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속 시간까지 30분이 남았을 때, 난 헌혈버스를 발견했다. A+를 급히 구한단다. 그러고보니 올해는 한번인가밖에 헌혈을 안했다는 생각이 들어 난 냉방이 제법 잘된 헌혈버스에 올랐다. 인적사항을 쓰는데 담당자가 묻는다. “어제 술 드셨어요?”
물론 먹었다고 했다. 난 정직하니까.
담당자: 얼마나요?
나: 어머, 술냄새 나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담당자: 그게 아니고 술을 많이 드시면 헌혈을 견디기 힘들 수가 있거든요.
나: 소주 여섯잔쯤? (물론 뻥이다. 1차에서 마신 양만 해도 12잔은 넘는다)
담당자: 집에 몇시에 들어가셨어요?
나: 10시 반 정도요 (이건 더 뻥이다. 집에 갔을 때 시각은 11시 44분이다)
담당자는 말했다. “그러시면 힘드실 텐데, 다음에 해주세요”
으음, 써붙여 놓은 것과는 달리 이들은 A형 혈액이 급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난 뺀찌를 맞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헌혈할 때 뻰찌를 맞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헌혈의 횟수가 많은만큼 뻰찌를 맞은 횟수도 많다. 그 역사를 여기서 얘기해 본다.
-내 첫 헌혈은 87년 겨울이었다. 엄마한테 삐져서 보복으로 밥을 굶었더니 배가 무지 고팠는데, 헌혈을 하면 빵을 준단다. 그래서 했다. 댓가를 바라고 한 게 부끄러워 빵은 안받겠다고 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턴 고속도로, 난 내 인생에서 100번 헌혈을 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대학로에는 늘 헌혈 버스가 서 있었다. 그래서 난 헌혈의 마지노선인 두달에 한번씩 헌혈을 했다. 그런데 너무 자주 하니까 거기서 날 이상하게 봤나보다. 에이즈 검사를 하려고 헌혈하는 사람이 그리도 많다지 않는가. 거기서 난 처음으로 거절을 당했다.
간호사: 헌혈 지난번에도 하지 않았어요?
나: 두달 지났는데요
간호사: ...다음에 오세요. 오늘은 안돼요.
한달이 지나서 갔을 때도 그 간호사는 나에게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간호사: 왜 또 왔어요?
나: 석달 지났는데요
간호사: 그냥 가세요. 하지 마세요!
운전사: 왜 못하게 해?
간호사: 이 사람, 상습적으로 헌혈하는 사람이어요!
운전사: 설마... 그럴려구...
간호사: 아니어요. 어서 가세요.
상습 헌혈자... 그게 왜 나쁜지 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수모를 당하니 그 버스엔 다신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 나이로 보아 헌혈 횟수가 60번은 되어야 하건만, 40번 언저리에 그치고 있는 건 순전히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는 날 대체 어떤 사람으로 봤을까. 언젠가 교보빌딩 옆 버스에 헌혈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너무도 놀랍게도 그 여자가 거기서 근무를 하고 있는 거다. 날 보자마자 그 여자는 “나 기억나죠? 가세요!”라고 짧게 말했고, 난 미련없이 거길 나왔다. 그때 생각, “저러면서 피가 모자라다고 하냐?”
공보의 시절, 난 국립보건원에서 근무를 했다. 헌혈차가 왔기에 헌혈을 하러 갔다. 그땐 말라리아가 유행할 때라, 유행지인 경기도 북부에 간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없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부서가 부서인지라-말라리아는 기생충이다-난 모기를 잡기 위해 일주에 두 번씩 경기도 북부를 갔던 것. 말라리아는 혈액을 통해 옮겨지므로 수혈을 통한 감염이 문제가 되던 상황이었지만 난 태연히 거짓말을 한 채 헌혈을 했다. 우리 과에 가서 그 말을 자랑스럽게 했는데, 누군가가 그걸 고자질했다. 결국 난 버스로 불려가 야단을 맞았고-그러시면 안돼죠!!!!!!!!!!!-내 피는 폐기처분됐다. 난 말라리아 안걸렸는데......
언젠가 팔 주위에 빨갛게 뭐가 난 적이 있었다. 지나가다 헌혈 버스를 보고 반가워서 팔을 내밀었는데, 팔을 본 간호사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팔이 왜그래요?” 갑자기 그런다니까 혈압을 재더니 “저혈압이라 헌혈을 못한다”고 한다. 피, 거짓말! 난 원래 고혈압이고, 그때도 150에 100 정도 나왔는데(측정당하는 사람도 맥박을 보면 혈압을 알 수 있다). 난 씁쓸히 거길 나왔다. 간호사는 아마도 내가 에이즈인 줄 알았을 터, 역시 에이즈는 무섭다.......
여동생의 둘째 얘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7개월만에 세상에 나왔다. 인큐베이터에 주로 있었는데 여러 가지로 안좋은 게 많았다. 특히 피가 많이 모자라, 난 흔쾌히 내 피를 제공했다. 안그래도 헌혈을 못해서 죽겠었는데. 그 녀석이 무지하게 산만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난 그게 혹시 내 피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한다. 녀석의 눈이 점점 새우를 닮아가는 것도 내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한다. 역시 가까운 사이일 때는 헌혈을 하면 안되나보다.
2년 전인가 혈액원에서 연락이 왔었다. 30번을 넘겼다고 은상을 줬다. 거길 가니 헌혈에 목을 맨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다. 100번을 넘긴 사람은 대표로 연설도 했다. 아아, 100번이라.... 과연 달성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