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비타민 C
일요일까지 실컷 놀았다. 월요일 오전에 피디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번주 방송 뭐할 거예요?" 얼떨결에 비타민 C를 하겠다고 했다. 자료를 챙기다보니 별로 말할 게 없었다. 별로 재미있지도 않을뿐더러, 얘기할 것도 없는 주제. 방송국에 가다가 '이걸로 어떻게 웃길까'를 고민했다. "비타민 C는 수용성이라 많이 먹으면 소변으로 배출된다" 이 구절을 읽다가 생각이 났다.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잉으로 먹으면 사람에게 부작용이 있다는 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소변으로 배출된 비타민 C 때문에 물고기가 떼죽음을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방송을 끝나고 나와보니 미녀 피디가 전화를 받고 있다. 그녀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피디생활을 하는 동안 항의전화는 처음 받아 보네"
그래도 다행이다. 좀더 오버를 해서 "이번 연쇄 살인범 집에서 다량의 비타민 C가 발견된 걸로 보아 사람의 인성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오버는 나쁘다. 비타민 C나 사람이나. 퇴근길에 레모나나 하나 사먹어야겠다.
2) 추도사
전임 학장님은 날 참 이뻐하셨다. 하지만 학과장이 된 지금, 난 무섭기만 한 학장님과 시도 때도 없이 회의를 해야 한다. 방금도 회의에 들어가 덜덜 떨다 나왔다.
"서선생 뭐 의견 없어요?"라는 말이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아, 학장님. 무정한 학장님. 왜 날 사지로 몰아넣고 그만두신 겁니까.
전임 학장님이 날 불러서 커피나 하잔다. 갔더니 당신 은사가 돌아가신 지 십주년이라고, 당신이 동창회장이라 추모식에서 추도사를 해야 한단다.
"서선생이 글을 잘쓰니까 추도사를 좀 써주면 안될까?"
그러겠다고 했다. 고민이 태산같았다. 발랄한 글이면 모를까 추도사는 내 전공이 아닌데. 네이버에서 찾아봤더니 전태일 추도사랑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군인의 추도사가 있다. 거기에 더해, 내 지도교수가 은사님을 기리며 쓴 글을 팩스로 보내달라고 해서 추도사를 만들었다.
-선생님이 가신 지 벌써 십년, 올해도 어김없이 7월은 찾아왔습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전태일 추도사에서 베낌.
-우리나라 남성의 건강수명은 약 63세이며, 그 후 약 10년을 더 사는 것이 평균이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어이하여 평균수명에도 못 미치는 삶의 흔적만을 남기시고 가셨단 말입니까; 군인 추도사에서 베낌. 사실 난 학장의 은사가 몇세 때 돌아가신 지 모른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학생 때 강의를 들으면서였습니다. 도수높은 안경 너머로 학생들을 보시는 광경이 어찌나 명료했는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내 지도교수의 글에서 베낌.
-이제 저희들의 마음속에 선생님의 참된 넋의 씨앗을 뿌리려 합니다; 전태일 추도사에서...
이런 식으로 짜깁기한 글을 전 학장 과사무실에 갖다 줬다. 그로부터 사흘째, 아무런 연락이 없다. 전 학장은 삐지신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