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번째 카드는 매달 4일, 두 번째 카드는 매달 10일까지의 사용액을 근거로 각각 23일과 26일 내 통장에서 돈을 빼간다. 빼빼로데이라 불리는 11월 11일, 카드회사의 ARS를 통해 이번달 청구액을 조회하고 난 뒤 내가 한 말, “5년여만에 처음으로 내가 번 돈보다 쓴 돈이 적다.” 흑자를 본 돈을 어떻게 쓸까 잠시 고민했다. ‘어머니 드린다’가 63%, 내게 도움을 준 주위 사람들에게 쓴다가 22%, 저축한다가 15%(이하 내 마음의 비율)였는데, 그런 고민은 괜히 한 거였다. 때를 만났다는 듯 접근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


흑자 첫날. 일주에 한번 같이 점심을 먹는 멤버들을 데리고 대낮임에도 밤에 준하게 오리를 먹였다. “요즘 제가 오리고기 먹고 오리이불 덮고 오리발 내밉니다. 하하핫.”이래 가면서.


둘째날. 시네21에서 전화 왔다. “구독이 만료되었는데요 일년 더 하시겠어요?” 별로 고민 안하고 “네”라고 대답해 버렸다. 금액은 많지 않지만, <좋은 생각>에서도 그런 연락이 왔고, 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 참고로 할머니가 그 잡지를 좋아하신다.


셋째날, 지도학생이 슬픈 얼굴로 찾아와 “술 사주세요”라고 한다. 사줬다.


넷째날, 이날이 하이라이트다. 유전학 강의를 하려는데 컴퓨터 모니터가 안들어온다. 할 수 없이 스크린을 보고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애들 책상 사이를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바지가 푹 찢어진다. 책상 끝부분에 칼이 박혀 있었던 것. 잠시 망연자실해 있으니까 애들이 자기네들이 떠들어서 그러는 줄 알고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탓은 아닙니다. 이건 우리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애들은 내가 학교에서 탄압이라도 받는가 하는 눈치였다.

“방금... 바지가 찢어졌습니다. 이 바지는 제가 가장 아끼는 3대 바지의 하나입니다. 작년 겨울, 그리고 재작년 겨울, 전 이 바지를 입고 술집을 누볐었죠. 방수라서 술을 쏟아도 괜찮거든요.”


수업이 끝나고 난 조교 선생한테 점심을 사준다고 꼬신 뒤 시내에 나갔다. 내 돈으로 바지를 사는 건 이번이 처음, 그전까지는 전부 어머니가 사주셨다. 그리고 난, 옷사러 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바지가 없어서 사러온 줄 안다’는 이상한 피해의식이 있어서. 그래서 엄마를 따라 옷을 사러 가더라도 여러 군데를 보지 않고 첫 번째 가게에서 그냥 사버린다. 이날 역시 그랬다. 갤러리아 백화점 매장의 첫 번째 가게에 들어갔고, 찢어진 바지와 비슷한 재질을 골랐고, 허리 사이즈를 말했고, 잠시 뒤 “제가 좀 자랐나봐요. 아직 성장기거든요”라고 말하며 좀 더 큰 사이즈를 달라고 했다. 계산을 할 때 난 내심 “5-6만원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카드로 그은 돈은 무려.... xxxxxxxxxxx였다. 비싸다고 놀라니까 우리 조교가 이런다. “선생님, 여기 <DAKS>잖아요. 당연히 그 정도 하죠.”

원래는 잘 안그러는데 놀라서 3개월 할부 했다.


흑자 선언 후 일주일이 안된 시점에서 난 흑자액을 다 까먹고 다시 적자로 돌아설 예정이다. 흑자를 내는 것도 어렵지만, 이왕 낸 흑자를 지키는 건 그보다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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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1-15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한 얼굴을 하고 마태님께 들이대고
싶은 이 옹졸한 마음은 저도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마태우스 2006-11-15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그건...재벌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지요^&^ 참고로 저 망한지 올해가 5년째입니다

짱꿀라 2006-11-1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어디 사람사는 게 마음먹는데로 되나요. 예상이 빗나갈데로 있는 것이죠. 좋은하루되세요.

Mephistopheles 2006-11-1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대로...알고있는데요...=3=3=3=3

조선인 2006-11-1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스에서 바지를 긁다니, 거길 데려간 조교도 너무하네요. ㅋㅋㅋ

플레져 2006-11-15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닥스바지 입었으니 닥구를 치며 닥다리를 뜯으세요... =3
(참, 바지가 없어서 사러온 줄 알거라는 이상한 피해의식은, 이상한 피해의식이 아니라 쇼핑에 대한 낯설기, 혹은 지름신이 절로 통제되는 발상인데요? ㅎㅎ)

모1 2006-11-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하실 필요가 없었네요. 아주 깔끔하게 흑자본 금액을 소비하신듯 보이셔서요. 후후..

paviana 2006-11-1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거울 보면서 슬픈 표정을 좀 연구해야겠어요.

마태우스 2006-11-1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너무 허무하게 써버리니까 아쉬워서요...ㅠㅠ
플레져님/아앗 님도 그런 유머를 쓰시는군요! 글구 님이 하니까 그런 유머도 나름 멋져 보이는데요^^
조선인님/자주 같이 밥을 먹는 조교선생인데요, 제가 그냥 확 간거라서 말릴 새도 없었을걸요^^
메피님/언제 함 쏘겠습니다. 얼굴과 본명을 알아야 할 필요도 있으니 말입니다^^
산타님/비가 오는 바람에 좋은 하루는 글러버린 것 같아요ㅠㅠ 제가 오늘 야심찬 계획이 있었단 말이어요ㅠㅠ

마태우스 2006-11-1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님/오오 기대됩니다^^

다락방 2006-11-1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는 잘 안그러는데 놀라서 3개월 할부 했다.
-->역시 재벌다운 멘트세요. '원래는 잘 안그러는데' 하하

전호인 2006-11-1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은 덕을 쌓고 계시군요. ㅎㅎㅎ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역쒸 님의 글에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군요.
언제한번 그 덕 좀 보여주시지요. ^*^
그 덕이란 놈은 어찌 생겼을꼬?

2006-11-15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6-11-1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당황하셨을텐데, 마태우스님의 멘트는 위트가 넘치시는군요!
닥스 바지 입은 모습 뵙고 싶네요...^^

비로그인 2006-11-15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구석구석에서 묻어나는 처연함과 의연함. 그런데 이런 글을 올리실 때에는 착용컷도 함께 올려주세요!

해리포터7 2006-11-15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전까지 카드명세서 보고 허탈해하던 참이었는데요..윽...카드를 다 잘라버리고 싶어요.힝~
닥스잖아요..마태우스님.ㅋㅋㅋ 저는 남푠이 그거 사달랠까봐 그런매장은 둘러서 다닌답니다..가끔..저보다 쇼핑을 더 좋아하죠.

싸이런스 2006-11-1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덕분에 오늘 첨 웃었어요. 엇 이미 자정이 넘어버렸네?

moonnight 2006-11-1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울을 보니 제얼굴도 굉장히 슬퍼보이는데 이를 어쩌죠. ^^;;;;;; 그나저나 닥스라니. 흑. 왜 거길 가셨어요. ㅠㅠ; 좀 더 싸고 예쁜 곳도 많은뎅. 뭐, 그래도 좋은 옷을 사두면 그만큼 오래입으니깐 괜찮아요. (라고 위로;;)

마노아 2006-11-15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흑자를 보는 방법은 뿌린 것 거두어들이기입니다. 요일별로 일주일만 버티셔도 충분할 것 같아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요(>_<)

BRINY 2006-11-1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 조교 너무했습니다. 닥스라니...교수님들은 그 정도 상표가 달린 옷을 입는거라고 생각하나보죠?

해적오리 2006-11-1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는 닥스 멤버쉽 카드 있어요. 한번도 쓴 적은 없지만...^^;;
엄마한테 괜찮은 옷 한벌 사드린다고 2년전에 가서 남방 한장을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제 겨울코트 값 맞먹게 주고 사드렸지요. 근데 엄마가 그옷 많이 좋아하셔서 지금도 보면 흐뭇해요. 이번에 서울 오실때도 입고 오셨더라구요. 햇수로는 3년째인데 옷이 아직도 짱짱합니다. 마태우스님도 오래오래 입으실 수 있을 거에요. 오래 입어서 본전 뽑으시와요.

하루(春) 2006-11-15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다가 뭐라 말해야 할지 다 잊어버렸어요. ㅋㅋ~

기인 2006-11-15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마태님과 저는 버는 금액의 규모(?)는 다르지만 (불쌍한 원생과 재벌 ^^) 돈을 사용하는 방식같은 것은 진짜 비슷하네요 ㅎㅎ

클리오 2006-11-1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드, 하나만 쓰세요... ^^;

이네파벨 2006-11-1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절..구절...왜 이리 웃긴겁니까?
답글마저도 모두...

복받으실거예요. 이렇게 종종 웃음을 선사해주시니...

마태우스 2006-11-16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네파벨님/호호 분에 넘치는 복을 늘 받고 있어요 이렇게 많이 댓글을 달아주시잖아요6^ 근데 오랜만....!
클리오님/하나로 줄여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더군요. 3년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기인님/재벌도 나름의 고민은 있지요^^
하루님/프라다 이미지 멋지네요.
해적님/감사합니다 십년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문제는 허리죠
브리니님/제가 재벌2세라는 걸 잘 알고 잇거든요
마노아님/일주일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재벌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하기에...ㅠㅠ
달밤님/미녀님의 얼굴에 웬 슬픔이....전 미녀님과 만날 날만 기다리겟습니다
싸이런스님/반가워요...!
해리포터님/닥스와 함께 멋진 겨울을! 부군께 닥스 선물하세요^^

마태우스 2006-11-16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착용컷을 올리면 더 처연해지긴 하겠지만... 허리가 좀 두꺼워서요.하핫.
비연님/님들이 이렇게 원하신다면 과감히 공개할 용의도 있습니다 하핫.
속삭이신 님/늘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할께요
전호인님/덕은 그리 잘생긴 놈이 아니지요.... 저처럼 생겼다고나 할까...
다락방님/그걸 잘 캐치하셨군요 역시 님의 센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