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동안, 그리고 사람들이 먼저 내리려고 줄을 서는 동안, 난 내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희한하게도 난 집 밖에서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인다. 기차 안이건 지하철이건 하다못해 시내버스건 아무리 주위가 시끄러워도 난 책을 잘 읽는다. 그게 좀 심하다보니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가는 일도 종종 있고, 약속장소에 친구가 나타나도 못본 체 책만 읽는다. 걸어가면서 책을 읽다가 공사현장의 철골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적도 있을 정도. 그런 내가 집에만 오면 달라진다. 책을 읽으면서 TV를 켜놓고, 독서 중간에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문자 안왔나....’ 읽다가 갑자기 시상이 떠오르면 컴에 가서 글을 쓰기도 하는데, 컴을 한번 켜면 기본이 두시간이다. 이런 걸 우리 할머니는 ‘해찰’이라고 하는데, 해찰이 이리도 심하니 집에서 책을 읽으면 진도가 늦다. 세시간 거리를 기차로 왕복하면서 책 한권을 다 읽은 적은 있어도, 휴일날 하루종일 집에서 퍼지면서 책 한권을 다 읽은 기억은 거의 없다. 시끄러운 데서 책을 읽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 석달 직장을 쉬면서 안읽고 쌓아둔 책들을 모조리 독파하고 싶지만, 막상 그런 일이 벌어져도 난 밀린 책을 다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 술을 먹느라 집에 늦게 들어오기도 하겠지만, 그나마 있는 시간에도 집중력이 너무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할머니의 집중력은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엄마도 바쁘고 나도 맨날 나가니 혼자서 집을 봐야 하는 할머니의 신세가 안타까워 내가 읽은 책 중 할머니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책들을 권해 드렸다. 할머니는 재미있다면서 계속 책을 읽으셨는데, 내 생각에 최근 이십일간 그 날짜에 해당하는 숫자의 책을 읽으신 것 같다. 황석영의 두권짜리 <심청>은 하룻만에 다 읽었고, 박완서, 은희경의 책들도 하루를 넘기지 않고 내게 돌려주셨다. 88세이신 분이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난 집에만 있다해도 절대 그러지 못할텐데 말이다.
7년간 감옥에 있는 동안, 박노해 시인은 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했다. 내가 평생 목표로 삼는 게 3천권이니 그 세배를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책 한권을 5천원으로 잡아도 5천만원이 든다) 1년이면 1400권, 하루에는 약 4권 정도가 되는데, 그 중에는 <자본론>처럼 어려운 책도 있다. 잠자는 시간 6시간을 제외하고 18시간 동안 책만 읽는다고 할 때 책 한권을 대략 4시간만에 읽었다는 얘기다. 이명원의 <해독>을 12시간만에 읽은 나로서는 박노해의 내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감옥에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청와대에 들어갈 때 장서 2만권이 따라 들어갔단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태로 미루어 보아 난 감옥 아니라 무인도에 간다해도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을 자신은 없다. 재미있는 책이라 해도 계속 독서만 하면 지겨움을 느끼고, 심신이 지쳐 버린다. 그런 걸 보면 난 문학아저씨는 아닌 듯 싶다.
술마신 횟수보다 읽은 책의 권수가 많아지는 게 목표의 하나였는데, 그리고 초반 독서 페이스가 아주 좋았는데, 어느 틈에 술마신 횟수가 더 많아져 버렸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내일 난 사랑니를 뽑고, 잇몸 치료를 한다. 한달간 난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문제는 집중력이다.
* 한가지. 할머니께 공선옥의 <붉은 포대기>를 드렸더니 “난 제목에 빨간색이 들어간 건 무섭다”며 안읽으시겠단다. 반공주의의 광풍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할머니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