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놈의 강의준비 때문에 수요일날 또 2박3일치 짐을 싸가지고 이곳에 왔다. 오늘은 사흘째, 집에 가는 날이다. 하지만 일이 덜 끝나 몇시나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엔 길다란 소파가 너무도 불편했다. 하루를 소파에서 자면 그 다음날엔 모텔에 가야 했던 것도 그런 까닭, 하지만 이 생활도 서서히 적응이 되어 가는지 이젠 소파에서 자도 하나도 안피곤하다. 어제 역시 세시부터인가 자기 시작해 일곱시 반까지 한번도 안깨고 잘 잤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이곳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 밤 8시를 넘으면 문을 잠궈놓고 반바지에 면티 차림으로 사니 편하긴 하다. 단점도 있다. 집에서 강의준비를 못하는 이유는 참고문헌 같은 걸 다 싸가지고 가질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집에만 가면 마음이 해이해져 공부를 할 수 없어서였다. 집에 가면 엄마가 계시고 TV가 있지 않는가. 그런데 여기서 죽치고 살다 보니 이곳에서도 서서히 긴장이 풀어진다. 할 일을 일찍 끝내고 일찍 자거나 집에 가면 좋으련만, 공부 한시간 하고 나면 꼭 딴짓을 한다. 지난번에는 어느 미녀가 제보해 준 개그프로 ‘사모님’을 동영상으로 다 보느라 한시간여를 썼고, 내친김에 역시 그분이 추천한 ‘명품남녀’까지 봤다. 어제는 개콘에서 새로 방영하는 ‘뮤지컬’을 감동적으로 봤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뮤지컬’에 나오는 유민상이 이름을 알린 ‘마른인간 연구’를 KBS 사이트에 가서 보기도 했다 (그 프로는 정말 볼만한 개그다).
사정이 이러니 세시까지 안잤다고 해도 효율성은 그리 높지 않다. 제대로 되었다면 오늘밤엔 집에 가서 편히 잘 수 있었겠지만, 낭비하는 시간이 워낙 많다보니 자칫하면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야 할 판이다. 딴짓을 하는 게 꼭 나 자신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제 같은 경우 난데없는 강의로 오전을 날렸고, 오후 5시부터는 길고도 지리한 회의로 두시간을 허비했다. 회의 때 여간해서는 말을 안하는 난 사람들 몰래 리포트 채점을 했는데, 두시간 후 위원장이 내게 발언 기회를 준다.
“시간이 없으니까 마태우스 선생이 2분간만 예과의 커리큘럼에 대해 말해보세요”
30초만 썼다.
“커리큘럼은 훌륭하죠. 그대로만 되면 좋은 의사 됩니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들이 너무 교육에 관심이 없는 게 문제죠.”
회의실에서 나오면서 내가 왜 2주 연속 그곳에 가 있는지 머리를 갸웃거려야 했다.
오늘 C 선생이 날 찾아왔다. 미이라 문제로 얘기를 하다가 그가 갑자기 이런다.
“피곤해 보이는데 여기서 잤나요?”
그렇다고 대답한 후 지금은 적응이 돼서 여기서 숙식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그럼 사람이 팍삭 늙지요. 제가 제주도에 있을 때 선생님처럼 살았어요. 그래서 지금 제 나이보다 대여섯살 많게 보이잖습니까.”
약간 젊어 보이는 게 내 유일한 장점인데 팍삭 늙는다니! 미녀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 끝이란 생각이 들자 갑자기 풀어졌던 마음이 바짝 조여진다. 이 글만 올리고 이제부터 열심 모드다! 오늘부턴 기필코 집에서 편안한 잠을 청하리라. 미녀와의 즐거운 한때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