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넘게 방송에 나갔던 적이 있다. <사랑의 스튜디오>가 그 효시고, 그 이후 이러저러한 프로에 얼굴을 디밀었지만 <사랑의...>만큼 잘 하지 못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날 기억하는 사람들은 죄다 <사랑의 스튜디오> 얘기를 한다. 물론 그것도 벌써 9년 전이고-95년 1월 8일이니-아직까지 날 알아보는 사람은 그야말로 가물에 콩날 정도지만.
어찌되었건 내가 여의도를 들락거리던 그 시절, 길가에는 가끔 날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고, 심지어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 그들에게 말이 그려진 싸인을 해줬는데, 다들 얼마 안지나서 내 사인을 버렸을게다.
그땐 나랑 같이 있는 애들이 나보다 더 설쳤다. 누가 알아보는 낌새만 있으면 "얘 아시죠? 얘가 바로 그...." 이래가면서 날 선전했다. 워낙 내성적이고 조용히 술마시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럴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는데, 그럴수록 애들은 더 난리를 쳤다.
"얘가 바로....<사랑의 스튜디오> 보셨죠?"
한번은 부산의 <줄리아나>라는 나이트를 갔다. 그때 난 부킹이 뭔지를 처음 알았는데, 웨이터가 손님으로 온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와 우리 옆에 앉혔다. 내 친구놈의 말, "얘 아세요? 요즘 TV에 많이 나오잖아요" 하지만 여자들 중 날 알아본 애는 극소수고, 나머지는 "누군데요?" 하면서 멀뚱멀뚱. 사실 여자 쪽에서 "혹시 누구 아니세요"라고 했으면 "맞아요" 할 수는 있어도, 상대는 날 몰라보는데 우리 쪽에서 "나 몰라?"라고 우기는 건 진짜 말이 안된다. 언제나처럼 난 어디 숨을 곳 없나 싶었는데, 그 친구놈은 여자가 들어올 때마다 그 말을 반복했다. "얘 모르세요?"
당연히 짜증이 났다. 자기가 가진 그 무엇으로 여자를 꼬셔야지, 왜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나의 존재를 이용하려 한담? 친구가 스물세번째로 그 얘기를 반복했을 때-정력도 좋지-난 화가 폭발해서 나이트를 나와버렸다. 친구가 날 붙잡는다. "이왕 갈 거, 계산도 좀 해라"
그 말도 말이 안됐지만, 계산을 한 나도 말이 안되긴 마찬가지. 하여간 나이트를 나온 나는 광안리에 가서 혼자 술을 퍼마시곤, 비디오방에 들어가 아침까지 잠을 잤다. 일명 '부산의 악몽'이다.
하지만 요즘 난 그 친구의 마음을 이해한다. 내 친구인 표진인-TV에 잘 나오는 의사 있잖은가-과 있으면 가끔 싸인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고, 같이 사진을 찍자는 여자도 있다. 같이 술을 마실 때면 우리 테이블을 가리키며 "야, 쟤 xxx 아냐?"라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의 존재가 느껴지곤 한다. 당사자일 때와는 달리, 지금의 난 그런 눈길이 즐겁다. 그들에게 "얘 몰라요?"라고 말하고 싶어 죽겠다. 특히 이쁜 여자애들이 근처에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표진인과 난 차원이 다르다. 난 기껏해야 몇달 방송에 나갔을 뿐이지만, 표진인은 벌써 몇년째 방송에 출연 중이고, 스포츠신문에도 날 정도의 스타니까. 그래서 그런지 그와 있으면 굉장히 뿌듯하고, 다른 데 가서도 자랑을 한다.
"아, 표진인? 걔 내 친구야. 가끔 만나 술을 마시지"
유명인의 명성을 빌어 나를 높여 보자는 마음은 그러니까 인지상정인가보다. 그래서 난 과거에 날 열심히 팔았던 친구들을 지금은 이해한다. 불러주지도 않겠지만, 앞으로도 난 방송에 나갈 생각이 없다. 지금처럼 표진인의 명성에 빌붙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지. 혹시 아는가. 걔랑 같이 술을 마시다보면, 아리따운 여자애들이랑 합석이라도 할 수 있을지. 유명인이 되면 괴롭겠지만, 유명인 친구를 둔 사람은 행복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