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춘욱의 최소한의 경제 토픽 - 달라진 세계를 이해하는 21세기 경제사 수업
홍춘욱 지음 / 리더스북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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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이 최소한의 경제토픽인 만큼 현재 세계 경제의 주요 흐름만 잘 짚어준다. 쉽고 막판 요약정리도 훌륭하다. 쉽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기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바쁜 사람들을 위해 여러모로 잘 정리한 책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의 일원이었다. 미국을 포함한 많은 선진국들이 그들이 어느 순간 자본주의와 민주주주의에 편승할 것이라 보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도광양회로 속내를 숨기다 본색을 드러낸 것은 2008 베이징 올림픽이다. 1위를 했고, 성장한 국력을 과시했다. 특히 2008 경제 위기에 미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더욱 자신감을 얻은 듯 하다. 중국은 이후 10년간 미국과의 대결을 위해 일대일로에 무려 2400억 달러 이상을 퍼부었다.

 육로와 해로의 일부를 개척하긴 했지만 문제도 있었다. 우선 공급과잉이다. 지속적인 투자로 생산능력을 올리다보니 중국내 만성적 디플레이션이 형성되었다. 미중갈등 이전엔 세계 다른 나라로 물량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어려우며 관세장벽에 부딪혔고 반감도 크게 사고 있다. 둘째는 정부의 효울성의 감소다. 경제개발 초창기 개발하는 곳곳 성공했지만 경제가 성숙해지며 옥석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아졌다. 일당독재 국가에서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중국은 2020년 이후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이 무너졌는데 이 영역은 GDP의 20% 고용의 30%를 담당했다. 그렇다보니 청년의 실업률이 21.3%에 달했다. 중국은 노동자가 학력이 낮다는 문제가 있다. 학구열이 강한 나라지만 그것은 지금의 이야기이며 1950-60년대의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며 당시 4500만이 아사했다. 이후 출생률이 반등해 1962-1975년까지 4억명의 베이비붐세대가 탄생했고 이들이 중국 경제성장의 주역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려운 시기에 출생하여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중국의 고졸 노동자가 겨우 28.8%에 불과한 이유다. 이들은 지금의 정보혁명에 적응이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양극화다. 중국은 호구제로 인해 농민공이 생겨났다. 농민들이 호구가 농촌임에도 도시 지역의 일자리를 위해 도시에 몰래 사는 것이 농민공인데 그렇다보니 자신들과 그 자식들이 국가가 제공하는 기본 의료, 교육, 복지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 여기에 도시민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며 해안가의 주택가들을 넘겼는데 이를 통해 거액의 부를 챙길 수 있었다. 현재 농촌과 도시 지역의 소득차는 2.3배정도다. 

 중국의 또 다른 문제는 저출산이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2800달러 수준이지만 벌써 출산율이 1.1명까지 떨어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 경제는 고유가로 인해 21세기 초반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크름반도 침공으로 경제제재를 당하며 경제고 곧두박질 쳤는데 그럼에도 푸틴은 전쟁을 택했다. 결과는 참당하다. 20만의 젊은이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20만은 카자흐로, 7만은 조지아로 6만 6천은 유럽연합으로 징집을 피해 떠났다. 러시아는 인구가 점차 감소중인데 이번의 전쟁으로 인해 젊은 층이 대거 감소하여 그 여파가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미국처럼 제조업이 붕괴했다. 소련 시절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었는데 70년대 1차 석유파동으로 고유가의 단맛을 보며 에너지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로 전화되기 시작했다. 원유를 팔다보니 달러가 유입되어 환율이 상승해 제조업 부분의 수출경쟁력은 더욱 악화했다. 

 저자는 푸틴의 이번 전쟁이 마지막 발악이라고 보고 있다. 제조업의 붕괴로 더 이상 첨단 무기를 만들기 어렵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보이기에 군사적 확장을 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독일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잘 나가다 몰락했다. 독일은 메르켈 때 원전을 없애고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택했다. 그리고 과도기로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했다. 에너지 가격이 저렴해 수출에 도움이 크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공급이 끊겨 에너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독일은 중국 의존도가 크다. 독일의 실물 및 금융 수출의 10%가 중국이다. 하지만 2015년 디젤게이트로 전기차로의 전환이 늦어졌고, 코로나 19로 중국의 내수가 침체하며 타격을 입었다. 

 독일은 최근 정치상황이 심각하다. 극우정당인 AfD가 득세하고 있다. 이들은 남유럽 구제금융에 반대하며 생겨났고 최근 동독 지역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으며 세력이 커졌다. 반면 기존 사민당은 지지율이 하락했는데 이민정책에 관대하여 기존의 지지세력은 노동조합의 이탈이 뼈아프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파운드와 가치가 30%나 하락했다. 영국은 지난 20년간 총요소생산성이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영구은 금융과 석유, 바이오가 강세인데 석유는 떨어지는 해이고, 바이오는 비만 치료제 부분에서 약점이 있어 미래가 어둡다. 파운드화의 약세로 인플레이션이 심한데 브렉시트로 인하여 6%의 경제성장 손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다 죽어가던 경제가 아베노믹스로 크게 살아났다. 아베노믹스는 양적오나화, 대규모 재정정책, 민간중심 경제성장이다. 양적완화의 이점은 컸다. 우선 엔저 현상이 발생해 수출경쟁력이 생겼고 앤캐리 트레이드가 세계적으로 발생했다. 둘째는 금융기관의 경영수지 개선이다. 일본은행이 자금을 확보해 이를 일본 국채와 증시에 투자했다. 그 결과 일본 닛케이 지수가 4배나 상승했다. 마지막은 금리하락이다. 이로 인해 주택 구매 부담이 낮아져 주택 구매 수요가 늘었고, 채권 보유자는 가격 상승으로 차익을 거두었고 일본 국채를 보유한 국내 금융기관들의 재무구조가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둡다. 이 나라는 48년 건국 이후 계속 전쟁 중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교를 신봉하나 크게 4집단으로 나뉜다. 근본주의자인 하레디는 종교적 가치를 우선시하여 고대 경전 토라를 공부하고, 직장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다티는 하레디와 세속주의 유대인의 중간 성격이나 우파적 성향이 강하다. 마소드티는 다티보다 조금 더 개방적이다. 세큘라는 세속주의 유대인으로 이들은 유대교를 믿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사실상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집단이다. 문제는 하레디의 출산율이 무려 6.6명인데 비해 세큘라는 2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사실상 무임승차 집단임에도 하레디의 정치적 발언권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남자는 30개월 여자는 24개월 의무 군복무를 한다. 그런데 임신 및 출산하거나 육아중이면 면제가 되고, 종교학교 예시바에서 토라를 공부하는 학생도 면제가 된다.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하레디가 면제가 된다. 2012년 이스라엘 대법원이 하레디의 병역 특례를 위헌 결정하였지만 하레디는 인구 12%임에도 종교정당에 지지를 몰빵하고 분열된 정국에서 줄타기를 잘 하여 아직까지 병역을 유예받고 있다. 

 하레디는 군복무는 하지 않으면서도 주변 아랍민족들에게 대해 매우 강경하다. 미국의 유대인은 대부분 중부유럽 출신의 아슈게나트인데 하레디는 중동과 남부 유럽출신이다.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과 정책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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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랜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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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6년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거의 200여년 만에 다시 두 개로 쪼개진다. 하나는 서부와 동부 해안지대를 차지한 연방공화국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플라이오버 스테이트들을 장악한 공화국연맹이다.  

 연방공화국은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추구한다. 그들은 지금의 민주당 계열로 사회보장을 추구하고 모든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부해안과 동부해안의 주들이 편입되었고 히스팩닉과 흑인등 유색인종의 70%이상이 연방공화국을 택했다. 하지만 연방공화국은 공화국연맹의 테러와 공격에 대응한다는 이유로 모든 시민에게 심어놓은 생체칩을 통해 그들의 행동과 모든 대화를 실시간으로 감시한다. 자유를 위해 자유를 억제하는 셈이다. 연방공화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실패가 사실상 경제적 불평등에서 왔음을 인지하고 모든 기업의 매출 5%를 세금으로 걷어 그것을 사회 복지에 사용한다. 때문에 사회는 매우 안정되었고 범죄가 거의 사라졌다.

 공화국 연맹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이다. 국가의 지배자는 사실상 12사도라 불리는 인물들이다. 모든 시민은 기독교를 믿어야 하고, 결혼과 분리된 섹스는 불법이다. 낙태도 금지되고 있으며 오직 남과 여 두 개의 성만이 허용된다. 유색인종은 사실상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연방과의 체제경쟁을 위해 자신들이 더 자유롭다고 선전하며 실제로 그렇다. 이들은 중심 계율에선 상당히 엄격하나 그 외의 것에서는 의외로 자유로우며 국민을 실시간으로 감시하지도 않는다.

 미국이 갈라진 근본 원인의 시작은 레이건 때 시도된 신자유주의의 시도다. 미국 사회를 지탱해오던 거의 모든 사회보장책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한 제조업의 해외 이전으로 백인 중산층이 일자리를 잃고 그들의 거주지역이 별 볼일 없는 플라이오버 스테이트가 되어 버렸다. 트럼프의 재선은 이렇게 벌어진 사회에 더 큰 균열을 내고 실질적인 분열의 시작이 되었다. 바이든 이후 계속 공화당이 집권하고 그들이 상하원을 장악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관은 모두 보수 인사로 가득해져 공화당에 유리한 선거구를 짰기에 민주당은 계속 패배한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등 국제적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과정에서 클리블랜드에서 대규모 테러가 일어난다. 극단주의자들이 기관소총으로 무장하며 수천명을 학살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은 분열한다. 유명한 기업의 CEO 채드윅은 군대를 포섭하여 공화당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미국의 분열을 주도한다. 각 주는 투표를 통해 연방공화국이 될지, 공화국연맹이 될지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주가 원치 않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사람이 이주해야 했다. 이주 과정은 과거 인도 파키스탄 분리때처럼 대혼란이었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동과정에서의 폭력으로 사망한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배경인데 사실 이 내용자체가 소설보다 더 재밌었다. 소설은 연방공화국은 정보국 요원 샘스텐글에게서 시작한다. 그는 막심이라는 요원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 막심은 트랜스젠더로 신성모독을 하다 공화국연맹에 납치되어 화형당한다. 놀랍게도 공화국 연맹은 이를 생중계하며 이런 화형영상을 다른 나라에 팔아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다.

 샘스텐글에게는 작전이 떨어지는데 놀랍게도 자신의 이복동생인 케이틀린 스텐글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지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샘스텐글은 자신에게 이복동생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었다. 작전의 수행을 위해 샘 스텐글을 성형까지 해가며 신분 세탁을 하고 중립지대인 미네소타의 한 도시로 향한다.

 이 부분도 재밌는 상황인데 주 전체가 한 진영을 택한 다른 주들과 달리 미네소타 주는 반으로 쪼개져 갈라졌고 그러다보니 마치 냉전시대 베를린처럼 양 진영이 모두 소유하여 갖는 중립지대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샘스텐글은 정확히 이 중립지대로 파견되어 작전을 실행하게 되며 그 결말까지가 소설의 내용이다. 

 전 세계적으로 신 자유주의가 경제적 피폐를 낳고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중산층들이 일자리를 잃어 그 생계가 위협받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국제사회 및 민주주의가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분노늘 파고든 극단주의 포퓰리즘 집단이 정치적 지형을 넓히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비단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 유럽에도 해당이 된다. 디지털 플랫폼은 민주적 융합과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는 커녕 잘못된 정보와 주장도 마구잡이로 나르며 오히려 갈등의 골을 키우고 있다.

 때문에 이런 소설이 나온 것이다. 소설의 배경을 한국에 대응해도 지금 상황에선 전혀 이상하지 않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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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낱이 파헤치는 여론조사의 모든 것
마크 팩 지음, 김문주 옮김 / 이사빛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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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나, 각종 시사프로그램에서 여론조사는 항상 주요 소재거리다. 여론조사는 현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기도 하고 시국을 이끌기도 한다. 최근 탄핵된 대통령의 여당의 지지율이 크게 오른 여론조사가 나왔는데 이걸로 인해 정국이 요동친게 그 예다. 직관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많은 설왕설래가 언론에서 있었다. 

 여론조사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건국 초기 개별적인 주 의회에서 그 주의 전국 선거인단을 선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거인단의 구성을 일반국민의 투표로 선발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1800년 미 16개 주에서 겨우 5개 주만 일반투표를 했지만 1824년엔 24개 주에서 18개 주가 1836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한 개 주만 일반투표를 하지 않을 정도로 일반화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중의 다수 생각을 미리 아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되었고 이것이 여론조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초기 여론 조사는 주먹구구였다. 독립기념을 같은 다양한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누구를 지지 하는지 물었고, 공공장소에 책을 두고 거기에 지지하는 후보를 쓰게 하기도 했다. 한편 민병대 소집일에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런 엄격한 통계적 표본추출이 없는 것을 밀짚조사라 한다. 밀짚마냥 바람 가는데로 영향을 받는다는 비유에서다.

 20세기 들어 미국에서 전국지인 리터러시 다이제스트가 현대적인 여론 조사를 수립한다. 이들은 1930년대 금주령에 대해 5백만명에게 설문조사를 하였고 1916년에서 1932년의 5번의 대선 결과를 성공적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여전히 밀짚 여론조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이제스트는 1936년 대선에서 무려 천만명에게 편지를 송부했고 이중 220만에게 답신을 받았다. 결과는 57:43으로 공화당 후보의 승리가 점쳐졌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터무니 없게 달랐다. 무려 39:61로 민주당 루스벨트가 승리한 것이다. 이는 엄청난 실패였다. 답신 수가 상당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당시 잡지가 부유층 위주로 조사를 했고 당연히 부유층은 공화당 지지자가 많았다. 또한 공화당 지지자 측이 당시 더 적극적으로 답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터러시 다이제스트와는 다르게 겨우 5만개의 조사로 예측에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조지 갤럽이다. 그는 응답자 수보다는 대표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 성공으로 1935년 미여론연구소를 설립했고 이것이 지금도 존재하는 갤럽이 된다. 갤럽이라는 이름은 전세계로 퍼져 여론 조사 기관의 대표처럼 느껴진다. 조지 갤럽은 1940년과 1944년의 대선도 정확히 예측한다. 1948년에는 예측에 실패해 여론조사 업계가 잠시 위축되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뿐이었다. 

 현대 여론 조사에는 두 가지 필수 기법이 있다. 하나는 표본 추출이다. 전체 인구를 대표할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을 정확히 선발하는 것이다. 표본이 올바르기만 하다면 표본의 크기는 많지 않아도 된다. 다음은 가중법이다. 표본은 절대로 완벽하게 설정되지 않기에 그것의 보완을 위해 결과를 보정하는 것이다. 

 표본을 무작위로 확보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할당이다. 성별이나 나이, 직업 등을 기준으로 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수가 응답할 때까지 여론 조사를 실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할당을 채우는 과정에서 다른 편향이 개입할 수 있다. 가령 여론 조사는 비용절감과 정확성을 위해 특정 시간 안에 행해져야 하는데 조사원이 이를 하기 위해 일부로 사람이 많은 곳이나 한가해 보이는 사람들만을 찾는다면 그 행위 자체가 특정 집단에 편향된 표본을 구성하게 된다. 

 여론 조사에는 4가지 방법이 있다. 대면조사, 우편조사, 전화조사, 온라인 조사다. 대면조사는 오랜 과거의 것이고 우편조사가 20세기 초만해도 많이 시행되었다. 다만 우편 조사는 편지를 송부하고 수신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소요되며 그 사이 사람들의 심리와 정치적 상황이 변화되는 것을 감지못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전화조사는 즉각적인 조사가 가능하며 사람들의 지역 및 떨어진 거리와 무관한 조사가 가능하여 소위 무작위 조사가 가능하다. 다만 전화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로 인해 역시 편향될 가능성이 있다. 온라인 조사는 무작위성이 가장 커질 수 있다. 비용도 저렵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전화처럼 온라인 조사도 실제 클릭하여 참여하는 의지가 필요하며, 인터넷 접근성도 하나의 제약이자 편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공개 여론 조사를 실시해버리면 특정 집단이나 사람들이 마음먹고 대거 참여해 여론을 크게 오염시킬 여지도 있다. 다만 인터넷 조사는 성문제 같은 논쟁적 주제에 대해 사람들의 비교적 솔직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론조사가 잘못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시기가 잘못되는 경우다. 둘째는 대표성과 아주 거리가 먼 표본이 추출 된 경우, 셋째는 표본이 체계적 결함이 있는 경우다. 가령 과거 표본에서 가구원 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4인 가족과 1인 가족 간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경우 이는 중요한 변인이 된다. 시대변화에 따른 이 변화를 잡아내지 못한 표본은 체계적 문제가 된다. 넷째는 무응답 편향이다. 응답이 없었던 사람도 새로운 후보나 정치적 상황이 등장하면 강하게 지지성향이 드러날 수 있으며 대개 자기 편이 유리하면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그렇지 않으면 응답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섯 번째는 표현법이 잘못된 경우다. 실제로 질문은 단순이 앞뒤가 바뀌거나 맥락이 들어가서 같은 질문임에도 상당히 다른 결과가 도출 될 수 있다. 여섯 번째는 승자를 잘못 예측하는 경우다. 여론 조사에서 높게 나오더라도 자신의 지지층이 실제 투표장에 나가지 않는 것을 고려치 못한다면 패배할 수 있다. 또한 미국처럼 선거인단으로 대선승자가 결정된다면 지지율이 높아도 경합주에서 패배해 선거인단에서 져서 낙선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사례는 두 번이나 있었다. 

 패널설문조사는 한 집단의 사람들을 표본으로 추출해 오래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하는 방식이다. 이는 한 집단에서의 정치적 변화 패턴을 추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초기 패널을 잘못 구성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단점이 있으므로 좋은 패널 조사를 위해서는 사전에 패널을 잘 수집해야 하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자체가 커질 필요가 있다. 

 MRP라는 최근의 여론 조사 기법이 있다. 이는 다단계 회귀 및 사후 계층화다. 인간이 투표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요인(성별, 나이, 과거 투표이력, 직업, 선거구, 지역 등)의 특정한 조합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각 선거구의 모든 유권자를 모델화하고 그 결과를 종합해서 선거구의 결과를 예측하며 확률로 값을 제시한다. 가령 대졸에 민주당 지지 이력이 있고, 유색인종이며 직업이 전문직이라면 해당 선거구에서 공화당 지지 확률은 30%, 민주당 지지 확률은 70%형태로 제시하는 형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지지율을 조사해낸다. 이 방식에는 최소한 5만명 안팎의 표본이 필요하다. 많은 것 같지만 전구단위로 크게 조사하는 경우라면 오히려 경제적일 수 있다. 현대 여론 조사는 1000명 정도의 표본을 요구하는데 각 선거구마다 1000명을 확보해야 하는 경우라면 MRP방식이 경제적이다. 이 방식은 이번 선거에 성공적인 예측을 보였어도 다음번엔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자체가 매우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이 조사가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아직 정확하다는 증거는 부족한 편이다. 

 현대의 여론 조사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꽤 있다. 우선 여론조사는 반드시 틀릴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이 선거토론과 보도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여론 조사 자체가 주객이 저도되어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것을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 여론 조사도 문제가 있다. 대개의 정치 여론 조사는 대중매체가 여론 조사 기관에 의뢰하여 실시한다. 의뢰인 자체가 기사거리를 원하는 곳이다 보니 이들은 흥미진진한 결과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네가 의뢰하여 얻은 결과는 드러내고 남의 것을 깎아내리고 싶어한다. 때문에 정치 여론 조사는 의뢰단계에서부터 편향과 왜곡으로 의도성을 갖고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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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5-01-23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여론조사 포커스 스터디
공부할 적에, 여조 실행자 측에서
어떤 식의 질문을 만드냐에 따라
충분히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현재 여조의 심각하게 왜곡된
현상의 출발점이 아닌가 싶습
니다.

보정 역시 문제가 있죠.

닷슈 2025-01-24 10:2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그런데 수치만 보고 그런데 관심을 갖질 않죠
 
한국인의 기원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기후가 만든 한국인의 역사
박정재 지음 / 바다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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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내용과 제목은 좀 예상과 다르다. 한국인의 기원이라면 고대 한국인에서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집단 이동과 융합, 흡수, 갈등을 생각하게 되고 그 부분을 다루긴 하지만 책의 내용은 보다 거시적이다. 한국인의 기원이란 제목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아프리카를 벗어나 중동과 유럽, 북미, 남미로 이어지는 인간의 이동을 살핀다. 그리고 여기에 환경 변화가 작용한다. 지구는 타원으로 태양을 공전하고,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고 세차운동으로 인해 그것이 조금씩 바뀐다. 이로 인해 빙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는데 이러한 환경 변화가 인간의 이동과 문명의 쇠퇴 및 발전의 근원적 원인이라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그리고 책은 다른 저서들과 다르게 연대의 기준은 인간이 지구 환경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친 서력1500년은 기준으로 삼는다.   

 

1. 인류의 이동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략 12만년 전 아프리카를 나와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유럽의 추운 지역에는 네안데르탈인이 동아시아 지역엔 데니소바인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40만년번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빙기와 간빙기를 무려 5-6차례 견뎌낸 만큼 추위에 대한 강한 내성과 상당한 수준의 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니소바인은 동아시아에 있었으며 기후가 따뜻해지자 네안데르탈인이 동진하면서 서로 교접해 혼혈아가 탄생하기도 했다. 

 13만년전 간빙기가 도래해 사하라가 습윤해지자 동쪽 지역에 초원이 생겨났다. 인간은 그 초지를 다라 시나이 반도와 남쪼그이 바브엘반데브 해협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후 다른 세력들이 간빙기가 도래할때마다 습윤해지는 사하라를 따라 순차적으로 계속 아프리카를 빠져나갔다. 인간의 아프리카에서의 이동은 여러 차례였던 셈이다. 

 7만 4천년 전 수마트라섬의 대형화산 토바가 폭발하여 환경이 악화되어 사피엔스의 수가 격감했다. 이 때 상대적으로 온난한 아프리카에 있었던 사피엔스 집단이 다시 유라시아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멸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한 유럽의 인간 수렵채집민들은 이후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리냐크 문화를 이룩하고 다른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라베티안 문화를 이룩한다. 그라베티안 문화는 약 2만 2천년전 빙하기가 가장 추울 때 번성했다. 이들은 점성이 높은 역청, 동물 뼈를 녹인 물질로 창자루를 단단히 고정해 사냥능력을 높였고 뼈에 구멍을 뚫어 바느질을 하여 옷을 만들어 추위에 적응했다. 1만 8천년 전 마그달레나 문화가 있었다. 이베리아에서 시작해 후퇴하는 빙상을 따라 전파되었다. 투창가속기를 발명하여 지렛대를 이용해 창을 더 빠르게 던질 수 있었다.

 과거 북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유럽으로는 진출하지 않아 네안데르 탈인과의 교접이 없었던 기저유라시아인 집단이 존재했다. 그래서 현대 인류의 DNA는 네안데르 탈인과 교접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기저유라시아인의 유전자가 서로 반비례하여 존재한다. 기저유라시아인은 1만 4천년전 지중해 동부 레반트에 거주한 나투프인의 직계조상이다. 나투프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최초 농경민이다. 


2. 수렵채집민과 농경민, 유목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마지막 빙기의 최성기가 끝나고 1만 4700년전부터 약 2천년간 풍요로웠다. 수렵채집민 나투프인 그래서 농경없이도 여기에 정착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착은 농경에 우선한다는게 최근의 연구다. 하지만 영거드라이아스 한랭기가 1천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급속한 온난화로 기상이변이 속출했다. 나투프인은 인구가 불어난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농경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농경은 급작스럽기 보다는 이미 수렵채집민 시절부터 부분적으로 시도하거나 그 방안은 대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후 위기가 그 본격적인 시도를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서유럽인은 크게 레반트 농경민, 이란의 농경민, 서유럽의 수렵채집민, 동유럽의 수렵채집민 네 집단이 이주하여 혼합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집단으로 유전적 차이가 컸지만 오랜 시간 서로 융합된 것으로 보인다. 

 수렵채집민은 대개 활동반경이 넓고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식량을 찾아 이주한다. 따라서 인구 부양력이 낮고 영아와 노인 살해가 흔하다. 또한 피 정복 집단도 대개 노동력이 필요없기에 몰살시킨다. 농경민은 농경으로 항상 노동력이 필요하다. 정주 생활로 가내에서 일할 여성 노동력이 항상 필요하기에 정복하는 경우 상대편의 여성을 흡수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역사상 수렵채집민은 농경민 집단에 자주 흡수되었고 유전적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정주 농경사회에서 여성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 발가락이나 윗팔의 뼈 변형이 그 증거다. 이는 곡식을 무수히 빻았다는 증거다. 농경으로 여성이 집안일을 담당하자 남여의 차이가 생겨났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농경민들은 인구 증가로 농토가 부족해지자 이동했다. 9천년전 레반트와 이란 농경민이 아나톨리아 서쪽이로 이동하여 발칸 반도와 지중해를 따라 이베리아까지 이동했다. 다른 무리는 도나우 강을 따라 독일로 갔고, 또 다른 무리는 인더스 강으로 향했다. 

 홀로세 초기 농경민은 북부유럽에 관심이 없었다. 농경에 부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6천년전 기후가 온난습윤해지자 북유럽에 진출한다. 북유럽에 수렵문화 대신 깔대기 모양의 토기인 푼넬비커문화가 들어선 이유다. 한편 이란에서 북쪽으로 이동한 농경민은 흑해와 카스피해에 도달했다. 이들은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후손과 섞여 초원지역에서 유목문화를 발달시킨다. 이들이 바로 얌나야문화다. 

 얌나야 문화는 5300-4600년전에 존속한 청동기 문화권이다. 대형고분인 쿠르칸을 남겼고 바퀴와 말을 동시에 활용한 최초의 집단이다. 말은 초원지대의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다. 처음엔 식량이었겠지만 추위에 잘 견디고 바퀴살이 발명되어 수레가 끌만한 무게로 가벼워지자 운송수단이 되었다. 수레는 얌나야 문화에서 전차로 거듭났다. 유목민은 얌나야 이래로 농경민에 숫자가 적음에도 군사적으로 우위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기병대였고, 야금술에도 앞섰다. 거주지 자체가 말 사육에 최적지이자 금속산지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언젠가 기마술을 익혔다. 이로 인해 1인당 돌볼 수 있는 가축의 수가 증가하면서 목축의 효율성도 증가한다.

 얌나야인의 확장은 쿠르간 분묘 문화의 확산과 인도유럽어의 확산을 가져왔다. 4900년전 북반구 중위도 지역의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나며 기온이 하강한다. 얌나야 인은 초원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유럽지역을 장악한다. 이들은 동쪽으로도 이동하였는데 이 일파가 아파나시에보 문화를 이룩한다. 얌나야인은 중앙아시아로 진추랳 신타슈타문화와 안드로노보 문화를 이룩했다. 안드로노보문화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 계곡으로 진출한다. 농경민이 이룩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문화가 기온하강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쉽게 진출한다. 그 후손들은 2800년전 서쪽 이란 고원도 침공한다. 그래서 이란의 경전 아베스타와 인도의 경전 라그베다는 모두 샨스크리트어로 내용도 매우 유사하다. 두 종교 모두 생명의 나무와 세상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을 숭배한다. 라그베다의 인드라 신은 초원지대의 초자연적 지배자다. 인도의 고대왕은 즉위하면 말희생제를 치뤘는데 말은 고온습윤한 인도에서 자생하기 어렵다. 이는 인도의 지배집단이 유목문화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3. 아시아로 향한 사피엔스

 아프리카에서 나와 동으로 향한 인간은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아라비아, 인도, 순다랜드, 사훌랜드의 순이다. 빙하기에 해안선이 내려가 인도차이나 반도와 섬들이 연결되어 순다랜드라는 대륙을 형성했고, 호주와 뉴질랜드, 테즈매니아, 파푸아뉴기니가 모두 대륙으로 묵여 사훌랜드를 형성했다. 순다랜드에서 추운 북쪽으로 향한 이들이 티안유안인이 되었고, 동남아사이에 남은 집단이 호아민 집단이 된다. 

 티안유안인은 중국 남부와 북부, 만주, 몽골지역에 자리잡았다. 여기서 더 동으로 간 것이 일본의 조몬인이다. 이들은 동쪽에 격리되어 티안유안인과 유전적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일본 열도는 당시 숲이 많고 바다에 인접해 생산력이 높아 수렵채집민이면서 정착이 가능했다. 1만 6천년 전 조몬인은 토기를 사용했는데 이건 정주의 흔적이다. 2800년전 한반도 기원 농경민에 의해 크게 위축되는데 그래서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한반도 기원 농경민이 90% 조몬인이 10% 정도다. 

 중국 북부의 아무르 강 유역의 티안유안계통에서 아무르강 집단이 분기된다. 이 집단에서 현대 동아시아인의 특징은 두꺼운 모발과 삽모양의 앞니, 땀샘 관련 유전자가 발견된다. 이 유전자는 추위에 적응하며 생겨난 것이며 기후가 더 한랭해지자 아무르집단이 한반도로 남하한다.  

 신석기 시대 농경으로 인구가 급증한다. 아무르강 집단은 수렵채집민이었고 황허는 동아시아 최초로 조와 기장을 작물화했다. 동아시아 유전자 구성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랴오허강은 반농반목문화였다. 이들은 기후가 한랭화하자 적극 남하하여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형성에 기여한다. 양쯔강 중류는 세계 최초의 벼농사 지역이었다. 이들은 6-7천년전 해안에 도달했고 일부가 북으로 이동하여 황허와 섞이고 해안을 따라 올라오는 사람들과 부딪혔다. 이들은 서로 썩여 동북아시아 현대인의 유전자에 기여한다. 홀로세 기후 최적기 이후 동북아시아인은 중원, 랴오둥, 한반도로 이동한다. 양쯔강 하류에서 남으로 이동한 이들은 대만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이스터, 마다가스카르까지 이동한다. 


4. 빙기와 간빙기의 원인

 온난한 신생대 3기가 끝나고 260만년전 부터 기온이 하강하여 4기가 시작된다. 4기는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로 구분한다. 플라이스토세는 간방기가 주기적으로 도래했다. 이는 지구 공전궤도의 이심률, 자전축의 기울기, 자전축의 세차운동 때문이다.

 플라이스토세의 간빙기는 20히 이상이다. 마지막 빙기 후 도래한 간빙기가 지금의 홀로세다. 대략 70만년전부터 지구는 빙기 11만년 간빙기 1만년의 기후 사이클이 있었다. 홀로세는 1만 1700년전 시작했다 지금은 주기상 빙기가 와야할 시점이지만 지구 공전 궤도의 이심률이 낮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 홀로세의 간빙기는 향후에도 수만년간 지속될 예정이다. 

 인간은 20만년전 출현했다. 13만년전 빙기가 끝났고, 홀로세 이전 간빙기인 미이안 간빙기가 시작되었고 이때 사하라가 습윤해져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나올 수 있었다. 대략 10만년전, 7만 5천년전, 5만 5천년전, 3만년전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빙하기에도 열대 수렴대가 북쪽으로 확장했다. 

 11만년동안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2만 5천년 주기로 간방기가 도래했다. 그리고 1500년 주기의 아간빙기가 25차례 도래했는데 이는 대서양의 열염순환때문이다. 남대서양의 따뜻한 물은 고위도로 가서 한랭한 지역을 덥힌다. 그리고 동시에 이동하며 편서풍과 태양복사로 증발이 많아져 염도가 증가해 수온이 낮아지고 밀도가 높아져 심해로 하강한다. 그린란드 부근에서 하강해 다시 남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아간빙기가 오면 빙하가 녹아 담수가 대량 유입되어 대서양 고위도에서 물이 심해로 하강하지 않아 열염순환이 약화된다. 그러면 북반구가 추워져 빙하가 증가하고 다시 담수 유입이 줄어 염원순환은 강화된다. 이 반복이 아간빙기의 주기원인이다.

 홀로세의 또 다른 기후 변화 원인은 적도태평양 해수온도의 변화다. 적도 서태평양은 강력한 무역풍으로 항상 따뜻한 바닷물이 몰려든다. 하지만 무역풍이 약해지면 기온이 내려가며 바닷물이 북과 동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서태평양 해수 온도가 하강하여 인도네시아와 호주 일대에 가뭄과 산불이 증가한다. 동태평양은 기온이 상승해 홍수가 나는데 이것을 엘니뇨라 한다. 4-7년 주기이며 아기 예수라는 뜻이다. 이는 성탄절 즈음해 이 현상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홀로세 후기 400-60년 주기로 서태평양 온도가 내려갔는데 그러면 한반도를 포함한 북반구 여러 지역이 추워진다.

 또 다른 기후 변화 원인은 태양 흑점변화다. 태양 표면 흑점수가 늘면 태양에너지가 강해지는데 이 흑점 주기는 1년이다. 많은 기후학자들은 태양활동의 변화가 사실상 열염순환과 장주기 엘니뇨의 원인이라 본다. 


5. 홀로세의 기후 변화와 문명

 8200년전 갑자기 많은 담수가 대서양에 유입되어 열염순환 교란으로 기온이 3.3도나 내려가 단기 한랭기가 도래한다. 이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많은 수렵집단이 남하한다. 하지만 8000년전은 기후 최적기로 고위도는 산업화 이전보다 무려 3-4도, 중위도는 1-2도 저위도는 비슷하게 기온이 올랐다. 온난화의 영향은 항상 고위도에 더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이 시기 전세계에 초기 문명이 많이 나타난다. 

 황허강 이북에는 츠산문화가 있었고 7천년전에는 양샤오 문화가 있었다. 랴오허강은 싱릉와 문화가 있었다가 6700년전 훙산문화가 생긴다. 훙사문화는 중국의 다른 지역과 다르고 옥을 이용한 공예품이 발달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이 유목이나 목축 기반임에도 계급이 분화했음을 의미한다. 이 신석기 시대 훙산문화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 현대 한국인이다.  

 고조선은 시기상 훙산문화보다는 샤자덴 상층-하층 문화와 시기적으로 관련한다. 4200-3700년전 가뭄과 추위로 사람들은 괜찮은 환경으로 밀집했고 그러면서 문화집단이 생겨난다. 

 8200년전 외에도 4200년전에도 기상 이변이 있었다. 이는 엘니뇨 때문으로 동북아시아의 기후가 건조해졌다. 그래서 지구 상의 여러 문명이 붕괴한다. 아카드 문명, 나일강 고왕국, 인더스 하라파, 중국 룽산문화, 양쯔강 하류 저장성 량주 문화 등이 붕괴했다 기후가 한랭해지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서식지의 악화로 인구가 살기 좋은 곳으로 유입되어 갈등이 유발된다. 이를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기 엘니뇨는 400-600년 주기로 이 시기마다 여러 문명이 붕괴했다.

4200-3900년전 세계 여러 문명 붕괴

3700년전 이집트 중왕국 붕괴

2800-2700년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2300년전 한반도 벼농사 문화 쇠퇴

1700년전 한제국 멸망, 삼국시대 도래

1200년전 멕시코 테오티우칸 문명 멸망

600년전 유라시아 흑사병 유행


6. 한반도의 인구 유입

 한반도에는 대략 5500년 전 부터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격은 아니고 수렵채집의 보조수단이었다. 3000년전에야 정주 농경이 본격화 하였다. 안정적 기후로 숲의 생산성이 높고 삼면이 바다라 어패류가 많았다. 3700-3200년전 외부에서 농경 집단이 들어온 후 농경이 본격화한다. 4천년전 양쯔강 량주문화와 황허강 중산 문화 모두 기후변화로 쇠퇴한다. 이들은 동해안으로 이주해 혼합되고 산둥반도, 랴오둥, 한반도 남부 ,일본으로 이동했다. 이들의 빈자리는 북방 유목민이 차지한다. 기후가 나빠질때마다 북방민은 한반도로 남하하였고 이들은 선진문화도 같이 전파한다.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토기 사용이 가장 늦을 정도로 고대인이 선호하는 지역은 아니었다. 산지가 많았고, 생산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기온이 지나치게 한랭화하면 남하하며 일부가 한반도로 내려왔다. 홀로세 후기가 되면 동아시아 전역으로 농경이 확대되며 인구 압박으로 남쪽을 향한 갈망이 커졌는데 이러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도 본격적으로 선택 된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는 랴오허 지역의 인구의 영향을 많아 받았는데 이 지역은 특히 한랭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기후가 악화될때마다 이 지역 인구가 남쪽으로 이동하며 한반도로도 향한 것으로 보인다. 3200년전쯤 한반도 금강 유역의 송국리 문화는 이들의 작품으로 보인다.

 동북아시아의 기후는 3600년 전부터 습윤해졌고 때 마침 전파된 벼농경 덕분에 한반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민무늬 토기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다. 

 한반도의 송국리 문화는 2800년전 전성기였다가 차츰 쇠퇴하여 2300년전 거의 소멸한다. 이들이 일본 규슈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연다. 한반도는 송국리 문화가 사라져 무주공산이다 다시 북방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빈틈을 채우게 된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유전적 유사성이 높음에도 언어가 전혀 다른데 이는 송국리 문화 때문으로 보인다. 농경민은 송국리 문화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아남아 그들의 언어를 조성했고, 한반도에는 이들이 거의 사라져 새로운 반농반목민이 언어를 형성한 것이다. 

 2800년전에서 시작되어 5-600년 지속된 저온기를 철기 저온기라 한다. 이 때 서유라시아에서는 스키타이가 대대적으로 이동하고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다. 한반도는 벼농사가 쇠퇴하고 북방민이 유입하고 토착민과 갈등한다. 이후 200-300년간이 로마 온난기다. 로마는 전성기를 맞고 중국은 한이 들어선다. 이후 1-100년간 태양 흑점수가 감소해 혼란기가 찾아오고 100-200년에는 흑점수가 증가해 로마는 5현제 시기가 온다. 200-300년은 다시 흑점수가 감소해 대 혼란기가 오고 중국은 삼국시대를 맞는다. 374-468년은 흑점수가 뚜렷히 감소해 기온이 내려갔는데 이 시기가 훈족이 이동한 시기이며 게르만의 대대적 이동을 초래하여 로마멸망의 원인이 된다. 

 한반도는 4세기 후반 부터 기온이 하락했는데 420년이 가장 기온이 낮았다. 고구려 장수왕의 천도는 427년인데 기후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주된 Y염색체는 C2(15%아무르), D(2%조몬), N(5%훙산), O1b2(32%샤자덴), O2(40%), Q(2%)다. 역시 샤자덴의 영향이 가장 강함을 보인다. 이는 기원전 3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큰 변화가 없다. 한국인과 유전적 조성이 가장 비슷한 것은 역시 북중국인이다. 

 일본은 야요이 문화에 이어 다시 한반도 도래인이 들어가 야마토 문화를 형성했는데 이들이 우리와 조상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언어는 일본 야요이 시대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지금의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

 

7. 기후 변화와 문명의 쇠퇴

 책은 기후의 주기적 한랭화와 문명의 쇠퇴를 강조한다. 인간은 다른 생물처럼 정주여건이 좋으면 인구를 불린다. 하지만 기후가 안좋아지면 인구 압박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즉, 인간 이주와 확장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후의 쇠퇴는 문명의 몰락을 가져온다. 기후가 좋으면 각 문명의 인구가 늘고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지만 그 상태에서 기후가 나빠지면 생산성이 악화하여 인구 부양이 힘들고 갈등이 생긴다. 특히 영양상태가 나빠져 전염병이 창궐하기 쉽고, 외부인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침투하고, 사회갈등이 심해져 문명이 붕괴하기 쉽상이다. 

 4200년전은 매우 한랭했다. 이후 1000년마다 기온이 상승하는데 3400-2800년은 청동기 최적기로 미케니, 히타이트, 이집트 신왕국이 전성기였다. 3200년 갑작스런 기후 변화로 문명이 쇠퇴하고 해양민족이 침략해온다. 2800-2300년전은 철기 저온기로 이 기시는 축의 시대다. 세계 10개의 종교가 이 때 탄생하는데 기온 저하로 인한 식량부족과 사회혼란이 종교의 도래와 관련이 깊다. 철기 저온기에는 게르만이 남부로 내려오고 스키타이는 서부로 이동했으며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2250-1600년전은 로마 온난기로 로마의 전성기, 중국은 한이 융성했다. 이후 중세 저온기가 오며 게르만 대이동이 일어나고, 훈족이 이동했으며 중국은 삼국시대가 된다. 이시기 한국의 삼국도 쇠퇴하였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다. 반면 아라비아는 강수량이 증가하여 초지가 많아져 전투와 상업에 필수적인 낙타를 많이 키울 수 있었고 쇠약해진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세력을 크게 넓힐 수 있었다. 서기 800-1200년은 중세 온난기로 중국은 송이 전성기였고 고려도 전성기를 맞이한다. 13세기는 다시 기온이 하강했고 몽골의 침입과 쇠퇴기가 있었고, 1280-1350년에는 소빙기가 찾아와 흑사병이 창궐했다. 1620-1720년에도 한랭기가 찾아왔는데 당시에는 30년전쟁으로 800만이 사망했으며 한반도에는 경신대기근이 찾아온다. 또한 명청 교체가 일어났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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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탄생 - 한국사를 넘어선 한국인의 역사, 개정증보판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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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신이 속한 자연환경에 맞게 진화한다. 하지만 늘 성공적이진 않다. 진화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고 우연적이다. 그래서 그 자연환경에 맞게 신체와 심리가 진화하지 못하거나 적응할 시간이 불충분하다면 멸종하거나 아니면 그 지역을 신속히 떠나야 한다. 

 하지만 인간에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문화다. 인간은 자신이 진화과정에서 얻게 된 높은 지능과 사회성과 언어, 손기술, 모방 등의 능력으로 인해 대규모로 자연을 자신에게 맞게 개조하거나 여기에 적응할 도구로서 의식주를 개발하게 되었다. 문화의 건설 과정은 자연에 주체적으로 대응하고 의도성을 갖는다는 면에서 매우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연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하고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매우 피동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엔 인간의 정신도 같이 작용한다. 여러 문화는 그 자연에 대응하기 위한 심리적 장치도 같이 개발하는데 이는 추후 몇몇 정신적 규율이나 종교적 계율, 법률로 자리잡기도 하며 한 번 정착되면 그것을 만든 자연과 사회가 변함에도 존속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도인은 이제 소를 잡아 먹을 형편이 됨에도 소를 먹지 않고, 이슬람은 여전히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인 역시 한반도라는 곳에 자리 잡으면서 그런 자신들만의 문화와 정신적 기제가 같이 자리 잡았다. 그것을 나름 심도 있게 주관적으로 파헤친 게 이 책이다. 책을 보면서 한국판 '국화와 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인의 정신적 특질은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 타인에 대한 혐오와 경쟁, 그리고 노력과 능력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정신, 위기에 대한 강력한 대응과 협응력 등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반도의 자연과 거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들이다.

 

1. 한반도의 자연과 한국인의 정신

 한반도는 국토의 70%가 산지다. 산은 일조시간이 짧고, 숲으로 우거졌으며, 비탈이 져있어 물을 담아놓기 어려워 농경에 매우 부적합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얼마 남지 않은 평지에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고, 산에 가까우면 평지라도 그늘져서 일조량이 부족해 농사가 잘 안되기에 그나마도 선택지가 적었다. 또한 과거엔 농경지와 거주지가 가까워야만 했기에 그들끼리 모여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자연환경으로 인해 한반도의 농업 생산력을 항상 낮을 수 밖에 없고 부족했다. 다행히 삼면이 바다이고 강도 많은 편이라 어패류를 적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지금도 한국이 1인당 수산물 섭취가 세계 1위인 이유다. 그래도 먹을 것이 부족하기에 산과 숲을 파고 들었고 먹을 만한 온갖 것들을 찾아내 먹기 시작했다. 한국의 밥상에 나물이 무척이나 많은 이유다. 풀은 쓰고 독이 있기에 한국인은 그 중 그나마 그런 것들이 적은 것을 찾아내었고, 데치고 소금물에 삶고 맛을 내어 이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어에는 해조류와 여러 초목들을 지칭하는 낱말들이 세계적으로 많다. 

 한국인은 과도한 근무시간과 능력주의를 숭상하는 경향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높고, 수면이 부족하며, 술과 담배를 많이 한다. 이는 모두 수명을 갉아 먹는 행위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꽤 높은 편인데 이는 전통적인 한식 식단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부족한 생산성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항상 비관하게 만든다. 아무리 뼈빠지게 열심히 일해도 잉여가 생기지 않고 어쩌다 잉여가 생겨나도 한 두해 가뭄이나 홍수라도 만나면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경쟁과 능력을 추앙하게 한다. 늘 살기가 빡빡하기에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늘 열심히 일해야 하고, 그러지 않은 자는 매우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때문이다. 또한 언급한 것처럼 이웃과 모여 살고 늘 그들과 적은 식량을 나누어야 하기에 이웃을 항상 감시하고, 관여한다. 그리고 그들을 일반적으로 싫어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가 죽을 위기라도 놓이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까지 구하려 한다. 이는 이웃이 평소엔 경쟁자이지만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서이다. 벼농사는 노동집약적이다. 서유럽의 밀과 달리 순간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요하는데 김매기나, 모내기, 추수, 탈곡의 과정이 그러하다. 순간 많은 노동이 짧은 시간에 필요한데 그것을 위해서는 타인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타인을 혐오하고 경계하고 경쟁하고 이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의심하면서도 모순되게 타인과 이웃에게 늘 도움을 주려 하고, 정이 있으며 위기에 처한 타인을 보면 일면부지의 경우라도 적극 돕는 경향이 있다. 


2. 한국의 음식과 술

 한국은 늘 음식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보니 최대한 많이 먹어두려는 경향이 있다. 과거 선교사들은 구한말 조선의 어머니들이 최대한 자식의 배가 터질때까지 먹이고 배를 두드리며 그것을 확인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또한 서양인들은 조선인들의 대식 문화에 경악했고,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명군은 조선인의 대식습관을 보고 놀랐고, 조선인은 중국인과 일본인의 소식을 보고 놀랐다. 때문에 전략적으로 서로의 군량 상황을 착각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조선인이 보기에 일본인은 지나치게 적은 군량에도 오래 버텼고, 일본인이 보기에 조선은 반대였다.

 한국인의 주식은 밥이다. 이는 다행히도 벼농사가 한국에서 가능했고, 쌀이야말로 전 세계의 작물중 단위 면적당 인구 부양력이 가장 높기에 매우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식단은 이 밥을 먹기 위해 구성된다. 한국인의 밥상, 한식은 국이나 찌개. 탕류와 각종 반찬으로 구성된다. 이는 모두 밥을 많이 먹기 위함이다. 반찬은 대개 짜고 시큼한데 이는 식사를 할 때 타액을 내고 감칠맛을 내어 밥을 수월하게 먹게 만든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밥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곡물을 밥과 그것이 아닌 잡곡으로 나누며 밥이 아닌 다른 것을 끼니로 때워도 밥을 먹었냐고 지칭한다. 그리고 해마다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쌀 이외의 다른 것을 더 많이 먹음에도 아직도 한식을 고집한다. 

 그리고 음식이 짜고 자극적이며 술을 많이 마신다. 이는 언급한 것처럼 땅의 생산성이 낮아 극도로 일하게 버텨야 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자극의 추구다. 그래서 중국의 옛 사서들은 하루 종일 술먹고 춤추고 노는 한국인들을 매우 이상하게 바라 보았다.  

 한국인은 마늘과 쑥도 많이 먹는다. 오죽하면 건국 신화인 단군 사회에 호랑이와 곰의 인내력을 시험하기 위해 등장한 작물도 마늘과 쑥이다. 이는 먹을 것이 부족함과 관련한다. 이것저것 먹어야하다보니 탈이 날 일이 많았고, 세균에 감염되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마늘과 쑥은 강력한 항균작용을 한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음식에 마늘과 쑥, 특히 마늘을 때려 넣는 것은 단지 맛과 향 외에도 생존을 위해 중요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마늘 소비량이 압도적으로 세계 1위인 이유다.


3. 한국의 산성과 활

 한국은 불행히도 자신들보다 강한 이웃을 두었다. 중화제국은 근접한 최대 위협이다. 한국보다 땅이 압도적으로 넓고 생산성도 높기에 통일된 중화제국의 인구는 늘 한반도 왕조 인구의 10배 이상이었다. 그리고 일본도 위협이다. 일본은 섬나라로 문명의 전파의 끄트머리에 있었기에 미발전으로 오랜 기간 큰 위협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은 한반도보다 1.7배 넓고 한국처럼 산지가 많지만 평지가 더 많고 농업생산력이 높아 충분히 발전만 된다면 강한 위협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 이르러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여튼 오랜 적은 중화제국으로 이들의 침공은 장난이 아니었다. 적은 수로 한국이 이들을 막는 방법은 원거리 무기로 최대한 수를 줄이고 산성에서 이들을 막는 것이었다. 한국의 활을 매우 우수하다. 합성궁으로 위력이 강력하면서도 산성에서 쏴야하고 최대한 많은 적에게 자주 화살을 퍼부어야 했기에 내구성이 좋으면서도 적은 힘이 들어야 했다. 이를 모두 만족하는 것이 한국의 전통 합성궁이다. 한국의 활은 30kg미만의 힘으로 쏘는 것이 가능하며 작고 가볍기에 들고 다니기에 용이하다. 

 많은 수의 적을 대적하는 또 다른 방법은 산성이다. 한국은 화강암 지대에 위치하다보니 이를 이용해 매우 견고한 성을 쌓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다보니 적이 침공할 때 지날 수 있는 행군로가 정해져있다. 그래서 한반도의 왕조들은 적이 그냥 지나치기엔 매우 뒷통수가 가려울 만한 곳들에 산성을 쌓았다. 산성은 매우 점령이 어렵다. 일단 점령하려면 산을 올라야만 하고, 평지에서도 성은 높은데 산성은 경사로 인해 더욱 높다. 또한 지형을 잘 이용하면 접근 가능한 곳이 정해져 있어 포위 및 공략도 어렵다. 때문에 산성은 적은 인구로 많은 적을 막아내기에 맹 적합하다.

 유럽과 일본의 성,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성은 판이하게 다르다. 유럽과 일본의 성은 매우 작고 높아 점령이 거의 불가능한다. 이는 지도층들만을 보호하기 위한 성이라서이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성을 넓은 읍성으로 상당한 고을과 백성을 보호한다. 한국은 평소엔 평지 읍성에서 지내다 전란이 발생하면 산성으로 피신한다. 때문에 한국의 고대 왕조들은 평소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 수도를 평지에 두다가도 전란시엔 방어를 위한 산성을 인근에 반드시 마련했다. 하지만 산성은 치명적 약점이 있다. 산에 고립되기에 포위되면 후퇴로가 없고, 산이기에 비축 물자가 적다. 그래서 적을 빨리 물러나게 해야했기에 한반도와 왕조들은 산성으로 들어가기전 대대적 청야를 하여 적이 포위를 오래 못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적들은 산성공략에 조금씩 병력이 깎여 나가거나 공략을 못하고 지나쳤다고 보급로가 차단되기 일쑤였고, 퇴각하다 산성에서 나온 한반도 왕조들의 병력에 의해 낭패를 보기 쉽상이었다. 

 한반도의 성전술을 수전에도 이어졌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기에 수군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일찍이 수군을 양성했는데 최소의 병력으로 적을 섬멸하는 산성, 원거리 전술이 수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려는 창을 꽂아 놓은 선박을 운용하였고, 더 나아가 검을 꽂아놓은 검선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판옥선은 이를 이어 무겁고 육중하였고 망루를 닿아 적을 내러다보면서 성처럼 작용하였다. 그리고 고려말 화포가 개발되면 이 화포를 적극이용해 적을 원거리에서 섬멸하였고 가까이오면 성으로 작용해 못오르게 하고 견고하게 부딪혀 침몰시켰다. 

 한국은 인구가 적기에 병력을 온존하고 적은 최대한 살상해야 했기에 원거리 무기에 대한 집착은 화약시대로도 이어졌다. 임진왜란에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고는 매우 적극적으로 조총부대를 양성하였으며 청은 남한산성에서 그 정확도로 인해 적지 않은 낭패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조선에 나선정벌 병력을 요구하게 된다. 

 이는 현대로도 이어진다. 한국과 북한은 과도한 포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원거리 사격에 대한 고대로부터의 집착때문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국방부를 포방부라고 하기도하며 한국의 자주포 전력과 미사일을 포함한 원거리 화력은 그야말로 세계적 수준이다.


4. 한국인의 형성, 현종과 정도전

 한국은 삼국시대에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외양만 그렇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럴만한 것이 삼국의 분열 기간을 매우 길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700년 가까이 된다. 그러던 것이 신라 통일 이후 200년 정도가 지나고 고려가 되었다고 해서 하나가 되기를 물리적으로 시간이 짧았다. 그래서 고려초기만 해도 각 지방의 사람들은 고려인이나 신라인 보다는 백제인 고구려인라는 정체성이 강했다.

 그러던 고려인을 하나로 만든 것이 거란의 침공이다. 이 강한 국난은 각자 다른 삼국의 사람이라는 의식을 국난 앞에 똘똘 뭉치게 하여 희석시켰다. 또한 국난을 성공적으로 국복한 고려 현종은 피란 길에 자신을 환대한 김은부의 세 딸을 왕비로 맞는다. 현종은 신라왕족의 피를 이으면서 고려의 왕이었는데 백제계인 김은부 집안을 맞이함으로써 왕가의 혈통자체가 삼국통일을 이룬다.

 그리고 한국인의 의식을 또 다르게 형성한게 조선의 실질적 창업자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자로 성리학은 발전과정에서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공자, 순자 체제에서 공자, 맹자 체제로 변모한다. 순자는 백성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았지만 맹자는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군주민수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성리학에서 백성은 왕이나 관리가 지배나 통치가 아닌 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 백성을 위해 설계된다. 건국 직전에 토지를 모든 백성에게 분할 했으며 고려 때만해도 세율이 소출작물의 30-70%에 달했지만 겨우 10%로 줄어든다. 또한 관료들의 급여가 매우 적었고 강력한 성리학적 도덕으로 무장했기에 겉으로라도 청백리로 살아가거나 명예를 추구해야만 했다. 조선엔 공덕비나 송덕비가 많은데 사실 이는 중국에선 귀족 계층들끼리 서로를 칭송하는 자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공덕비나 송덕비는 백성이 관리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웬만한 목사나 현령, 관찰사는 이런 공덕비 정도는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으며 백성은 백성대로 이런 비를 세우고 제법 괜찮은 지방 관리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라도 날라치면 상당히 원거리까지 쫓아가며 만류하여 조정에까지 소식이 들리게 만드는 쇼를 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자체도 백성을 위한 도구다. 한글의 창제로 인해 백성은 글을 쓰고 알 수 있게 되었고 이것으로 민원을 넣을 수 있었다. 조선은 그야말로 민원의 나라였다. 왕은 공식적으로는 상소를 수도 없이 받았고, 글을 못쓰는 백성은 신문고를 두드리고나 지나가는 상류계층의 가마앞에 엎드려 읍소를 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민원을 과감히 청구했다. 

 즉, 조선의 행정기관이나 관리, 심지어 왕마저도 백성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설계한 이런 조선의 체계는 몹시 척박한 땅에서 경쟁하며 살아가고 남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인의 정신과 결합하여 자신이 무척이나 대접받아야 하고, 타인의 비리 및 불의를 잘 보지 못하며, 공정하지 못한 것을 도무지 참지 못한다.

 이는 현대 한국으로 이어진다. 한국인은 적어도 자신의 욕구를 억압한 일제시대와 독재시대가 끝나자 관과 기업에 많은 것을 요구한다. 기업의 제품은 반드시 완벽해야 하고 자신에게 품질상의 문제로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관 역시 자신의 민원을 받아줘야 하고 빨라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기업과 관청을 민원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는 고품질의 제품과 세계에서 가장 빠른 민원 처리로 이어졌다. 

 이런 한국인의 자연에서 비롯된 독특한 정신은 생존을 위한 강한 노력, 남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는 노력과 경쟁,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정신, 평소엔 서로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서 국난에서 모든 힘을 결집시키는 능력들이다. 이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원동력이 된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 하며 다음 권을 예고했는데 이런 한국인의 특질과 경제성장 및 민주화, 정보화와 이를 관련시키려는 듯 하다. 다음 책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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