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일상 생활에서 영어를 쓰는 일이 제법 있다. 영어로 된 논문을 읽고, 영어로 논문을 쓴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다. 문학작품과는 달리 영어논문은 대부분 쉬우니까. 모르는 단어도 별로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논문의 독해에는 별 지장이 없다.

문제는 영어 논문을 쓸 때다. 이때 나의 빈약한 영어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출판이 된 논문들을 잔뜩 쥐고 앉아서, 비슷한 표현을 베끼거나 통째로 인용을 하면 되니까. 전혀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할 때는 한영사전을 찾아가면서 낑낑대다보면 그럴듯한 문장이 된다. 내가 보기에 그럴듯 하다는 거지, 외국인이 본다면 어떻게 저런 말도 안되는 문장을 썼을까 의아할거다. 그래서 내가 쓴 논문은 어디선가 베껴온 좋은 영어와 내가 억지로 만든 나쁜 영어가 혼재되어 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완성된 논문을 다른 사람에게 리뷰를 보낼 때 일어난다. 우리 학계는 바닥이 워낙 좁아서 보낼 사람이 한정되어 있어, 예컨대 내가 회충에 관해 논문을 쓰면 회충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리뷰가 갈 수밖에 없다. 회충에 관한 논문을 쓸 때는 주로 그 사람이 쓴 논문을 인용하는 수가 많다. 그런데, 분명히 난 그 사람의 표현을 베꼈는데, 마음에 안드는지 고치는 대목이 너무도 많다는 거다. 그 사람이 "2만마리의 황소 중에서"를 "Out of 20000 cows"라고 써서 그대로 쓰면 꼭 "Of the 20000 cows" 이런 식으로 고쳐 놓는다. 자신이 그렇게 썼으면서, 이건 자신을 부정하는 거 아닌가? 외국 사람이 쓴 표현을 인용했는데, 그걸 고치는 대목은 더더욱 엽기적이다. 그가 영어를 나보다 잘하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외국 사람보다 더 잘하지는 않는데 어떻게 그걸 고칠 수가 있을까?

곰곰히 심리분석을 해본 결과 이런 결론을 얻었다. 꼭 맞진 않겠지만, 그는 그 논문의 저자가 나라는 걸 아는 이상, 그리고 내가 영어를 무진장 못하는 걸 아는 이상, 내가 쓴 모든 표현을 부정하고 싶은거다. 좀더 쉽게 설명을 하자면 이런거다. 어떤 그림을 봤을 때, 그게 초등학교 2학년 애가 그린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럼 난 이런다. "이게 그림이야?" 그리고 어딘가에 쳐박아 둔다. 그런데 잠시 후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그게...글쎄 피카소가 그린 거래!"라고 말하면 화들짝 놀라면서 쳐박아둔 그림을 다시 펼친다. 그리고는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나중엔 이렇게 말한다. "역시 대가는 달라!"라고. 잠시 뒤 아까 그 누군가가 뛰어온다. "초등학교 2학년 애가 그린 게 맞고, 그애의 장래희망이 피카소래"  그 말을 듣고난 나는 그 그림을 북북 찢어버리고, 잠시나마 농락당한 것에 화를 낸다. 내가 이러는 것처럼, 리뷰어들도 내가 쓴 논문이려니 하고서는 마구 고치는 것이리라. 장동건이 입은 바바리는 멋있지만 내가 입은 바바리는 짜가 같이 보이듯이, 자신이 썼던 논문에서 베껴온 표현도 내 논문 속에 있으니 후져 보이는 것이다.

그럼 해결책은 있을까? 없다. 딱 한가지 있다면, 내가 빨리 대가가 되는 것. 그럴 확률은 거의 없으니, 그냥 이렇게 살 수밖에. 내가 쓴 논문이 더이상 쓸 곳도 없을만큼 빨갛게 난도질당해 오는 광경은 분명 슬프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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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2011-05-2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교수분들도 저랑 비슷한 수법 쓰시네요 저도 영작할때 검색해보고 단어만 바꿔서 뱃긴 적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