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책을 읽을 때 빨간 펜을 즐겨 사용한다. 이해가 안가는 대목엔 밑줄을 치고, 리뷰 쓸 때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구절에는 동그라미를 치고, 책 뒤에다 해당 페이지를 적어둔다. 페이퍼에 쓸 소재가 생각날 때도 책 뒤에다 적으니, 책 맨 뒤페이지는 새빨갛게 변한다. 그걸 딱하게 여긴 어느 분이 메모용 노트를 직접 만들어 보내주셨지만, 아까워서 쓸 마음이 안드는지라 여전히 책의 뒷장 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다. 상황이 이러니 책을 학교에 두고 왔다든지 하면 리뷰를 쓸 수가 없다. 물론 표시를 해놓는다고 리뷰에 다 쓰는 건 아니다. 책 한권을 덮고 나면 표시된 구절이 워낙 많아져, 그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이렇게 리뷰를 쓰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지만, 스스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떠오르는 느낌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감상문이야말로 참다운 감상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리뷰 대가들 중에는 나처럼 책에서 인용을 해가면서 글을 쓰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리뷰만 올리면 추천을 십수개씩 받는 마냐님 리뷰를 보면 책을 다시 들춰보는 일 없이 일필휘지로 썼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부럽지만, 그게 노력한다고 그리 되는 건 아니리라.
내가 전에 읽었던 <아름다운 지옥>을 할머니께 빌려드렸다. 책을 읽던 할머니, 내게 오더니 묻는다.
“너 여기다 동그라미 쳐 놨더라”
할머니의 표정은 “너 변태지?”라고 묻는 것 같았다. 어떤 말이 있기에?
[친척들이 오면 늘 우리방에 곁다리로 자 버릇해서 그런지 엄마도 더 아무 말이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사촌 오빠의 손이 입고 잔 스웨터 속으로 들어와 아주 조심스럽게 나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난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내가 그 부분에 동그라미를 쳐놓은 것은 리뷰 쓸 때 “남자들이란”이란 제목하에 신나게 욕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남자 놈들은 하여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물불을 안가리는 존재들이다”라는 식으로. 하지만 다른 굵직한 이슈가 많아 리뷰 쓸 때는 이 대목을 넣지 않았었는데, 뒤늦게 읽은 할머니한테 꼬리가 잡힌 거다. 억-울-하-다. 할머니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