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령 하나를 만났다. 군견들에게 동양안충이란 기생충이 많이 걸려있기에, 동양안충 일을 함에 있어서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일전에 촌지를 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도 노골적으로 촌지를 바라는 듯 보였고, 다방에 앉아 논문 사이에 돈봉투를 내밀었더니 아주 능숙하게 받더니 "잘 읽어보겠다"고 한다. 흥분할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란 게 촌지 없이 돌아간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군인들도 나름대로 어려운 게 많을테고.

언젠가 아버님을 입원시킬 때의 얘기다. 의사는 수술을 받으러 입원하라고 하는데 원무과에선 입원실이 없단다. "연락해 주겠다"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전화를 걸면 "입원실이 안났다"고 했다. 할수없이 원무과 직원에게 찾아가 30만원을 건넸다. 입원실은 그 즉시 났다.
그사람: 미스김, 10x5호 내줘!"
미스김: 그병동에 빈방 없다고 했쟎아요?
그사람: 방금 생겼어.

따지고보면 우리 나라는 촌지 공화국이다. 의사들은 물론이고 어느 직종이나 일이 잘되게 하기 위해선 촌지가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촌지를 당연하게 들어가는 비용 쯤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갖는 의문.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교사의 촌지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할까?

한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글쎄다. 과연 우리가 선생님들을 도덕적 존재라고 믿고 있을까. 고교 때까지 모범생이었던 나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그렇게 많지 않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우리 선생님들을 그리 존경하는 것 같진 않다. 은희경이 쓴 <마이너리그>를 봐도 교사들이 그리 긍정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고, 공지영 자신의 체험으로 추측되는 단편 <광기의 역사>는 읽는내내 전율을 느껴야 했다.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여고괴담>이나 <친구> 같은 영화에서도 교사들은 성희롱을 일삼거나 폭력에 물든 존재일 뿐이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도 별반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건,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선생님들 슬하에서 중고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도덕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이유로 교사의 촌지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들의 촌지는 괜챦다는 것일까? 공무원은 지켜야 할 도덕도 없나?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김종엽 씨가 쓴 책을 읽다가 풀렸다. 그의 말이다.

[다른 거래에서 촌지를 주지 않아 손해를 입게 된다면, 그 손해를 감수해야 할 사람은 바로 촌지를 주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것은 도덕적 자유의 행사 댓가이며, 자유인은 자유의 행사 대가를 스스로 부담하는 자이다. 그러나 교사와의 관계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촌지를 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그 손해는 바로 어린이의 인격, 자유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의 손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일종의 인질극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사람이며, 촌지는 몸값이 되는 것이다 (<시대유감>, 138쪽)]

어려운 환경에서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물을 흐리는 건 언제나 그 '일부'며, 그 '일부'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확대재생산한다. 어찌되었건, 내게 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없다는 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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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나서 나에게 정착된 두가지 경향이 있다. 첫번째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굉장히 힘들어졌기에, 기존에 있던 친구들을 유지, 보수, 관리하며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만나서 불편한 사람을 억지로 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불편한 자리에 나가 억지로 만든티가 역력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이제 그런 짓을 하기가 귀챦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때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봐야 하지만, 앞으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겠다는 얘기다.

두번째 원칙에 너무 충실해져서인지 최근 들어서 친구를 만나면 단점만 보이고, 그래서 안만나는 친구들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엊그제 얘기. 초등학교 때부터 만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야구를 보잔다. 20분쯤 고민하다 "간만에 연락했는데..."란 맘에 그러자고 했다. 두산이 안타를 4개인가 치고 7-0으로 지는 바람에 경기 자체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는데, 엘지팬인 내 친구 두명, 특히나 엘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친구 하나는 신이 났다. 날도 덥고해서 집에 가고픈 날 붙잡더니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다. 그러자고 했다. 간만에 만났으니깐.

술마시는 건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장소다. 이것들은 만나기만 하면 단란주점으로 날 끌고간다. 몇번 끌려가 봤지만 사실 난 단란주점에서는 어떠한 재미도 못느낀다. 돈 10만원에 여성이 두시간 동안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것도 영 맘이 불편하지만, 파트너로 나온 여자의 손도 안잡는 내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내가 손을 안잡는 건 그런 맘이 없어서가 아니라, 친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다). 정말 웃기는 건 계산을 할때다. 카드로 계산을 하면서 그 친구는 늘 이런다. "야, N분의 1이야" 머리숫자대로 똑같이 내잔 말이다. 난 그게 싫다. 싫다는 사람을 끌고 갔으면 지가 돈을 내던지 하지, 두시간 동안 우두커니 앉아 여자랑 몇마디 주고받고선 30만원씩 내라는 게 잘 용납이 안되었다.

그래서 난 언제나 단란주점 가는 것에 저항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숫자의 논리'에 밀려 말처럼 끌려갔다. 그런데 그날 역시 그 친구들이 X-point라는 아주 후진 단란주점에 가잔다. 이번엔 좀 세게 버티었다. 십분 가량 싸우다 결국 타협을 본 게, 자기가 아는 Bar에 가잔다. 그동네에도 맥주를 마실 곳은 많았지만 굳이 차를 타고 그 Bar로 갔다. 아주 귀여운 사이즈의 양주 한병, 그리고 과일안주 하나. 술을 끊은 난 양주 한잔만 받아놓고선 물만 마셨고, 노래도 가능한 곳인지라 친구들은 노래도 몇곡 했다. 좀 화려해 보이는 Bar라 만만치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36만원이 나온 계산서를 보곤 좀 놀랐다. 노래 5곡을 부른 게 5만원이라나. 친구의 말이다. "N분의 1이야!"

내가 12만원을 내야 한다는 얘긴데,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쓸 때도 물론 있지만 이번엔 왜이렇게 돈이 아까운지. 우아한 카페에 가서 맥주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십만원이 안될테고, 좀 덜 우아한 곳-내가 좋아하는 양재동 바라든지-에 가서 양주 두병을 마신다 해도 그렇게까지 나오진 않을 것이다. 아, 돈아까와....

돈도 돈이지만, 그들과 있는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면 같이있는 것만으로 편해야 할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 둘다 사업을 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업 얘기만 계속해 날 멍청하게 만든 것도 그렇고, 친구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어디론가 전화만 해 굉장히 심심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나도 아는 애한테 전화를 했다가 잠자는 걸 깨워버렸다. 아무리 이쁜 여자라 해도 자다 일어난 목소리-"여-보-쇼?"-는 과히 이쁘지 않으며,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물론 굉장히 미안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건 내가 "재는 원래 그런 애야"라면서 친구의 특성을 인정하고 그걸 기꺼이 감내해 왔던 데 있다 (참고로 그 친구의 별명이 '파쇼' 혹은 '장군'이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조금 올라가자 내 인내력이 많이 감소했고, 그래서 그 단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리라. 물론 나 자신도 그렇게 편한 인간이 아닐 것이며, 내 친구들 중에는 나의 그런 점을 알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참은 애들이 많을 것이다. 30세가 넘어서 "너 이런 게 나쁘니 고쳐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린 안맞아. 그러니 그만 만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깐.

편하기 짝이없는 친구 관계지만 그 관계를 잘 유지하는 건 이렇듯 어려운 일이다. 사소한 단점을 빌미로 인해 하나씩 하나씩 맘 속에서 지워 나간다면 내 주위에는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겠지. 친구의 단점을 보기보단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력을 키워 나가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막상 가슴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래서 갈수록 편협해지는 내 자신이 굉장히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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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1-23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정말 원문이 여기 있었군요?? 가르쳐주신 주소는 이게 아니라 딴게 연결되서 날짜로 찾으니 나오네요...아까는 왜 못찾았지?? ^^;; 고롬 이걸로 다시 퍼갈께요. 원문 위치 가르쳐주셔서 감사해요~~^^
 

 

 

 

 

'농담'은 쿤데라의 소설제목이다. 까뮈나 카프카에 주눅이 들어 유명소설가들의 책은 아예 안보는 나였지만 얼마 전 읽었던 쿤데라의 책이 너무도 재미있어, 그가 쓴 책을 다 샀고, '농담'은 그중 하나다. 거기 나온 얘기를 조금만 한다.

주인공(그냥 '루'라고 하자)은 농담을 잘못해 군대에 끌려가 탄광 일을 하게 되는데, 군대에 있으면 알다시피 정력이 뻗치지 않는가. 그런 루가 외박을 하다가 한여자를 알게 된다. 당연하게도 루는 그녀에게 한번 하자고 조른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주지 않고, 루는 그녀에게 "왜 처녀성에 집착하느냐. 한번 하자. 그건 좋은 거다"고 설득한다.

그러던 중 부대의 중대장이 바뀌었는데, 아주 악독한 인간이라 외출, 외박을 아예 못하게 해버린다. 루의 부대로 찾아와 철조망 너머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 루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외박이 금지되었쟎아. 그때 하잘 때 할껄 그랬지!"
그녀는 그때의 일을 무지하게 후회한다고 말한다. 다시금 땡기는 루, 사람들을 돈으로 구워삶아, 인근 주민의 집을 빌리고, 거기서 한번 하기로 한다. 그거 한번 하려고 루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고, 적쟎은 돈을 써야했다. 철조망을 통과해 그녀를 만난 루, 키스를 조금 하고 본격적으로 하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는 또 거부한다!

달래보기도 하고, 내가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룬 줄 아느냐고 협박도 하고 해서 다시 하려는데 또 거부. 결국 그는 강제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 한다. 브라자를 찢자 아주 격렬하게 저항하는 그녀, 죽어도 못준단다. 화가난 루는 결국 그녀의 따귀를 때렸고, 당장 가버리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녀는 울면서 나가고, 허탈해진 루는 부대로 복귀했는데, 분노에 휩싸여 잠을 설친다.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에 편지를 보내 보지만, 답장이 없다. 나중에 무단이탈을 해서 찾아가보니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었고, 그 이탈로 인해 그는 열달간 영창에 가야했다.


루에게서 충격을 받은 그녀는 어찌어찌하다 루의 친구를 만나는데, 그 친구는 그녀로부터 그녀가 어릴 적 나쁜 애들한테 집단으로 성폭행을, 그것도 상습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친구는 그녀를 달래 성에 대한 왜곡된 마음을 풀어주고, 그녀랑 한다. 근데 그 친구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고....어찌고 저찌고...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햇볕정책 생각이 난다. 강제로 하려던 루가 실패한 반면, 따뜻하게 대해주며 때를 기다린 친구는 성공했쟎는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닌 햇볕인 걸까. 중요한 건, 여자를 성적 욕구의 충족만을 위해 이용하면 안된다는 것. 자기는 하고 싶어도 여자가 싫다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잘나가던 루가 군대로 끌려간 건 물론 농담 때문이었는데, 그 사건의 주심을 맡았던 건 자신의 절친한 친구. 루는 안심하지만, 그 친구는 루를 파렴치범으로 만들면서 루를 군대로 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그뒤부터 루는 그 친구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히는데-당연하다-어느날 만난 라디오 기자(헬레나)가 알고보니 그 친구의 부인이다. 루는 감미로운 말로 권태기에 이르렀을 중년의 헬레나를 꼬시는데 성공, 거하게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둘은 별거중이었고, 친구는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애인이 있는 것. 즉, 친구가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니 그 부인이랑 하는 건 전혀 복수가 아니다.

오히려 길가에서 루를 만난 그 친구는 아내로부터 둘이 했단 소리를 듣더니 "둘이 잘해봐라. 헬레나는 좋은 여자다"면서 아름다운 20대 애인과 걸어간다.

아주 당연하게도 루는 다시한번 하자고 졸라대는 헬레나한테 이렇게 말한다.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우린 끝이야" 침통해진 헬레나는 "난 이제 세상을 하직한다. 루, 잘먹고 잘살아라"는 편지를 쓴 뒤 카메라 기자를 시켜 루에게 전달한다. 편지를 읽은 루, 자리에서 일어나 헬레나를 찾아나서는데, 방송국 건물을 다 뒤져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곳은 화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갔더니 그녀가 치마를 걷고 변기에 앉아있다. "뭐에요!!"

알고보니 그녀는 카메라기자의 주머니에 든 진통제를 통째로 먹었는데, 카메라 기자는 변비환자였다. 그런데 변비라고 하면 창피하니깐 진통제 약병에다 변비약을 넣어 두었으니 그걸 원샷한 헬레나가 설사를 엄청나게 할 껀 당연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
1) 변비를 부끄럽게 생각한 카메라기자의 재치가 헬레나를 살렸다.
2) 어떤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건드리는 건 복수가 아니다.
3) 맘만 먹으면 여자를 꼬실 수 있는 루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중년의 여성은 언제나 위험하다. 참고로 헬레나의 나이는 35살로 나온다.
4) 변비약을 먹으면 설사를 한다.
5) 친구한테 해꼬지를 당할지 모르니 원한 살 일은 절대 하지 말자. 특히나 친구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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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7-1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님, 문학에 관한 제 역량은 별로 보잘 것이 없습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정신을 이해할 수 없기에, 전 그저 주변적인 얘기를 끄적끄적 리뷰로 쓰고 있지요. 사실 리뷰라고 하기도 뭐합니다^^ 하여간 제가 쓰려는 리뷰는 그런 것이구요, <농담>은 제가 쓴 것 중 가장 맘에 드는 리뷰이니, 말 다했죠^^
 

 

 

 

간혹 말이라는 게 머리보다는 입술에서 나온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 천연덕스럽게 말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내가 내 말이 웃겨서 웃는 건 바로 그럴 때다.

이번 학기 첫 수업을 마치고 나서 애들한테 질문있으면 하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사실 질문이 나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답변을 못하는 어려운 질문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다른 학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모른다는 말을 하기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질문을 할 듯한 자세를 취하는 거다. 난 잽싸게 마이크에 입을 갖다댔다. 내가 했던 말을 여기다 옮긴다.

[질문에는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바로 현학적 질문이죠. 즉, '난 이런 것도 안다. 넌 모르지?'라는 식의 질문을 말하지요. 두번째가 공격용 질문인데, '너 한번 죽어봐라'는 식으로 상대의 사소한 실수나 약점을 파고들어갑니다. 세번째가 궁금형으로,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묻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칠판에 '기타'라고 썼다. [네번째가 바로 이겁니다. 즉, 연자의 발표내용에 무관하게 주변적인 걸 묻는 거죠. 예를 들면 "자네 부모님은 안녕하신가?"라고 묻는다든지]

애들이 굉장히 감동한 것 같아 난 말을 계속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자들의 61%가 현학적 질문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즉, 잘난체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거죠. 공격용 질문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질문이란 서로의 학문세계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걸 의미하며, 따라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어야 하는 거죠. 세번째 유형, 즉 궁금형이야말로 질문의 꽃입니다. 하지만 이건 '나만 모르는 게 아닐까? 섣불리 했다가 무식하다고 놀리면 어쩌지?'라는 불안감 때문에 실제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학회에 입문한지 십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번도 질문을 하지 못한 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의 조사라는 건 사실 뻥이다. 그런 여론조사 기관이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네번째 유형의 경우는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요. 그저 아무 말이나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섣불리 그런 질문을 했다간 작살납니다. 그런 건 최소한 50세가 넘어야 할 수 있답니다. 저도 그런 질문을 하려면 15년을 기다려야 하지요]

애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심지어 필기를 하는 애도 있었다. 내 얘기를 적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질문 하세요. 단, 질문을 할 때 어떤 유형인지 미리 밝히고 해주시길 바랍니다"
단 한명도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난 내친김에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해 줬다.

[어떤 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강의만 끝나면 열나게 뛰어가냐고. 그땐 허허 웃으면서 운동삼아서 그런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질문을 할까봐 그렇습니다. 내가 잘 모른다고 하면 그학생이 '실력없다!'고 소문낼 게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은 제가 강의 후 열심히 뛰는데 한 학생이 따라오는 겁니다. 겁이 났지요. 그래서 더 빨리 뛰었지만 결국 따라잡히고 말았습니다. 모든 게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그학생이 숨을 헐떡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 레이져 포인터 놓고 가셨어요"]

첫 수업을 이렇게 마쳤을 때,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그 후 종강을 할 때까지, 내게 질문을 한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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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7-14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LPGA에서 활약하는 베스 바우어는 만 세살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세살이면 골프채보다도 키가 작을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22살밖에 안되었는지라 이렇게 말하는 게 좀 이를지 몰라도, 프로데뷔 이래 그녀는 아직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3살 때부터 골프를 쳤다고 무조건 신동은 아니다.

통산 37승을 거두며 명예의 전당에 이미 이름을 건 애니카 소랜스탐은 12살에 골프를 시작했다. 호주의 미녀스타 캐리 웹은 8살 때, 이들과 같이'빅3'로 불리는 박세리는 14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골프계에 입문했다. 박지은은 8살, 김미현은 11살에 데뷔. 그러니까 대부분의 유명선수들은 10살을 전후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럼 타이거 우즈는 어땠을까?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우즈는 아버지가 공을 치는 걸 보고 그의 스윙을 흉내냈다. 2살 때는 마이크 더글라스 쇼에 출연해 퍼팅을 선보였고, 3살 때 9홀을 도는 동안 48타를 쳤다. 그는 8세 때부터 주니어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으며, 16세 때 프로 투어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3살 때 9홀 48타라는 건 도저히 못믿을 일이긴 해도, 프로입문 이래 6년만에 무려 33승을 거두는 등 각종 기록을 세우고 있는 그를 보면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다. 신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을 잔인하게 파괴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선수들이 타이거 우즈를 견제한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 그가 없었다면 수차례 우승을 거머쥐었을 어니 엘스나 필 미켈슨은 그런 천재와 동시대에 태어난 것을 원망할 수밖에.

아나운서는 돈을 그리 적게 버는 직업이 아니다. 스타 아나운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스타 중 하나인 김동건 아나운서는 내내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의 아들이 골프선수였기 때문. 우리 나라에서는 골프가 그리 만만한 스포츠가 아니쟎는가.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김주헌은 그다지 두각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데, 아무리 골프가 40이 넘은 나이까지 칠 수 있다는 걸 감안해도 김동건이 살아생전 빛을 볼 것 같지는 않다.

생후 6개월밖에 안된 애한테 골프를 가르친다고 해서 아무나 타이거 우즈가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소질이 있는 걸 간파하고 거기 맞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부모들은 곧잘 자신의 자녀로부터 천재성을 발견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어린 나이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게 붐을 이룬다. 어떤 친구는 한달에 90만원짜리 영어유치원을 보낸다고 하는데, 일년이면 천만원, 와,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영어를 구사하는데 조금 유리하긴 하겠지만, 그게 꼭 좋은 일일까? 영어를 잘하게 되는 대신 그 혹은 그녀가 잃는 건 없을까?

한 분야에 집착하는 건 필연적으로 다른 분야에서 갖고 있는 재능을 희생시킨다. 어쩌면 우리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 줄 예술인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이거 우즈같은 천재를 제외하면, 뭐든지 열살 때부터 시작해도 크게 늦은 건 아니다. 영어유치원이 붐을 이루는 현상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했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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