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의학교육에 관한 워크숍을 마치고 집에 온 건 오후 5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제 술을 워낙 많이 마신 탓에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는데, 집에 오니까 엄마는 자아를 찾느라 밖에 나가셨고, 할머니가 혼자 소파에 앉아 계시다 날 보며 반가워한다. 아 맞다, 오늘이 토요일이지. 돌봐주는 사람이 교회 때문에 집에 가버려 할머니가 제일 심심한 날.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안들리는 할머니 귀가 우리의 대화를 방해한다.

“밥 드셨어요?”

“엄마 있냐고?”

“밥 먹었냐고요!”

이런 4차원적 대화가 오가다보면 솔직히 짜증이 난다. 그래서 할머니의 착한 양아들은 어쩌다 한번씩 할머니한테 오면 말귀 못알아먹는다고 화만 버럭버럭 내다가 가버리곤 한다. 화는 안냈지만 난 더 이상의 대화 시도를 포기한 채 자리에 눕는다. 밥 생각도 없고, 잠만 쏟아진다.


그래도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나와 할머니는 간만에 만난 거였다.

"할머니, 옷 입으세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께요.“

“엄마 어디 갔다.”

집에서 드시겠다는 걸 간신히 설득해 할머니가 옷을 입도록 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모레네 설렁탕’에 모시고 간다. 설렁탕을 보니까 나도 식욕이 불처럼 일어나, 원래 먹으려던 보통 대신 고기가 많은 ‘특’을 시킨다. 보통을 시킨 할머니는 고기가 많다면서 당신 것을 내 거에다 덜려고 한다.

“할머니, 많으면 그냥 남겨요.”

할머니는 집요하다. 세 번이나 더 시도를 한다. 고기 한점을 받아 내 그릇에 넣는다. 다시 한점을 숟가락으로 뜬다.

“할머니, 이제 할머니 드세요!”

할머니는 내 표정을 보고 거부의 뜻을 알아챈 듯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드시기 시작한다.


내 그릇을 바닥까지 비우고 한숨을 돌린다. 평소에는 3분의 1 정도는 남기는 할머니가 오늘은 심상치 않다. 국물이 점점 없어지고 바닥이 드러나려고 한다.

“할머니, 오늘 잘 드시네요?”

“나 더 못먹어.”

“그게 아니고 오늘 많이 드신다고요.”

할머니는 손까지 내저으신다. “이거만 먹으면 충분해.”

나중에 차에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가며 의사소통을 한다.

“할머니, 배고프셨어요?”

“오늘 점심을 안먹어서 배가 좀 고프더라.”

아이고, 그랬구나. 그럴 줄 알았다면 바로 모시고 나갈 걸, 한시간을 괜히 뭉그적거렸네.


식사 후 할머니에게 월드컵 공원에 모시고 간다. 추워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내 잠바를 벗어 할머니에게 입혀 드린다.

“할머니, 이제 안추우시죠?”
내 잠바가 황송한 할머니는 잠바를 벗으며 내게 내민다.

“너 입어. 감기 들어.”

난 저만치 도망가 버린다.

“싫어요. 할머니 그냥 입어요”

호숫가를 걷던 할머니가 허리가 아프다고, 그만 집에 가잔다. 집에 와서 연방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우리 할머니, 어째 우리집에 오신 뒤 훨씬 더 늙으신 것 같다.


다른 집이라면 자식들이 다 나 정도는 할 거다. 아니, 나보다 더 잘할 거다. 하지만 그렇지가 못한 애들만 바글거리는 우리집인지라 상대적으로 내가 좋은 자식이 되어 버린다. 원망도 해 보지만, 그래도 나 하나라도 있는 게 다행이다 싶다. 차에다 기름을 가득 채워주고, 재떨이에다 비상용으로 쓸 천원짜리를 채워주는 아들이 없었다면 우리 엄마의 삶이 얼마나 쓸쓸했겠는가. 적어도 우리집에서 난 괜찮은 자식이다. 

 

 

울 할머니, 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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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 2006-11-18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넘 멋져요!

2006-11-18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예진 2006-11-1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가 자아를 찾으러 나가셨다는 이야기에 깔깔깔~
부리님 말씀대로 멋지세요 :)

마노아 2006-11-1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느 집에서도 마태우스님은 멋진 아들이어요(>_<)

chika 2006-11-18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넘 멋져요! 2 (^^)

다락방 2006-11-18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늘 지금처럼만 하세요, 늘 지금처럼만.
멋진 아들(손자)이 곧 멋진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걸, 전 마태우스님을 보며 깨달았답니다.

또또유스또 2006-11-1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은 정말 멋져요...
이쁜 아내가 잇다면 더욱 멋질텐데...
제가 다리를 놓아드리고 싶다는..ㅎㅎㅎ
음.. 저도 제 차의 기름을 가득 넣어 주는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당...

로쟈 2006-11-1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남편이란 소리도 빨리 들으셔야 할 텐데(근데, '괜찮은'은 '관계없는'의 줄임말이라죠?)...

얼룩말 2006-11-19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하세요. 괜찮은이라는 말로는 모자라요.

비로그인 2006-11-1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과 결혼하실 여성분은 복도많으셔~^^

moonnight 2006-11-19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마태님은 어느 누구랑 비교해도 효자에 효손이세요. 쓸쓸하게 계시다 손주랑 식사하고 산책하신 할머니는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어머니의 자아찾기도 도와드리는 정말 멋진 마태님. ^^

모1 2006-11-19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정도가 아닌걸요. 그러고보니 할머님과 영화본지 좀 되시지 않았나요? 할머님과 영화관으로 데이트 가시면 좋았을꺼란..생각을 해봅니다. 후후..

하루(春) 2006-11-19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덕끄덕. 효도가 뭐 별건가 싶군요.

해리포터7 2006-11-1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마태우스님...할머니 참 행복하셨을꺼에요..

이네파벨 2006-11-1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씨 고운 마태님...마태님 어머님은 정말 자식농사 성공하신겁니다!

클리오 2006-11-1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마태님과 결혼할 여자에 대한 부러움과 좋은 전망에 엄청엄청 딴지...!! 원래 효자는 좋은 남편이 되기 힘들어요... 게다가 그렇게 잘하는 아들과 손자가 다른 여자에게 잘해주는 걸 보면, 할머님은 아니더라도 어머님은 질투를 많이 하시지 않을까요? 호호호... (이뤄질 예정도 아직 없는 미래사에 대한 괜시리 딴지.. ㅋㅋ 마태님께는 좀 죄송하여요... 우어어~^^;;)

무스탕 2006-11-19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 울 할머니 보고싶어졌어요... 울 할머니 돌아가신지 8년이나 지났구만요... ㅠ.ㅠ
계실땐 몰랐는데 돌아가시고 난 후에 더욱 보고싶어지더군요.
가끔씩 혼자 산소도 찾아가곤 해요...
계실때 잘해~ 라는 말이 정말 맞더군요.
마태우스님. 정말 괜찮게 멋지세요~ ^^b

sooninara 2006-11-1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이야 항상 괜찮은 분이시죠?^^
할머님께도 어머님께도 님이 있으셔서 다행입니다.
저도 친정엄마에게 나쁜 딸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네요.

마태우스 2006-11-20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님/부끄럽습니다. 사실 전 님같은 딸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무스탕님/맞아요 돌아가시면 잘하고 싶어도 못하죠... 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글 쓰고나서 님들 댓글보니까 잘해야겠다 싶어요...
클리오님/전 효자가 아니라니깐요!!! 저얼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하여간 클리오님 주제로 글 한편 쓸까하다 관둡니다. 남자를 택할 때 탁월한 눈을 가진 분이라는..
이네파벨님/에이 설마요... 제가 잘할 때만 여기다 적어서 그렇지 사실은 아니라는....^^
해리포터님/일이주에 한번 꼴인데요... 술먹고 미녀 만나는 시간에 비하면 너무 약소하게 투자하는 거죠... 댓글읽다 반성하게 되네요
하루님/제 글 읽다가 조셨죠!! 끄덕끄덕...
모1님/음, 영화관 간지 한달 정도 되었어요 마음이,란 영화 같이 봤거든요. 근데 눈이 잘 안보이고 귀도 안들려서......
달밤님/호호, 어머님은 자아를 대충 찾으신 거 같은데 아직도 찾아 헤매고 계시더이다^^
크리슈미미님/그, 글쎄요 전 좋은 남자가 아닌데...좋은 애인이 될 수 없는 100가지 이유가 있답니다. 첫째, 외모가 후지다..둘째 배가 나왔다.....세째 미녀에 약하다...
얼룩말님/한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하심 안되죠^^ 하여간 고맙습니다 제가 얼룩말,을 특히 좋아한답니다. 근데 사실은 줄말 아닌가요?
로쟈님/님의 유머실력에 대해서 지난번에 알게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유스또님/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다리라....안서호에 다리 놔주세요!
다락방님/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제맘 아시죠?
치카님/아이 부끄럽습니다. 이런 걸 옆구리찔러 절받기라고...
마노아님/설마요 저희 집에서만 그렇죠....^^
예진아씨/호호 하여간 전 엄마가 자아 찾으러 다니시는 게 좋아요
속삭이신 분/좀...답답하긴 해도... 할머니 생각하면 안스러워요.... 저도 귀가 안들리면 어떨까,란 생각을 합니다.
부리님/고마워요 님밖에 없어요

이누아 2006-11-2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을 답니다. 괜찮은 외삼촌에, 아들에, 손자시군요. 제가 다 흐뭇해요.
기왕이면 할머니께 보청기를 하나 사드리면 어떨까요? 청각장애인복지관이나 유관단체를 알아보시면 노인성 난청의 경우에도 정부에서 일정액을 지원해 줍니다. 할머님이 보청기로 듣는 것에 적응하는 기간이 좀 필요하기는 하지만 보청기를 끼시면 점차 부드럽게(소리지르지 않고) 대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참고로 노인성난청은 고음을 듣는 게 힘들어요. 낮고 또박또박하게 이야기하시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마태우스 2006-11-20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보청기 생활하신지 꽤 되었죠 아마. 이제는 보청기로도 한계가 있나봐요... 마음이 아픈 대목이죠... 오랜만에 댓글,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