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일, 난 여전히 학교다. 일을 하다가 내가 바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역시 강의준비가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한번도 가르쳐 보지 않은 ‘유전학’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7월부터 준비를 했다 해도. 게다가 세 시간의 실습도 책임져야 한다. 학생들에게 실습을 하게 하는 대신, 난 그 시간에 유전학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려 한다. 그걸 준비하는 것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내 전공과목인 기생충학이 이번 학기에 있다. 비교해부학 실습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강의만 생각해도 솔직히 좀, 난감하다.
새로 바뀐 위원회 명단이 날아왔다. 대충 훑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우리 학교에는 17개의 위원회가 있으며, 활동이 거의 없는 위원회를 제외한다면 대략 열 개 정도가 된다. 그 열 개에 내가 모두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이번 주 같은 경우,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목요일에도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
실험을 좀 하긴 해야 한다. 모 대학에 있는 친구와 같이 하는데, 그 친구는 내가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불만인 듯하다. 심복은, 난 별로 안하고 자기만 시킨다고 안 좋아한다. 그들에게 늘 “미안해” 소리를 달고 산다.
지난주 초, 학생 대표가 찾아왔다.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간 축제를 하는데, 거기 좀 참여해 달라고. 그리고 목요일 개막할 때 인사말을 해 달란다. 그날은 서울서 일이 있었기에 안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금요일날 다시 와서는 “오늘이라도 인사말을 해달라”고 한다.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유머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에 한시간 전부터 연습을 좀 했다.
“학생 때는 옛날 얘기를 하는 선생을 싫어했는데요, 나이 들어 보니까 옛날 얘기밖에 할 얘기가 없네요. 우리 때 축제는 어쩌고저쩌고...”
나름 연습해서 갔는데, 인사말을 시키려는 기색이 전혀 없고 애들은 주점을 차려놓고 술만 마신다. 잘됐다 싶어서 애들 틈에 끼여앉아 술과 안주를 사줬다 (맥주 한병에 3천원....ㅠㅠ). 사줘야 할 애들이 많다보니 중간에 슬쩍 나가 돈을 더 찾아와야 했다. 하지만 난 학생들이 권하는 술은 한잔도 먹지 않았는데, 왜 그러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 오늘 공부해야 해!”
진짜로 난, 한잔 정도만 마시고 연구실에 들어와 개미같이 일했....다(페이퍼를 두 개 썼지만). 그래도 인사말 못한 게 조금은 아쉽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 셋째 고모가 몸이 좀 편찮으신데 입원실이 없다고 해서 그걸 해결하느라(물론 해결이 안됐다), 그 후부턴 문안을 드리느라 신경을 좀 썼다. 최근엔 엄마 지인이 뺑소니를 당했는데, 엄마가 이렇게 말했단다.
“아는 변호사를 써야 해. 우리 아들이 발이 넓으니 얼마든지 소개해 줄거야.”
사실을 말하면 난 부탁을 할 수 있는 변호사가 딱 하나 있는데, 그나마 기업 담당이다.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의 마음은 알겠지만, 바빠 죽겠는데 그런 것까지 시키는 엄마가 그땐 원망스러웠다.
무슨무슨 위원회 공금 통장을 내가 갖고 있는데, 교학과에서 사본을 제출하란다. 복사한다고 이리저리 다니다보니 현금카드(직불겸용)를 잃어버렸다. 그것 찾느라 한시간을 투자했지만, 결국 못찾았다. 예금주인 모 선생에게 가서 사실대로 말했더니 “괜찮아. 돈도 얼마 없는데”라고 한다. 그렇구나 싶어 가만 있었는데, 오늘 회의 때 갑자기 “카드 찾았어?”라고 묻는다. 못찾았다고 했더니 “그럼 왜 정지를 안했냐?”고 질책한다. ㅠㅠ
주민번호 알아가지고 내 방에 와서 정지를 시켰다. 친구 하나는 추석 연휴 때 외국에 간다는데, 난 그때 밀린 강의준비를 다 할 생각이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게 워낙 많아서, 늘 분에 넘치는 즐거운 생활을 해 왔다. 지금 좀 바쁘다고 해서 그런 생각이 바뀌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자꾸 술 생각이 나고, 오늘도 자기 전에 고추참치-요즘 안주를 바꿨다-에 소주를 한 병쯤 마시고 싶어 죽겠다. 이런 내가 알코올 중독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