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알라딘 평정기
장르: 3류 사소설
"사소설의 경지를 한단계 끌어내린 역작!" -알라딘 뉴스레터-
-------------------------------------
"메이저급 서재라 코멘트 쓰기 조심스럽지만.."
"마태우스님 서재는 이제 제법 큰 허브가 되었습니다^^"
양털 소파에 앉아 인터넷을 하던 마태우스는 담배를 한모금 빨아들인 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메이져급 서재라..."
갑자기 지난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마태우스는 늘 교봉에서 책을 샀고, 교봉에다 리뷰를 썼다. "오프라인 최강이 인터넷도 최강이지!" 그는 자신이 교봉북클럽의 우수회원이라는 것에 자부심마저 느꼈다. 그토록 교봉에 충성도가 높았던 그가 '인터넷 교봉 모니터요원'에 지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1.2대 1의 경쟁을 뚫고 다섯명의 모니터요원에 뽑혔다.
"에...여러분이 할 일은 다른 사이트를 부지런히 다니면서 장.단점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마선생, 알라딘이나 그래스물넷 사이트 가본 적 있어요?"
"네? 아직 없습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가세요. 알겠죠? 거기에 대해 이달 중순까지 리포트를 써주세요"
마태우스는 그래서 생전 처음 다른 인터넷 서점을 가봤다.
"뭐야 이건!"
마태우스는 화들짝 놀랐다. 오프라인 최강은 온라인 최강이 아니었다. 인터넷 서점의 활성도는 물론이고 디자인마저도 알라딘이 훨씬 뛰어났으니까. 특히나 알라딘의 마이리뷰는 양과 질에서 모두 탁월했다. 모니터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는 일관되게 주장했다.
"독자서평을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누가 몇편을 썼는지도 모르는 지금 방식은 곤란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다른 이가 쓴 독자서평에 리플도 달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상품도 문제였다. 교봉에선 한달간 가장 많은 서평을 쓴 사람에게 고급을 사칭하는 만년필을 줬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사이버머니였음에도. 개수로 따지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마음먹고 일년치를 풀어놓는다면 누구나 일등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심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심지어 이런 서평도 올라왔다. "난 아직 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저처럼 당신 편이 많습니다. 이회창 파이팅!" 달랑 한줄짜리 문장도 서평 한 개로 쳐준다는 게 마태우스는 싫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가 독자서평을 보고 책을 고르나요?"라는 반론에 그는 할말을 잃었다. 다음달에 개편된 독자서평 시상제도는 그 주의 우수작에게 1만원의 사이버머니를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강남 교봉점이 완공되었을 때, 마태우스는 깨달았다. 교봉은 인터넷 서점에 더 이상 투자할 뜻이 없다는 것을. 모니터요원으로 활동한 석달이 지난 뒤, 마태우스는 교봉을 탈당하고 알라딘에 둥지를 틀었다. 장점이 훨씬 더 많은 사이트를 보고나니 교봉에 접속하는 게 괴로웠으니까.
알라딘에는 고수가 많았다. 마이리뷰가 수백개씩 되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명예의 전당에는 내공이 뛰어난 고수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물만두란 사람은 어떻게 이리 책을 많이 읽었을까? 평범한 여대생 좀 봐. 정말 대단하군!" "언젠간 나도..."라는 마음에, 마태우스는 열심히 리뷰를 써나갔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람 중 100개 조금 넘는 사람도 있던데, 조금 있으면 불러주겠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어느날인가 '나의 서재'란 게 생겼다. 그간 쓴 마이리뷰와 산 책들을 몽땅 모아주는, 사실상의 홈페이지였다. 리뷰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점수가 올라갔고, 그걸 보면서 마태우스는 은행의 잔고가 늘어나는 것같다는 생각을 했다. '리뷰가 수백개인 평범한 여대생 같은 사람은 억대 부자네?' 마태우스는 어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었다.
운명의 11월, 마이페이퍼라는 기능이 서재에 추가되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알라딘 서재가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구나!' 낮게 탄식한 마태우스는 리뷰야 따라잡기 어렵지만, 페이퍼에서는 한번 일등을 먹어보자는 생각을 하게된다. 구닥다리 홈피를 삼년간이나 이끌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그를 도취시켰다. 하지만 그 작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서재 인기의 척도인 즐겨찾기 순위에서 상위권을 휩쓴 사람들은 대개 리뷰가 수백개씩 되는 명예의 전당 사람들, 그들은 갈고닦은 내공으로 멋진 글들을 뿜어냈다. 지금은 '자몽상자'가 된 '라스꼴리니꽃'의 글은 마태우스를 주눅들게 했다.
"윽. 인간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담?"
리뷰는 관두고 페이퍼만의 순위에서도 마태우스는 하위권이었다. 그당시 그는 이런 글을 쓰고 있다.
[난 하루에 서너개씩 글을 쓰는 건 나같이 집요한 사람이나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 말고도 마이 페이퍼에 목을 맨 분들은 굉장히 많았다. 베스트서재의 주인공인 '진우맘'님이 이런 글을 쓰신 걸 봤다. "마이 페이퍼 쓰느라 책을 못읽겠다!"
아닌게 아니라, 진우맘님이나 플라시보님 등등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은 하루에도 여러편씩, 주옥같은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게다가 글의 수준도 상상 이상이라, 별로 경쟁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몸살이 나서이기도 했지만, 요 며칠 내가 서재에 글을 안썼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 때문이다(2004/1/10)]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알라딘 평정이 실패로 돌아가서 하는 말이지만, 서재지수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주식 시가를 보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의 따뜻한 방이 계량화되어 경쟁의 장에 나서는 게 과연 좋은 일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플라시보님 말이 맞다. 서재는, 책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책으로 못하는 얘기를 마이 페이퍼에 담아야지, 본말이 전도되어야 되겠는가. 아쉬운 것은 내가 서재지수에서-최소한 마이 페이퍼라도-알라딘을 평정한 뒤 이런 말을 하면 다들 기립박수를 치겠지만, 1등 하려고 아등바등하다가 두손을 들고 나서 이러니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플라시보님이 일은 많고 연봉도 많은 대기업을 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 직장에 머물 것인가를 고민했을 때, 난 속으로 이랬다. "플라시보님! 대기업 가세요. 그래야 제가 추월하지요"]
열흘 후, 그는 다시 이런 글을 쓴다.
[전에 마이페이퍼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다른 건 힘들겠지만 마이페이퍼 부문은 내가 평정하려 했는데, 다른 분들이 워낙 글을 많이 쓰셔서 도저히 상대가 안될 것 같다, 그래서 마이페이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조용히 살겠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건 남들로 하여금 방심을 유도하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실제로 난 그 글을 쓰고 난 뒤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댔다.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달력을 보라. 9일부터 모든 날에 새글이 있음을 알리는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는가]
그가 내린 결론이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모든 집착을 버리기로. 이런 말을 두번째 하는거라 남들이 의심을 하겠지만, 이번엔 진짜다. 쓰고 싶으면 쓰고, 쓸 게 없으면 안쓸 것이며, 매일같이 순위를 확인하는 일도 안할 거다. 모든 집착을 버리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왜 그동안 부귀영화에 눈이 멀었었을까. 어느 유명한 야구선수가 마음을 비우니 홈런이 더 잘나온다고 했다. 혹시 아는가.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톱10의 딱지가 날라들지]
그 글에 벨벳님이 코멘트를 날리셨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재미있는 글 올려주시라는 의미에서, 추천 왕창 누릅니다. 저의 추천이 순위를 끌어올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아, 고마운 벨벳님' 그의 볼에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한 양치기소년처럼, 그때도 그는 진짜로 포기한 게 아니었다.
2월께로 생각된다. 그의 서재에 즐겨찾기를 한 사람의 숫자가 열명을 돌파한 것이. 그는 친구에게 그 경사스러운 일을 전화로 알렸고, 친구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줬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서재에 가본 그는 다시금 좌절한다. 그가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한 얘기다.
"세상에, 다른 사람은 즐겨찾는 사람의 숫자가 200을 넘더군. 게다가 다들 글을 너무나 잘써. 야, 내가 과연 평정할 수 있을까?"(주: 그땐 다른 사람의 숫자를 보이게 해놨다)
친구의 대답이다. "내가 니 홈피를 봐서 아는데, 너 정도의 능력이면 가능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마태우스는 알았다. 친구의 말은 자신이 술값을 낸다고 해서 한 접대성 멘트라는 것을. 그 뒤에도 친구는 집요한 한탄에 시달린다.
"야! 아직도 평정 못했어. 너 니말에 책임질 수 있는거야!"
"그 플라시보란 사람 말이야, 그 사람 주위에서는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
"진우맘이란 사람이 있는데, 세상에 심리검사를 해주면서 인기를 끌어. 나도 뭐 할 게 없을까?"
심지어 이런 짓도 했다. 내 친구 회사에 놀러갔을 때, 그의 이름으로 알라딘 계정을 만들어 내 서재를 즐겨찾기 한 것. 그것도 부족해 내가 썼던 마이리뷰를 몽땅 추천을 했다. 나중에 인기서재의 소유주인 모 인사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을 때, 그가 이랬다. "아니 정말 그런 짓도 했단 말입니까?"
마태우스는 정말 열심히 썼다. 알라딘 달력을 보면 1월에 이틀이 빠졌을 뿐, 2월 퍼펙트, 3월 퍼펙트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글의 질로 경쟁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유머로 승부를 낸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2월 26일 그가 쓴 <알라딘 폐인>은 최초의 히트작이었다. 앤티크, 연보라빛우주, 진우맘 등 지금은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된 서재 주인장들이 하나둘씩 그의 서재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분의 코멘트에 답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젠 순위에 신경 안씁니다!" 세 번째 거짓말이었고, 그 순간 그는 밖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는다. "꼬끼오!"
그 후 그는 <지금 알라딘에선>을 비롯해 <알라딘이 경제를 망친다>, <알라딘, 총선참여 선언> 등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3류소설과 <알라딘 뉴스레터>를 발행하며 중견 서재인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하루종일 대여섯편의 글을 써도 서녀명의 방문자를 맞는 게 고작이었던 더벅머리 소년이 드디어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이다. 아무리 뛰어도 일당을 벌기 어려웠던 시절은 종말을 고하고, 양털로 된 소파에서 우아하게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 된 것. 명예의 전당 출신이 아닌 사람이 서재를 평정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2세대 알라디너의 시대가 왔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말한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그가 원하는 꿈은 이루어진다"고. 알라딘에 얽매여 정작 해야할 일을 못하지만, 그는 행복하다. "저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직장에서 해고된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가 내뿜은 담배연기가 도너스 모양을 띄며 공중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