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3월 19일(일)

마신 양: 치사량


내가 만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난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스포츠만 안좋아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국땅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보겠다고 새벽에 일어날 필요도 없고, 우리 선수들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레이져빔을 쏠 일도 없으니 말이다.


어제부터 난, 야구를 피해다닌다. TV는 물론이고 신문과 인터넷에서도 야구 이야기를 피한다. 마음에 패인 상처가 덧나는 게 싫어서다. “틀림없이 이긴다.”고 호언을 했지만, 그건 나 스스로의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거였을 뿐, 나 역시 떨고 있었다. 그날 아침 테니스를 칠  때, 내가 잘해서 상대 팀과 5대 5 동점이 된 적이 있다. 그 순간 하느님께 빌었다. “이 경기 지면 이따가 일본한테 이기게 해주실 거죠?”

난 결국 그 경기를 6대 5로 졌지만, 하느님은 내 기도를 외면하셨다.


미녀와 잠실경기장을 찾았다. 10시에 개장을 했는데 11시 쯤 갔더니 좋은 자리는 이미 만원이었다.

 

내야는 이미 다 찼기에 외야 폴대 뒤에 자리를 잡았다.

 

더 옆으로 가면 TV가 안보이는 사각지대라, 그쪽엔 사람이 별로 없다. 이때만 해도 한국 팀의 승리를 빌면서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7회, 3대 0이 되자 난 할말을 잃었다. 손민한이 등판하자 감독이 오늘 경기를 버렸음을 알았다. 손민한은 일본 타자들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오승환으로 승부를 걸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대 0에서 난 자리를 떴다. 나 뿐 아니라 다른 관중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안일어났다면 옆에 있던 미녀는 얼어 죽었을 것이다. 참고로 그 미녀는, 야구 룰도 모르면서 순전히 내가 가자고 해서 유부초밥까지 싸가지고 경기장에 왔다.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후 세시부터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얄궃게도 감자탕집에는 TV가 켜 있었다. 내 옆 테이블에는 등산을 다녀온 아저씨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TV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거 지금 생중계하는 거야?" 그들의 무지가 난 부러웠다. 난 저것 때문에 죽고 싶은데, 저들은 등산을 다녀 왔구나. 정말 다시 태어난다면 야구 같은 걸 안좋아할거야. 축구를 생각해 봐. 축구를 안좋아하니까 경기를 보지도 않고, 한국이 져도 아무런 느낌이 없잖아. 그리고 축구는 일주일에 한번씩 하니까 매일 하는 야구보다 훨씬 낫지.

시종일관 난 "술 마시다 죽을래. 야구도 졌는데..."라면서 잔을 들이켰다. 그때 심정은 정말 참담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플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난 지체없이 2006년 3월 19일이라고 대답할 거다.

 


 스포츠라는 건 사람을 이렇듯 이상하게 만든다. 하루 전만 해도 두번이나 봤던 한국-일본의 두번째 경기를 재방송으로 보고 있었고, 네이버의 야구 관련 댓글들을 보면서 희희낙락했지 않는가. 아니, 한주 내내 난 기분이 부웅 뜬 채 아무 일도 못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단 하루만에 하이트 맥주의 원료인 암반수의 깊이만큼 기분이 가라앉아 버린 거다. 흔히 하는 말마따나 죽 쒀서 개 줬다.

병나발을 불어도 취하지 않았고, 내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화요일날 "져도 된다"는 느긋한 맘으로 쿠바와의 결승전을 지켜보려 했는데.

난 너.무. 슬.펐.다. 스포츠에서 졌을 때 슬픔의 정도는, 그 스포츠를 좋아하는 정도와 비례한다. 젠장, 난 야구를 너무 좋아했다.

별짓을 다 해봐도 죽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야구도 졌는데 살아서 뭐해?"라며 젓가락으로 날 찌르는 모습이다. 이걸 찔러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찌르겠지만...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이다.


괜찮다고 최후의 발악을 해보지만

 

난 쓰러져 버렸다. 소주 세병을 미처 다 못먹고, 일본에게 쓰러진 한국 대표팀처럼 난 쓰러졌다. 앞으로 한동안, 야구 관련 기사를 외면할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개 보름 동안의 즐거움을 선사해준 우리 대표팀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3월 19일은 올해 들어 가장 슬픈 날이지만, 그 전 보름은 너무도 아름다웠으니까. 아울러 사진을 찍어준 미녀분께도 감사드려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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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3-2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승주나무 2006-03-2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슬퍼보입니다. 나는 일본이 졌을 때 수십 명의 일본인이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사알짝 했습니다. 마태 님// 죄송해요. 하느님이 제 우려를 들으셨던 것 같아요. 개미소리마냥 작게 말했는데^^

chika 2006-03-2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저는 새벽별님 뒤에서 입 틀어막고 박장대소를...;;;;)

날개 2006-03-2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뒤에서 웃은 저는 안보이죠? 흐흐~

panda78 2006-03-21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저는 맨 뒤라 가려서 하나도 안 보였을 거에요=3=3=3=3
(저 두 병을 한꺼번에 들고 마시시는 모습은 정말... 큭큭큭큭!)

Viewfinder 2006-03-21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표팀이 엘에이에서 샌디에고로 떠나기 전날 한인타운의 룸살롱에서 떡이 되도록
마셨다네요. 아가씨가 모자라서 근처 다른 가게의 아가씨들도 공수해다가...
감독은 이미 전날부터 경기를 내줄 생각을 한 건 아닐까요.
하루만 참아줬으면 우에하라에게 그리 무력하게 농락당하지 않았을지도...

starrysky 2006-03-21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너무 슬프신 나머지 술일기마저 엉뚱한 카테고리에 와서 헤매고 있군요. 흑흑. (혹시 내가 본 영화들 중에서도 이렇게 슬픈 영화는 없었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ㅠㅠ)
전 그날 올림픽공원에서 행사가 있어 가 있었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라디오를 들으며 안타까움에 몸부림쳤답니다. 그래도.. 덕분에 한동안 모든 국민이 즐거웠잖아요. ^^

다락방 2006-03-2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슬프다...ㅠㅠ

비연 2006-03-2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까지 본 중에 가장 슬퍼보이는 마태님의 모습이네요...흑흑~
저도 그날 펑펑 울고 잠들어서 담날 눈이 왕방울만해졌다는 슬픈 전설이....
마태님..힘내세요! 그래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쟎아요...^^

비로그인 2006-03-21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기분은 하이트 암반수의 깊이만큼이나 가라앉았다---아아, 정말 마태우스 님의 글쓰기 매력이 한 번에 드러나는 문체입니다.

paviana 2006-03-2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보기엔 미녀앞에서 귀여움을 떨려고 열심히 연출하면서 사진찍으신 듯 보여요.=3=3=3
미녀가 앞에 있고 술이 앞에 있는데 야구쯤 졌다고 (흑 죽 써서 개줬지만) 무에 그리 큰일이겠어요...

Mephistopheles 2006-03-2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야구 보고 우리나라 선수들 참 잘했다고 감동받았구요..
이치로라는 선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던하려고 했는데 마태님 페이퍼 보고 울화통이 치밀잖아요..^^

마태우스 2006-03-2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흑흑.... 슬픔이 아직도 걷히질 않네요..
파비님/미녀 중심주의에서 탈피하셔야 합니다. 물론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야구 진 건 제겐 큰일이어요
주드님/제, 제가 술 오리엔트 되가지고 뭐든지 술과 연관을 짓지요^^
비연님/님을 울게 한 우에하라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락방님/흑...슬퍼 죽겠어요 엉엉엉
스타리님/앗 저 그날 올림픽공원에서 테니스 쳤었는데...그때 스타리님 뵐 수 있었던 거군요!
뷰파인더님/제가 워낙 술을 좋아해서 그런지 하루쯤 술 마신 거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엔 전날 술을 마시면 담날 테니스를 아주 잘치거든요... 술을 안마셨다면 우에하라의 공을 칠 수 있었을까요...
판다님/님은 부리만 이뻐하시는 줄 알았는데...
날개님/앗 제 이상형인 날개님이닷!
치카님/제 슬픔을 발판으로 웃으시다니 치카님 넘 귀여워요
별님/요즘 우리가 소원해졌다는 루머가 도는데, 이참에 그게 루머라는 걸 증명해 보이자구요
승주나무님/아니어요 엉엉 그게 승주나무님만의 잘못이겠어요...흑흑
타지마할님/엉엉 전 슬프단 말이어요

로드무비 2006-03-21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믹 드라마에 투입되어도 큰 인기를 끌 만한 캐릭터!
글은 또 얼마나 재밌는지......

하늘바람 2006-03-2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분은 참 인내심도 좋으셔요. 저같으면 웃느라고 사진 못찍었을것같아요. 마태님의 슬픈글이 왜 이리 재미있을까요

울보 2006-03-2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이야 이사진을 보았습니다 어제 그러지 않아도 텔레비전에서 저 모습을 보여주길래 대단한 우리나라사람들했는데 마태우스님도 거기에 계셨군요,그런데 죄송할말씀인데 사진보며서 너무웃었습니다,,,

moonnight 2006-03-2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슬펐답니다. 마태우스님은 지금쯤 술마시고 계시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ㅠㅠ 우리선수들 너무 잘 했는데, 세번을 내리 이긴다는 건 정말 무리였어요. 미국이 미워욧. -_-+++

클리오 2006-03-2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이제 사진 연출의 예술의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 그리고 일본이 우승한건 정말 참... --;

마태우스 2006-03-22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이번 일이 야구에 대한 저의 관심을 팍 떨어뜨려, 앞으로 정상적이고 건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고 이러는 거, 이제 지겨워요..
달밤님/그래요 미국이 미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보님/흑, 거리응원 갔다가 지니까 더 슬퍼요
하늘바람님/그러게요. 저도 사진 보고나서 얼마나 웃었다구요. 당시엔 몰랐는데 올라온 사진을 보니까 예술이구나 싶어요^^
로드무비님/저도 무비님처럼 글을 잘쓰고 싶어요!

펠릭스 2006-03-2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겼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