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27일 밤 9시 25분, 난 양재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 비비 꼬고, 얼굴은 창백한 채로. “때르릉” 소리와 함께 전철이 도착한다는 알림 방송이 나온다. 혹시나 하고 고개를 내밀어 봤지만, 이번에도 역시 반대편 전철이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삶이란 왜 이리도 힘든 걸까.
토요일부터 날 괴롭히던 피로는 월요일이 되어도 가시지 않았다. 난 시종 ‘아이고 피곤해’를 연발하며 하루를 보냈다. 춘곤증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난주 무리한 게 쌓인 탓이라는 진단이 더 정확할 것이다. 때문에 난 2주일쯤 전에 했던 약속이 취소되기만을 바랐다. 미국에 살던 유부녀 친구가 한국에 왔다고, 한번 얼굴이나 보자고 했던 게 휴대폰 스케줄에 남아 있었던 것. 너무 오래된 약속은 확인전화가 없으면 취소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 게다가 우리는 만날 시각도 정하지 않은 터였잖은가. 오후 5시까지도 연락이 없기에 쾌재를 불렀는데, 5시 10분에 출발하는 퇴근버스가 떠난 지 30분 후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출발했어?”
난 6시 10분 퇴근버스를 타고 양재동으로 향했고, 오늘 따라 하나도 안밀린 버스는 날 7시 반에 내려 줬다. 그녀와 자주 가던 삼겹살집에 가니 그녀는 예쁘게 생긴 아들과 더불어 삼겹살 2인분과 냉면을 이미 다 먹은 뒤였다.
“우리 애가 배고프다 그래서... 난 기다려고 했는데.”
난 추가로 2인분을 시켰다. 허기가 진 탓에 개눈 감추듯 2인분을 먹어 치웠고, 맛있기로 정평이 난 냉면도 후루룩 먹어버렸다. 레드망고에 갔을 때, 신호가 왔다 (참고로 난 위-대장 반사 환자다). 레드망고 화장실에 가서 노크를 했더니 남자 하나가 대답을 한다.
“네--”
별 희한한 사람 다 봤다고 생각하고 다시금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참았다. 잠시 후, 난 그녀를 위해 택시를 잡아주고 양재역 화장실로 갔다 (양재역은 화장실이 개찰구 안에 있다). 내 조금 앞에 어기적거리며 걷는 젊은 애가 있었다. 추월해 갈까 고민하다 뒤를 따라 갔다. 괜히 그랬다. 그는, 화장실에 있는 방 세 개 중 유일하게 빈 곳으로 들어갔다. 이마에서 땀이 났다. 남부터미널 화장실이 한산하고 깨끗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지하철을 타러 플랫폼으로 달렸다. 전철은 오지 않았고, 조금 있으니 반대편 전철만 온다. 점점 서있기가 힘들어졌다. 다시금 난 양재역 화장실로 뛰어갔다. 한곳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거기 섰다. 1분쯤 후 옷입는 소리가 들린다. 내 가슴은 희망에 부풀었다. 다시금 물 내리는 소리가 난다.
‘얘는 왜 이렇게 안나와?’ 하는 중얼거림을 다섯 번쯤 할 무렵, 문이 열리고 아까 봤던 그 젊은애가 나왔다. 잽싸게 들어가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 자식이 화장실 바닥에 잔뜩 오버이트를 해놓은 것. 아무리 급해도 거기서 일을 볼 수는 없었다. 그 자식은, 어기적거리며 세면대로 가더니 입 주위를 씻는다. 나머지 두 방의 임자는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한다. 도라도 닦는 건가. 인간의 고통 중 극한치를 10이라고 한다면, 난 9.8에 달해 있었다. 남부터미널로 가기로 하고 플랫폼으로 뛰었다. 전철은 올 생각을 안했다. 시각을 봤더니 9시 25분이었다.
결국 전철은 왔다. 남부터미널까지의 2분을 난 잘도 참아냈고, 다음 역에서 내렸다. 화장실 145미터라는 표지판을 보고나니 쓰러질 것 같았다. 걷기에는 긴 거리였지만 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아장아장 걸었다. 화장실 표지판이 보였다. 한발한발 걸음을 걷는데 전화가 온다. 엄마다.
“밥 차려 놨는데 안오냐?”
“나 지금 너무 힘들거든. 나중에 해.”
“왜? 무슨 일 있냐? 민아! 민아?”
전화를 끊어버렸다. 두려웠다. 여기도 사람이 꽉 차있을까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전철 선로로 내려가 일을 봐버릴까. 안돼. 그럼 CCTV에 찍혀 내일 아침 뉴스에 날지도 몰라.
“40대 남자가 전철 선로에 큰일을 보고 달아났습니다. 경찰은 D자가 새겨진 모자를 쓴 40대 남자를 전국에 수배했습니다. 현재 남부터미널 역은 화생방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방은 하나가 비어 있었다. 들어간지 2분만에 난 다시금 밖에 나와 손을 씻고 있었다. 양재역 잔혹사는 남부터미널역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 공공화장실은 나처럼 급한 사람을 위한 곳이었으면 한다. 급한 사람은 아무리 천천히 한다해도 3분을 넘기지 않는다. 도대체, 10분이 다 되도록 들어가 있는 사람은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