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빌은 거래처 A사에서 우리 회사와의 거래를 담당하는 직원이다.
대부분의 업무는 이메일과 팩스로 진행되기 때문에 전화통화를 자주 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급한 일로 전화를 하면 좀 무리한 요구를 해도 불편한 기색 없이 성심껏 도와주는, 그는 조금 어눌하면서도 밝은 목소리의 친절한 사람이다. 종종 납기일을 못 지켜서 오늘처럼 발을 동동 구르게 하지만...
오늘까지 입고 되어야 할 물건이 도착하지 않아서 점심 직전에 전화를 걸었다. 낭랑한 목소리의 트리사가 받는다. 빌이 없으니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한다. 용건을 말하니 자기 시스템에서 우리 물건을 찾으면서 빌에 대한 소식을 전한다.
"글쎄 말야, 빌이 군에 차출당해서 이라크전에 동원됐어. 믿어지니?'
"웃기지마"
"진짜라니까. 미시시피 어딘가에서 6주 동안 훈련 받고 이라크로 배치된다구"
"빌이 해병대야, 뭐야?"
"육군 소속 예비군"
"빌 나이가 몇인데...?"
"서른 셋, 그 딸이 열 네살이야"
오 마이...
빌 정말 좋은 사람인데,, 착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동료인데,, 종알거리는 트리사의 말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니 이미 한 두 번 징집당해서 전장에 나갔었나 보다. 아마도 그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 혹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부시 때도 불려갔다 왔을 것이다.
통화를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와 운전을 하는데 문득 빌의 딸, 열 네살짜리 아이는 아빠가 가족을 떠나 전쟁터에 불려나가는 이 상황,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자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이번 공격이 가진 의미가 그리 간단하기만 할까마는, 극도로 단순화 시키면 상위 몇 퍼센트의 가진자들이 부른 제 배를 더 불리려고 벌이는 수작에 - 속내가 너무나 빤히 들여다 보이는 작태라 음모라는 단어가 분에 넘친다 - 서민의 아들이 생명을 저당 잡히고 품을 팔고 있는 것이다.
침략 당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목숨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비교할 수는 없으나 가해자 미국의 서민들도 살림살이에 위협을 느끼며 생계유지에 대한 피로가 날로 무거워지는 실정이다.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원유 공급에는 아무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가가 지속적으로 가파르게 상승하여 지금까지도 작은 살림을 꾸려가는 소시민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그 와중에 석유회사들은 어느 때보다 높은 이윤을 남겨, 보다 못한 국회가 감사를 하네 어쩌네 잠시 전시용 법썩을 떨고, 동일 기간
상위 10 퍼센트 계층의 소득은 4 퍼센트 증가했다. 여유 있는 자들의 놀이터일 수 밖에 없는 주식과 주택 시장이 번갈아 널을 뛰는 현상이 지닌 함의는 빈자들의 눈에서 희망을 앗아버리고 아연한 빛을 남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던 바람 물러가고 꽃씨들 솜뭉텅이 마냥 굴러다니는 계절, 주말 바닷가 햇볕이라도 즐길만한 집을 떠나, 어느 연병장에서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구르고 있을 빌. 그가 귀환할 때까지 내가 이 곳에 붙어 있어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몸 성히 돌아와 그의 딸과 가족들에게 밝은 웃음 줄 수 있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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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지 두 달이 지났다. 알라딘은 여전히 붙여넣기가 안 되고,,, 툴바인지 에디터가 뜨지 않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서재 2.0 으로 바뀌면 나아지려나...
부시가 이라크전을 위한 추가 예산을 승인하라고 국회에 땡깡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두 달 연속 사망한 미군이 100명을 넘은 그곳, 미군이 휩쓴 자리에 양귀비 꽃이 활짝 피고 있는-세정이 불안하니 농민들이 보다 수익율이 높은 아편을 생산하기 위해 양귀비 재배로 돌아서고 있다- 그곳에 지금쯤 빌도 가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