떨지가 궁금하다"

1)에 대한 답변: 난 아직 <개미>를 읽지 않았다. 베르베르의 팬을 자처하면서 그의 출세작을 읽지 않은 게 쑥스럽지만, 3권으로 된 <개미혁명>을 읽으면서 개미 이야기를 지겹게 들었는지라 다시금 3권짜리 <개미>를 읽고 싶진 않았다. <개미혁명>만 읽어도 스토리 이해에 전혀 문제가 없는 건 물론이고.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 <다이하드 2>를 본 사람이 전작인 <다이하드>를 보면 재미있을까?

2)에 대한 답변: 역시 난 <타나토노트>를 읽지 않고 <천사들의 제국>만 읽었다. 베르베르의 팬이 된 게 <타나토노트>가 나온 한참 후이기 때문이다. <천사...> 역시 그 자체로 충분히 재미있었고, 굳이 타타토노트를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팬이라면 그사람이 쓰던 휴지 한조각까지 모아야 할테지만, 난 베르베르의 진정한 팬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팬을 자처하는 스타가 내겐 너무도 많다보니-유선미도 있지 않은가-모든 스타에게 정성을 쏟을 수가 없는 게 안타깝다. 뭐,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않겠나. 하여튼 베르베르를 알게 된 걸 난 큰 행운으로 여긴다.

끝으로 최계현님의 홈에서 몰래 훔쳐온, 자기나라에선 안떴는데 한국서 히트친 경우 몇가지를 소개한다.

[자국 또는 다른 나라에서는 안뜨는데 유독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몇가지 케이스가 있다. 영국 그룹 '리알토'가 그런 케이스였는데, 영국 차트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가 무슨 연유였는지 유독 유리나라에서만 인기가 있었다. (Monday Morning 5:19을 기억하는지..) 그러다가 한국에서 적당히 인기가 시들어져가고 있을때 뒤늦게 빌보드에 올라 한동안 높은 순위를 유지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그후 그들은(베르베르와 마찬가지로) 한국이 행운의 나라로 여기게 되었을 게다. 그들을 볼때 마다 한국 공연때 베이스드럼 전면에다 어설프게 '리알토'라는 한글을 검정테이프로 붙였던 것이 기억난다. 또 다른 케이스로는 '소리가 좋은 나라'라고 말하는 케니G와 'Betty'의 덴마크 그룹 Blink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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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7-12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쓰고난지 한참 후, 동네 책 대여점이 망했습니다. 책을 대방출할 때 몇권을 샀는데, 그중의 하나가 <타나토노트>입니다. 역시나 재미있더군요. 베르베르가 재미있는 건 <천사들의 제국>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나무>랑 <뇌>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4.3조에 대한 얘기, 농담인 거 아시면서^^
 

 

 

 

단골서점에서 이 책을 봤을 때, 솔직히 사고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 책이 한두권이 아니긴 해도, 여기저기에 기고한 소위 잡글들을 모아서 책을 펴낸 건 왠지 성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가 귀에 익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내가 망설인 이유였다. 내게 낯익은 저자들은 최소한 기본은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내가 그책을 산 건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라는 저자의 이력 때문이었다. 진보적인 분의 책으로부터 뭔가 배울 점이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하지만 당장 읽고싶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없던 탓에 난 책을 사고 나서도 한달 이상 구석에 쳐박아 놓았었다.

엊그제 새벽, 잠이 안와 뒹굴다가 우연히 이책이 눈에 띄었기에, 담담한 맘으로 첫페이지를 펼쳤다. 진흙 속의 진주라고나 할까, 책은 의외로 재미있었고, 번번히 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의미와 재미를 모두 겸비한 그런 좋은 책... 책을 보느라 밤을 꼴딱 샌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잠시 생각을 해봤다. 우리는 책을 왜 읽는가?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 그저 시간을 떼우기 위해? 킬링타임용 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책'이라 함은 남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지 않을까? 최소한 난 그런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것 같다. 하지만,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열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난 그런 자세를 갖추고 책을 읽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일전에 김종찬 씨가 쓴 <신문전쟁, 속지않고 읽는 법>을 읽은 적이 있다. '정부가 비판언론을 길들이기 위해 세무조사를 하고, 다른 신문을 동원해 비판언론을 공격한다'는 내용을 아주 잘난척을 하면서 써놓은 책이었는데, 난 그걸 읽는 내내 맘이 불편했다. 그래서 다 읽고 나서는 "이인간 책 다신 안읽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시대유감>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아주 편했다. 그건, 군가산점, 구성애의 아우성, 남녀평등 등 일련의 소재들에 관해 저자와 나의 생각이 비슷한 데서 오는 편안함이었다.

그러니깐 난 책을 통해 내 생각을 교정한다든지 할 마음이 없는 거다. 다시 말해 내가 책을 읽는 목적은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옳은 것임을 확인하고픈 거였다. 진보적이라 이름난 한신대 교수의 책을 산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공부가 많이 부족한 탓에, 내 사상은 아직 허점이 많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려 노력하지만, 잘먹고 잘사는 내 환경 탓인지 진보에 어긋나는 주장을 펼 때도 많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굉장히 극우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즉, 일관된 어떤 신념의 체계를 갖지 못했다는 얘기다. 내가 다른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책을 통해서 그 체계를 갖출 수밖에 없는데, 나처럼 닫힌 자세로 책을 읽는다면 책에서 뭔가를 배우는 건 불가능하게 된다. 맘을 비우고 책을 읽는다고 해도 나와 조금만 다른 주장을 접하면 금방 털이 곤두선다.

30이 넘으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건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역시나 책은 10대, 20대 때 읽어야 한다. 30이 훨씬 넘은 이제사 책을 읽는다고 허둥대 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라도 독서를 하는 게 안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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