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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ㅣ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꽤 오랫동안 <사랑의 단상>이란 책을 가지고 다녔던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기호학자라고 만 알고 있는 롤랑 바르트가 사랑에 대해 쓴 책으로, 바르트는 보들레르, 사드, 위고, 베르테르 등 사랑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알파벳순으로 사랑의 정의를 나열한다. 342쪽이니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한 줄 한 줄이 어찌나 내공을 필요로 하는지 진도 나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 그 바람에 책은 좀 너덜너덜해졌지만, 이런 종류의 책이 다 그런 것처럼 읽고 난 뒤의 기쁨은 여느 책의 열배쯤은 될 것 같다.
읽으면서 열심히 줄을 치긴 했지만, 머리에 남아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하지만 리뷰를 쓰기 위해 표시해 놓은 구절들을 다시금 음미하다보니 주옥같은 글귀가 이렇게도 많았구나 싶다. 예컨대 더 많이 사랑하는, 그러니까 사랑의 역학 관계에 있어서 약자인 사람의 심리를 바르트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68쪽).”
슬프지만 예리한 글귀 한 토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270쪽)”
다음 구절은 이성에게 짐짓 무관심한 척 하는 게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다는 내 평소 지론을 뒷받침해 준다.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나를 흥분케 한다(278쪽).”
이 책을 읽으면 사랑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혼자 하는 게 아닌, 둘간에 밀고 당기는 역학관계, 그러니 공부를 한다고 사랑을 더 잘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사랑의 단상>을 읽은 이유는 내가 존경하는 어느 분이 이 책을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분은 늘 사랑에 냉소적이기만 한 내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 같다. 이게 맞든 틀리든 간에 책을 선물하며 그분이 내게 끼워 준 메시지는 날 기분 좋게 한다.
“멜론 아이스크림 같은 분이세요.”
바야흐로 아이스크림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이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올 여름엔 한번 사랑을 해볼까? 멜론 아이스크림같은 사랑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