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과 조교가 전화를 했다. 장학금 신청을 한 학생 중 자기가 대상자를 추려 놨으니, 와서 싸인을 해달란다. 별 생각없이 내려갔다. 의자에 앉아 조교의 설명을 들었다.
"이 학생은 아버지가 군인인데 대학생이 세명이어요..."
"얘는 자기가 들어오는 바람에 대학 다니던 오빠가 휴학을 했는데, 내년에는 복학을 해야 한다네요"
"이혼해서 엄마랑 둘이 사는데, 소득원이 없답니다"
"아버지가 운전기사인데, 대학생이 세명이어요.."
우리 학교의 등록금은 한학기에 400만원 가까이 된다. 장학금이라고 해봤자 겨우 90만원, 나머지 300만원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교가 날 채근한다.
"추천 사유를 교수님이 써주셔야 하는데요"
이렇게 썼다가 지웠다.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더 많이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학생이 공부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건 분명 마음아픈 일이다. 돈이 없다는 건 그 학생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들 다 노는 예과 시절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들게 살아갈 학생들을 생각하니, 잘먹고 잘 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했다.
-무슨 생각으로 애들을 이렇게 많이 낳은 거야? 그것도 연년생으로!
-아니 애를 놔두고 왜 이혼을 했담?
내가 아는 여자애는 자기 동생을 낳을 때 자기와 네 살 차이를 뒀다 한다. 동생이 대학을 들어갈 때, 첫째는 졸업을 하니까. 책임있는 부모라면 이런 계획성도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이 뭘 먹고 싶은데, 좋은 옷을 입고 싶은데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복지의 천국인 스웨덴은 의료와 교육이 완전히 공짜며, 실직을 하면 실업수당을, 애를 낳으면 양육비와 더불어 1년의 출산휴가를 받는다. 그 대신 그들은 수입의 50% 가량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나라는 부자라도 국민은 돈이 없는 삶, 혼자 잘먹고 잘 사는 것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구호로 삼는 스웨덴 식의 복지체제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의료와 교육만큼은 국가에서 책임을 져 줘야지 않을까 싶다. 몸이 아픈데, 교육받고 싶은데 돈이 없어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서럽겠는가.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꼴을 보면, 그리고 지금의 희박한 복지마저 '사회주의'로 매도하고, '복지병'을 들먹이는 자칭 보수세력들을 보면 어느 천년에 그런 게 가능할까 의문스럽다.
어제 선을 본 여자애는 오스트리아에서 십이년을 공부하다 귀국을 했단다. 그녀가 한 얘기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삶을 즐겨요. 9시에 출근해서 두시에 퇴근하고, 가게도 6시 이전에 다 문을 닫아요. 그들은 1년간 벌어 한달간의 여름 휴가 때 다 써버리죠"
하이더라는 극우 정치인이 집권하기도 했지만,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최소한 먹고 살 걱정,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안하는 모양이다. 악착같이 돈을 더 벌려는 마음이 없는 이유가 그래서일까. 이건 물론 수입의 80%를 관광에 의존하는 산업구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둥바둥대는, 그렇지만 입에 제대로 풀칠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훨씬 더 편안한 삶을 사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들은 그저 삶이 무료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뿐이지, 우리나라처럼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자살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섯명이 선정되긴 했지만, 신청서를 낸 다른 학생들 중에서도 형편이 어려운 애들이 꽤 많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자신의 어려움을 글로 남겨야 했던 학생들의 마음도 결코 편치 않았겠지만, 선정에서 탈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좌절할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맘 한구석이 저려 온다. 우리 학생들에게 묻고 싶다.
"전생에 뭘 잘못했기에 오스트리아가 아닌 한국에서 태어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