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서 우리 과의 발전계획을 내라고 한다. 내가 있는 곳이 타대학 같은 전공에 비해 어떤 점이 우월한지를 말하고, 향후 십년간의 발전 계획을 쓰란다. 우월한 점이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해봤더니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연구실을 PC방으로 쓸 수 있다는 것? 더구나 내년에 잘릴까봐 마음을 졸이는 처지에, 향후 십년간 계획은 사치스러워 보인다.
5월 31일까지가 마감이었다. 그때까지 난 딱 열줄을 썼을 뿐이다. "A4로 열장 내외로 제출하시오"라고 되어 있으니 못해도 여덟장은 써야 하건만... 계획서를 잘내면 뭔가 혜택이 있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행정 업무에 정통하신 모 선생님에 따르면 이번 계획서는 그저 대학평가에서 점수를 잘받아 보려는 것일 뿐, 실제로 돈과 인력을 지원할 생각은 전혀 없단다. 그러니까 더더욱 내기가 싫어지는걸?
오늘 메일이 왔다. 금요일까지 다시 기회를 줄테니 잘 써보란다. 메일 수신자 명단을 보니 나 말고도 안낸 사람이 많은가보다. 생화학교실 걸 베껴야겠다는 생각에 내려가보니, 그 사람도 땀을 뻘뻘 흘리며 발전계획을 쓰고 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발전계획 같은 거 내지 말라고 하면 그만큼 더 발전할 수 있을텐데"
아무튼 난 온갖 거짓말, 소설적 상상력, 특유의 구라,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계획을 쓰고 있는 중이다. 4장쯤 썼는데, 지금까지 쓴 것만 해도 십년 후 우리 과는 중부 지역의 중심으로 우뚝 솟을 전망이다. 모 교수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단어를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단다. 후훗. 뭔가 말이 안되는 걸 써내는 게 내 특기긴 해도, 영 머리가 아프다. 날씨는 또 왜이렇게 더운지.
오늘 아침, 뉴스레터를 작성하고 있는데 학장님이 직접 전화를 했다.
"서선생, 나 학장인데, 지금 내려올 수 있어요?"
학장의 호출은 늘 내게 가슴졸임을 선사한다. 오늘 역시 '드디어...잘리나'라는 마음으로 학장실에 들어갔다. 학장이 좀 앉아 보란다. 앉았다. 가까이 앉으란다. 그렇게 했다. 도대체 뭐가 걸렸을까? 인터넷만 하는 거? 아니면 실험실을 깨끗이 유지한 죄? 둘다 아니었다.
"서선생이 의예과장을 좀 맡아줬으면 하는데..."
세상에, 날더러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보직까지? 다들 맡기 싫어하는 보직이고, 실제로 하는 일도 많건만, 난 냉큼 하겠다고 했다. 보직이 좋아서가 아니라, 안잘린 것에 감사해서. 그리고 내게 너무 잘해주는 학교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생각에. 임기를 물어봤더니 2년이란다. 그렇다면.... 이걸 빌미로 내년에 안잘릴 수도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슬그머니 해본다.
전임 예과과장을 만나 뭘 해야 되냐고 물었다. 들어갈 때와 달리 난 심란해진 맘으로 그 방을 나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으니까. 처음에는 안잘린다는 것에만 기뻐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일이 많다고 불평하는 것, 인간이란 원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의 마음이 다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