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발 

학교서 만난 어느 분이 내게 신발이 멋지다고 했다. 

뿌듯했다 

결혼 전만 해도 난 신발이 딱 하나였고,  

전날 벗어놓은 신발을 아침에 아무 생각없이 신고 나갔고,

그래서 발냄새가 무지 났었다. 

아내는, 발냄새를 없애기 위해 그런 것도 있지만, 날 위해서 신발을 몇 개 사줬고, 

덕분에 난 생애 처음으로 뭘 신을까 고민하며 출근을 하게 됐다. 

오늘 고른 신발은 랜드로버로, 구두를 신기 싫어하는 내가 세상과 타협한 산물이었다. 

굽이 조금 있어서 그걸 신으면 더 당당해 보이는데,  

평소 신는 운동화는 빗물이 새서 할 수 없이 랜드로버를 신은 거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멋지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그의 지적에 내 발을 보니, 글쎄 신발이 짝짝이었다.  

집이 가까운 것도 아니고, 한시간 반이 넘는 출근길 동안 그걸 몰랐다니 나도 참 한심하다. 

신기한 건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왼발과 오른발에 느껴지는 감각이 틀리단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걷는 게 불편해졌다.  

이게 다 신발이 많아진 덕분이니 좋게 받아들여야겠지만 

혹시 이게 알츠하이머의 한 징조가 아닌가 무섭다. 

 

2. 통편집 

 어찌어찌해서 '당신이 국가대표입니다'라는 프로에 나가게 됐다. 

출연자의 사연을 듣고 국가대표로 뽑을지 말지 결정하는 역할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대략 3-4번 정도 말을 하며, 

방송에는 그 중 한번 정도가 나간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녹화 떄는 유독 예리하면서도 유머 넘치는 말을 많이 했고, 

그 덕분에 오늘 이런 말을 들었다.

"지난번에도 말씀 참 잘해주셨는데요, 이번주에도 나와주실 수 있나요?" 

이놈의 인기란, 하여간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퇴근을 하다가 아내한테 전화를 해보니-그 프로는 월요일 6시 50분에 방영된다- 

내가 말하는 건 한번도 나오지 않았단다. 

소위 말하는 '통편집'인데, 

말로만 듣던 통편집을 당하니 좀 속상하다. 

내가 했던 주옥같은 말들, 예를 들면 해외에선 기생충을 조심해야 한다, 

해외에서 기생충에 걸려 설사 쭉쭉 하면 얼마나 서러운지 아느냐, 

같은 말들이 떠올라 속상하고, 

그럴 거면 뭐하러 불렀느냐, 어차피 편집될 거니 담부턴 그냥 침묵하자는 유치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결국 마음을 잡고 이번주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통편집 후에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걸 보면 역시 나는 대인배 기질이 있다^^ 

 

3. 비 

비가 와서 무려 4주째 테니스 레슨을 못받고 있다. 

먹는 것에 비해 살이 덜 찌는 이유가 새벽마다 받는 테니스 레슨 덕분인데, 

그걸 못하니 잠깐만 방심하면 바지 단추가 펑펑 튀어나간다. 

살이라는 건 한번 찌면 여간해서 빼기 어려운데, 

내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라 비 때문이니 또다시 억울함이 밀려온다. 

그러고보니 내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것, 통편집을 당한 것도 비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역시 난 상상력이 뛰어나다.


댓글(41)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연 2011-07-1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마태님.. 좀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전 왜 이리 웃기기만 한지요. 빵 터져버렸습니다, 혼자서^^;;;;;

마태우스 2011-07-12 09:25   좋아요 0 | URL
민망한 건 아니어요 바지 뒤가 반으로 갈라졌다든지 하는 게 민망한 거죠^^

순오기 2011-07-1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버렇게 확 다른데 짝짝이로 신고 나갔단 말이죠.ㅋㅋ
한시간 이상을 모르고 신다가 갑자기 불편하게 느끼는 건, 역시 아는 게 병이구요.^^
대인배에 상상력이 뛰어난 건 맞는 거 같고요, 알츠하이머 징조는 아닐테니 걱정매두세요.

마태우스 2011-07-12 09:26   좋아요 0 | URL
정말 신기하죠? 어떻게 한시간 반 넘게 모를 수가 있을까요.
사실 전 대인배는 아니구요, 그냥 배가 크답니다^^

마노아 2011-07-1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대인배 마태우스님!
짝짝이 신발은 엄청난 집중력의 소산이지 싶어요.^^

마태우스 2011-07-12 09:26   좋아요 0 | URL
호오, 마노아님의 해석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것두 제가 대인배라서 그런가봐요^^

비로그인 2011-07-12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사람이 약속장소에 신발 짝짝이로 신고 나와서 당황하면,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마태우스 2011-07-12 09:27   좋아요 0 | URL
헤헤 그렇죠. 좋아하는 사람은 뭘 해도 좋은 거죠 그나저나 주드님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글을 뜸하게 쓰네요. 죄송

비로그인 2011-07-12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오직 마태우스님만이 쓸 수 있는 글!!!ㅋㅋㅋ

마태우스 2011-07-12 09:27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하긴, 저 정도 버젼이 다른 신발을 짝짝으로 신고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요^^

Mephistopheles 2011-07-12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왼쪽왼쪽 혹은 오른쪽오른쪽만 신은게 아니라 왼쪽 오른쪽 제대로 갖추셨습니다..ㅋㅋㅋ

마태우스 2011-07-12 09:27   좋아요 0 | URL
제가 좌우에는 좀 민감합니다. 좌파 소리를 하두 많이 들어서요^^

무스탕 2011-07-12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서 빵 터져버렸어요. 신발이 하나였다면 절대 없었을 실수를 하게 만든 아내님을 원망할수도 없고.. ㅋㅋㅋㅋ
마태님이 잠깐 방심한새 조코비치가 이겨버렸으니 비 때문 맞아요 ^^

마태우스 2011-07-12 09:28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전 방심하지 않았구요 페더러의 승리를 엄청나게 빌고 또 빌었답니다. 하지만 페더러는 결국 져 버렸고, 새 시대의 도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쓰리지만, 작년에 탈락했을 때만큼은 아니랍니다. 이제 저도 조금씩 페더러를 포기하고 있는 거죠.

마녀고양이 2011-07-1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마태우스님의 대인배 기질을 배워야 하는 날인 듯 합니다.
멋지십니다. 진정.

마태우스 2011-07-12 09:29   좋아요 0 | URL
대인배라고 우기는 저 글에 동의해주시다니, 마녀고양이님이야말로 대인배이십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7-1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대인배 인정 ㅎㅎㅎ

마태우스 2011-07-12 09: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셨어요. 따스한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글 쓰는데, 이렇게 다정하게 맞아 주시니, 역시 친정이 좋습니다. 감사감사.

세실 2011-07-1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마태님은 대인배다에 인정...이거 배가 크다(많이 나왔다)는 뜻이죠? =3=3=3=3=

마태우스 2011-07-12 15:19   좋아요 0 | URL
흑흑 저 정말 배가 커졌어요 흑. 근데 세실님 팔뚝은 요즘 어떠신지요 =3=3=3=3

세실 2011-07-12 15:21   좋아요 0 | URL
어휴..내 이럴줄 알았어 칫.
저 요즘 다요트 열심히 하고 있어욧!!!
팔뚝은? 응? ㅋㅋ

마태우스 2011-07-12 16:14   좋아요 0 | URL
어맛 들켰다...! 잠시 다요트를 요트의 한 종류인 줄 알았다는... 그나저나 이미지가 님의 미모에 걸맞게 화사하네요! 미모는 여전하시죠?

카스피 2011-07-12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테님 덕분에 비오는 우울한 화요일에 크게 웃어봅니다^^

마태우스 2011-07-12 15:19   좋아요 0 | URL
오옷 카스피님을 웃게 만들다니, 전 정말 복받을 거예요!^^

BRINY 2011-07-1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비가 내내 와서 출근하실 때 현관이 많이 어두워서 그러셨나 봅니다.

이렇게 비가 내내 오는데도 테니스를 잘만 치러다니는 제 주위 남교사들은 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태우스 2011-07-12 15:20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 브리니님. 현관도 어둡고 좀 서두르기도 했어요. 근데 주변 분들은 테니스 치시나봐요? 실내 코트가 있나봐요 대따 부럽다...

blanca 2011-07-12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대인배 맞아요. 비오는 날 마음이 개이는 페이퍼네요.

마태우스 2011-07-12 15:20   좋아요 0 | URL
리뷰의 달인 블랑카님이닷! 빨리 날이 개야 할텐데, 이번주 내내 비온다니 너무하죠...

메르헨 2011-07-1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쩜 .... 이런 일이..............
ㅎㅎㅎ...오늘은 어떤 신을 신으셨는지 궁금해요.^^

마태우스 2011-07-12 15:21   좋아요 0 | URL
오늘은 스포티한 신을 신었답니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요 메르헨님. ^^

꼬마요정 2011-07-12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태우스님ㅋㅋ 일어나는 일도 범상치 않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하네요. 무얼 하시든 자연스러운가 봅니다...라고 생각해요~^^

마태우스 2011-07-12 15:21   좋아요 0 | URL
어..출근 시간 동안엔 뭐, 알려줄 사람이 없죠. 모르는 사람한테 "신발!" 이러진 않잖아요^^ 제가 짝짝이를 잘 소화하긴 합니다^^

울보 2011-07-12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후후 그냥 크크크 하고 웃었습니다
님의 그 큰 마음을 배워야 할텐데,
전 속이 너무 좁거든요,
그나저나, 이비가 좀 그만 오기를,,

마태우스 2011-07-12 16:15   좋아요 0 | URL
제가 말이 그렇지 사실은 속이 무지하게 좁습니다. 글 쓸 때만 좀 넓어질 뿐^^ 비는 이번주 내엔 그치겠죠 뭐. 양심이라는 게 있을테니...

saint236 2011-07-1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신발도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맞추어서 형식의 틀을 깨셨군요. 갑자기 아수라 백작님이 생각이 납니다.

마태우스 2011-07-15 12:16   좋아요 0 | URL
오오 아수라 백작... 훌륭한 분이죠.^^

2011-07-13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5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5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1-07-15 22:09   좋아요 0 | URL
그, 그런데 9살 이후로는 없는 거잖아요 ㅠㅠ
전 도대체 뭐하는 놈일까요

2011-07-15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