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날 아침, 어느 분이 제게 문자를 보내주셨어요.

“오늘 너무 술 많이 마시지 마세요.”

그분은 제가 선거결과에 좌절해 술을 마실 것을 걱정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전 그만큼 열린우리당에 애착이 없습니다. 게다가 한나라당의 압승은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게 아닌가요. 생각해보니 전 선거 결과가 속상해 술을 마신 적이 없습니다. 전 그래요. 늘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니, 원하는 결과가 안나오면 당연한 거고, 제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기쁜 거죠. 제가 선거날 술을 마신 적은 딱 두 번입니다. 2002년 대선 때, 그리고 2004년 총선 때. 모두 기뻐서 마신 술이랍니다.


투표란 건 원하는 후보에게, 아니면 가장 덜 나쁘게 생각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일인 일표니 유권자가 할 일은 그거밖에 없지 않나요. 다른 사람도 자기 생각이 있을테니 “왜 넌 이 사람을 지지하지 않냐?”고 탓할 일도 아닙니다. 한나라당이 압승을 했다면 그건 그 당이 많은 사람에게 어필했거나, 아니면 집권당이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탓이겠지요.


투표당일 저와 어머님은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섰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더군요. 전 1번에 4개, 4번에 2개를 찍었습니다. 1번을 찍는 느낌이 참 묘합디다. 87년 헌법을 직선제로 바꾸는 투표가 제 첫 투표였는데요, 그때 1번을 찍은 이후 이십년 만인가봐요. 투표장에 가면서 엄마에게 말했죠. “엄마, 오늘 투표 여섯번 해야 하는 거 아세요?”

엄마는 깜짝 놀라십니다. “진짜? 강금실만 찍는 거 아냐?”

“참 엄마도. 지방선거 한두번 해봐요?”

선거 후 엄마는 전부 1번을 찍었다고 자랑하십니다. 지역적인 이유가 크겠지만 저한테 세뇌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누나와 여동생은 엄마한테 이래요. “엄마, 민이 말 듣고 노무현 찍어서 세금만 많이 내잖아? 엄마도 이제 한나라당 찍어!”

계급적으로 봤을 땐 그게 더 타당할지 모르지만,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그 후신인 한나라당을 찍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당시 대학생들은 집권당이던 민정당을 원수 보듯이 했었지요. 하지만 그걸 직접 체험하지 않은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게 창사랑에, 박사모에 가입합니다. 일부는 그런 걸 보면서 혀를 끌끌 차지만, ‘대학=진보’의 등식을 더 이상 기대한다면 마음만 다칠 것 같네요. 열린우리당이 진보의 이미지를 차용해 훼손시켜 버린 지금은 더더욱 그렇죠.


투표가 끝난 후 할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경비 아저씨한테 투표소를 물어보고, 할머니를 모시고 투표장으로 향했지요.

나: 할머니, 오늘 투표 여섯 번 해야 해요.

할머니(귀가 잘 안들리시죠): 으메, 여섯명이나 나온다냐?

나: 그게 아니고 투표를 여섯 번 해야 한다고요.

할머니: 아, 6번 찍으라고.

나: 하여간 전부 1번 찍으세요, 아셨죠?

투표장에 가서 할머니 주민증을 내미니 다들 놀랍니다. ‘17’로 시작하는 주민번호가 어디 흔하나요. 게다가 저희 할머닌 이십년은 젊어 보이거든요. 투표지 세장을 손에 든 할머니께 말씀드렸어요.

“이거 세장이거든요. 여기다 모두 투표를 해야 해요.”

기표소에 들어간 할머니가 다시금 얼굴을 내밉니다. 그리곤 말씀하셨어요.

“전부 일번이쟈?”

전 너무 놀라서 도망갔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선거할 때 그러면 선거법 위반 아닌가요. 출구에서 기다렸다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투표 잘 했어요?”

“오냐, 잘 했다. 혹시라도 틀릴까봐 오래 걸렸다.”

투표율은 50%를 겨우 넘었지만, 저희 가족 세명은 모두 투표를 마쳤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해서 뿌듯한 하루였습니다.

 

* 참, 저 오늘 학생들이랑 제주도 가요. 전 1박2일만 하고 낼 올라올거구요, 저녁에 술 사주러 가는 거예요. 낼 뵈요!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06-06-0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뿌듯하더라고요

아영엄마 2006-06-0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딸냄이에게 등 떠밀려서 투표하고 왔는데 아그들이 같이 따라 들어와서는 엄마, 이사람 찍어요, 저사람 찍을거예요? 하고 주위에 들리게 말하는 바람에 민망했슴다~ ^^;

울보 2006-06-0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승패야 어찌되었든 우리집도 투표다 했습니다,
음 제주도 잘다녀오세요 제주까지 술을 드시러,,

물만두 2006-06-0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바람돌이 2006-06-0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리 아이들과 같이 투표를....
기표는 제가 하고요. 투표함에 넣는거 애들이 해보고 싶다고 난리를 부려서 애들이 투표함에 넣고.... ^^

Mephistopheles 2006-06-0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표는 했습니다만...전 이번 투표가 웬지 역사는 반복된다는 느낌이
자꾸 드네요..^^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마태님..)

가을산 2006-06-01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학생들이랑! 술 조심하세요. 살아 돌아오세요....

soyo12 2006-06-0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드시고 오세요.^.~

클리오 2006-06-0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이랑 술이라.. 지난 번 타격은 라면만 먹으면서 다 해결되셨나요? ^^ 잘 다녀오세요..

해적오리 2006-06-0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투표내용이 같으시군요..ㅋㅋㅋ
전 제 동생한테 등떠밀려 투표하거 갔었지요.

그나저나 지난번 조개구이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술사주러 가시는군요..

sweetmagic 2006-06-0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은 언제 마셔요 ?????????????

기인 2006-06-0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선거결과를 보니, 그러지 않을거라고 했는데도, 너무 씁쓸하네요. 제가 속한 지역 관악구-신림동 모든 광역, 기초 단체장, 광역, 기초 의원이 한나라당 싹쓸이 됬습니다. 그래도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어느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낙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종철 후보 3%의 지지율이더라고요. 저는 오늘 술 마시러 갑니다 ㅜㅠ 아, 그 합정역 근처 황소곱창 full name ^^; 알려주세요. 합정역 근처로 검색하니 4개나 검색되던데요;;;; 마태우스님 말듣고 꼭 한번 가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니면 다음주 목요일에 가려고요 ^^;

그리고 안 그래도 요즘 학부친구들 -_-;;; 학생회장은 무슨 이상한 빠찡코 회사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이 당선이 되고 말이 많네요. 탄핵은 또 처리가 안 될 것 같고.
반운동권 연대라는 것이 무서워요. 운동권(또는 진보세력)에 대한 거부감은 역시 '일부' 그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 마태우스님과 매너리스트 님의 토론에도 제가 언급했지만, 일종의 우월적 계몽적 태도의 폭력성이라 할까요...
사실 자신의 생각이 확고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는 토론이 아니라, 설득이나 계몽이지요. 그리고 이는 일방적인 동일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거부감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구권 붕괴 후, 포스트모던 시기, 스스로 길을 못 찾고 있으면서도, 남에게는 확고한 논리를 주장함에 따라 먹혀 들지 않아서 더욱 강고하게 되는 악순환 같습니다... 저도 '맨날 자기 말만 다 맞대'라는 등의 소리를 조금 들어서요;;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 요즘 세상 사는게 힘드네요 쩝..

chika 2006-06-0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마시기 딱 좋은 날씨, 입니다. ;;;;;;

마늘빵 2006-06-0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제주도 못가봤는데.

히피드림~ 2006-06-02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참 정정하시네요. 보통때 자주 할머니 얘길 하시길래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 궁금했는데, ㅎㅎ 제주도 잘 다녀오세요.

2006-06-0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6-06-0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어요. 맘착한 마태우스님 ^^

모1 2006-06-02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거법위반이라 생각해서 도망(?)까지 가시다니..후후...

마태우스 2006-06-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투표장에서 그런 말 하면 안되잖아요^^
달밤님/뭘요 달밤님에 비하면...^^
속삭이신 분/님 방명록에 글 남겼어요
펑크님/아흔살.... 아직 정정하셔서 다행입니다만, 간혹 '나이든 게 저렇구나' 싶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아프님/아무리 생각해도 어딜 가는 것보단,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치카님/전 날씨에 무관하게 술마십니다. 아, 근데 제주도까지 갔는데 치카님한테 연락도 못했네요. 죄송
기인님/아니 저렇게 길고도 멋진 댓글을 남겨주시다니요. 다이어트하랴 박사시험 보랴 바쁘실텐데도....황소곱창 풀네임은 그냥 황소곱창이구요, 원래 합정역 8번출구 옆에 있었는데 아래쪽으로 옮겼어요. 멋진 건물을 사가지고 갔는데, 거기서도 역시 황소곱창입니다. 유사품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 같은 이름의 그저그런 곱창집이 여러개 있다는 사실....계몽에 관해서는 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매, 매직님/늘 매직님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 믿죠?
해적님/이번 일로 인해 신불자가 된 게 아닌가 싶어요...ㅠㅠ
클리오님/라면을 좀 먹었지만 아직 회복이 안됐습니다....설상가상이죠...
소요님/님 덕분에 잘 다녀 왔다는...^^
가을산님/1차만 하고 맥주는 안마신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왔어요^^




마태우스 2006-06-0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그죠? 저도 가끔 역사가 반복된단 생각을 해요. 하지만 크게 보면, 갈지자로 갈 지라도 진보 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거겠죠..
바람돌이님/오오 그러셨군요. 애들에게 좋은 민주주의 교육이 되지 않았을까요
물만두님/만두님의 숭고한 뜻을 할머님께 전해드릴께요
울보님/맞아요 승패는 우리 손을 떠난 거구, 우린 그저 소신껏 찍으면 되는 거지요... 낮은 득표율도 의미가 있을 거구요...
아영엄마님/호호 애들이란...^^ 근데 어릴 적에 투표하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배웠는데, 사실 주위 사람들을 보면 누굴 찍을지 다 알겠더이다.
하늘바람님/전 투표 안하면 굉장히 마음이불편해요. 몸이 엄청 아팠던 날, 오후 다섯시에 투표한 걸 빼곤 늘 오전에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