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설명: 짧은 브리핑, 긴 침묵, 그리고 후회를 하다
어제는 내가 그간 조사한 예과현황을 학장에게 브리핑하는 날이었다. 예과 커리큘럼과 학생들의 신상명세서를 다 뒤져가면서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내가 봐도 너무나 훌륭했다. 운명의 두시, 난 무서운 학장님과 독대했다. 두줄쯤 읽었는데 학장님의 전화가 울린다.
“뭐? 알았어. 나한테 오라고 해”
다시 두줄을 읽었을 무렵 또 전화가 왔다.
“...그냥 부산에서 수술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은데...여기 오면 제가 잘 말해줄 수는 있지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 십분간, 난 자료 뒤에다 그림을 그렸다. 컵의 무늬를 그리려는 찰나 학장님이 전화를 끊는다.
“어디까지 했지?”
“그, 그러니까...”
순간, 두 남녀가 들이닥쳤다. 학장님이 “오라고 해!”라고 했던 그 사람들은 아들 수술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도 목소리가 커서 내용을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한쪽 다리가 짧아진다는 걸 사전에 미리 말하지 않고 자기 아들을 수술했단다. 학장은 내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담판을 지으러 회의실에 갔다. 잠시 뒤 나온 학장은 나한테 다시 브리핑을 하란다. 몇줄을 읽었을 때, 그 남녀가 나왔다.
“얘기 하다말고 가는 게 어딨어!”라면서 대학 전체가 울리게끔 목소리를 높였다. 한명이 그러면 다른 쪽은 말리거나 그러면 좋은데, 다른 쪽은 오히려 더 큰 소리를 냈다. 난 그저 멍하니 소파에 앉아 그들을 보고 있었다. 오분쯤 지나자 학장이 내게 말했다.
“다음에 합시다”
학장의 부름을 받고 원무과장이 왔고, 난 멍하니 거길 빠져나왔다.
내 방에 돌아와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잠자리에 누워서 계속 생각을 했다. 왜 난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을까.
“아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라고 하던지,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따질 게 있으면 나한테 하세요”라고 ...했다간 멱살을 잡힐테니
“다른 교수님들도 계신데 조용히 좀 하세요”라고는 했어야지 않을까. 왜 난 학장이 그렇게 당하는 걸 보기만 했을까.
물론 내가 나선다고 사태가 나아지진 않을 거였다. 티셔츠 차림이라 내가 교수로 보였을리도 없으니-그래서인지 내방에 보험상품을 팔러 온 아저씨는 교수님 서울 가셨는데요, 라는 한마디에 잽싸게 방을 나왔다-잘해야 “넌 뭐야?” 내지는 “넌 빠져”란 말을 들었을게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기에 빠진 학장에게 한줄기 도움이 되려는 노력은 했어야지 않을까. 나의 무능과 무사안일, 보신주의가 미워진다.
그들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아들 문제니 얼마나 예민하겠는가. 요즘같은 시대에 수술 전에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의사가 다른 좋은 방법을 놔두고 그렇게 수술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의사가 오진을 해도 아무말 못하는 옛날이 그립다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자기 맘에 안든다고 무조건 들이닥쳐서 소리만 질러대는 그들을 보니 내가 임상을 안하기 천만다행인 것 같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지만, 의사들에 대한 불신의 벽은 너무도 높다. 물론 그건 다 의사들의 잘못-예컨대 의사파업같은-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말이다.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실 중 하나에는 도끼 자국이 있었다. 수술 결과에 불만을 품은 보호자가 도끼를 들고 설치다 찍은 거라고 하는데, 지금도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난 웬만하면 남겨 뒀으면 좋겠다. 이미 없어졌다면 복원이라도 해서 보존하기를 바란다. 나중에 의사와 환자간의 관계가 지금과는 달라져 신뢰가 넘치게 되었을 때, “예전엔 이런 시절도 있었단다”라고 말해줄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들이 많이 노력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