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지식인마을 25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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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를 읽고 과학철학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 개인적 부족함으로 다른 책을 찾다 포퍼와 쿤에 대해 쓴 이 책을 찾았다. 다행히 직장내 전시리즈가 완비된 지식인 마을 시리즈였다. 게다가 저자가 장대익 교수다. 쉽게 책을 잘 쓰는 분이다. 진화론 부분만 저술한줄 알았더니 이 사람 과학철학에도 조예가 있는 것 같다. 

 과학철학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한다. 일반 과학철학과 개별과학 철학인데 일반 과학철학은 과학의 합리성은 어떻게 보장하는가? 관측되는 외부 대상은 정말 실재하는가? 경험으로 어떻게 과학이론을 지지하는가? 같은 과학 전반의 전제같은 것들에 대한 질문들을 다룬다. 개별과학 철학은 글자 그대로 개별 과학에서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들. 즉 이기적 유전자에서 어떻게 이타성이? 종교는 유전자에서 비롯되었는지? 인공지능은 가능한지? 등을 다룬다. 이 책은 일반 과학철학을 다룬다. 

 일반적으로 과학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이론으로 세우는 방법으로 처음 제시된 것은 귀납주의다. 귀납주의는 자료수집, 일반화, 가설의 정당화 단계로 이론을 세워나간다. 초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철떡같이 믿던 이 귀납주의에는 소위' 귀납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자료 수집시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는 점과 자료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모든 자료 수집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유럽내의 모든 백조가 흰색이었지만 호주에서 발견된 한마리의 검은 백조는 이런 귀납의 문제를 잘 지적하는 사례다.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검은 백조는 서구사회에서 뭔가 상당히 놀라운 예상밖의 일을 상징하는 듯하다. 실제로 몇년전 블랙 스완이란 책이 있기도 했다.

 이런 귀납주의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가설 연역주의다. 가설 연역주의에서는 귀납과는 다르게 우선 온갖 방법을 통해 가설을 세우는 것이 먼저다. 그 다음 가설로부터 새로운 관찰과 실험결과들을 연역적으로 이끌어내 이를 경험에 비추어 시험해 보는 형태로 이론을 만들어 나간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귀납과 마찬가지로 순서만 바뀌었을 뿐 결국 사례를 통한 이론의 확립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설 연역주의는 매우 꼼수같긴하지만 모든 걸 다 다룰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시험해야 하는 증명이 검증의 개념을 버리고 다소 약한 입증 정도로 이론을 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입증역시 결국 그 수의 한계로 이론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입증된수/무한대의 전체사례는 결국 설득력 0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귀납을 통한 즉, 개별 사례의 실험을 통한 이론의 정립에서 벗어나고자 한것이 '쿤의 반증주의'다. 반증주의에서도 역시 우선 가설을 제시한다. 두번째 단계가 다른데. 정말 역발상이다. 이를 어설픈 수의 사례로 불가능한 입증을 하려기 보다는 가설을 부정하는 반증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즉 어떤 가설을 이론으로 만드는 것은 그걸 증명하는 사례를 일일이 불가능하게 찾는게 아니라 가설을 부정하는 사례가 나오기 전까진 그걸 이론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가설을 부정하는 사례가 바로 반증이다. 쿤은 모든 진술이 다 반증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며 바로 경험적으로 반증할수 있는 가설을 다루는 학문을 과학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쿤의 반증주의도 문제에 봉착하니 하나는 과학자들이 실제 과학을 함에 있어 매우 성공적인 경우에도 이런 엄격한 반증주의 식으로 일을 하지 않는 다는 실제적인 점이며 다른 하나는 성공적인 과학에서도 반증불가능한 명제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과학에선 이미 인정하는 블랙홀의 존재나, 꽤 공론화 되고 있는 암흑에너지나 암흑물질 같은 것들은 사용하지만 반증을 거의 불가능하다. 현시점에서는

 반증주의에 더욱 치명타를 날린 것은 바로 '반증 불가능성'이다. 반증이라는 것이 애초에 철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반증을 한다면 단순히 검지 않은 까마귀 하나를 찾으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의 반증을 위해 많은 명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까마귀를 정확하게 인간이 정의하고 구분할수 있다. 혹은 검은 색이 어떤것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구분할수 있고, 이를 인간의 눈이든 측정도구든 하여튼 명확하게 할만한 측정기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 등등. 이처럼 명제 하나는 단독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명제와 함께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이 콰인의 경험적 전체론이며 이론 인해 반증이란 것을 철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린다. 

 이 때쯤 형태주의 심리학이 등장하는데 이는 과학하기에 더욱 치명타를 날린다. 형태주의는 그 유명한 마녀-젊은 여자 그림, 토끼-오리 그림처럼 인간의 관찰의 합리성과 객관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기본적으로 귀납, 가설연역주의, 반증주의 모두 인간의 합리성을 전제로 깐 것이기에 이는 매우 결정적 위기였다.

 이 때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이다. 쿤에게 과학은 패러다임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되는데 패러다임은 과학자나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을 망라한 총 집합체이며 문제해결을 위한 성공적인 범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즉, 이론적 정합성과 실제 문제해결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쿤에 의하면 과학은 정상적으로 운영되다가 어느 날 기존 이론으로 설명이 안되는 변칙적인 사례들을 맞이하게 되며 이 사례가 증가하기 시작하며 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 사례들을 잘 해결하는 새 대안 이론이 등장하며 기존의 과학자들은 이 새 이론으로 쏠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어리석게도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면 패러다임의 교체는 완성된다. 이 일련의 과정이 과학 혁명이다. 

 이런 쿤의 의견은 포퍼와 상당한 충돌을 일으켰는데 이 둘을 종합하고자 한 것이 라카토슈이다. 라카토슈는 이론에 대한 반례를 다룸에 있어 포퍼는 반증주의에 따라 즉각 기존의 이론을 폐기하고 쿤은 패러다임의 위기 전까지는 정상과학에서 이런 반례를 어떻게든 기존 이론내에서 설명하려는 양 극단을 벗어나고자 했다. 라카토슈가 제시한 것은 연구프로그램 방법론인데 내가 보기엔 쿤의 패러다임과 거의 유사하다. 라카토슈에 의하면 연구프로그램에는 건드릴 수 없는 가장 핵심이론인 견고한 핵부분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가설로 한 이론이 이루어진다. 반례가 등장할 경우 견고한 핵부분은 건드리지 않고 보조가설을 확대수정하는 방법으로 연구프로그램이 진화해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책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과학철학자는 파이어아벤트이다. 그는 반규칙론을 제시하며 사실적이지 않은 이론까지 개발하고 수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과학에서의 창의성 및 발전이 말살될 것이라 지적하였다. 그의 이론 생각은 이론 다원주의로 어떤 이론이든 지식시장에 자유롭게 나올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특정한 방법론으로 막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가히 과학계의 아나키스트라 할만하다.

 이처럼 과학하기는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흔들리고 있는데, 거기에 구성주의로 무장한 사회구성주의자들까지 합세한다. 이들은 과학에서 피할 수 없는 관찰엔 반드시 사람의 주관과 이론의 영향을 받는다는 관찰의 이론 적재성, 경험자료만 가지고서는 이론 같의 우위를 정할 수 없다는 이론 미결정성, 서로 다른 경합 이론간에는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용어와 기준을 사용함으로써 결국은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공약볼가능성을 든다. 

 사실 이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어렵지만 저자인 장대익 교수는 이런 사회구성자들의 예시가 지나치게 극단적임을 지적한다. 철학 논리적으로는 그러하나 실제의 대부분 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백조가 모두 희다라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검은 백조는 사실 거의 없는 극단의 사례다. 과학하기에서도 위와 같은 극단은 드물다는 것이다. 거기에 언제나 객관적으로 외부에 실재하는 자연의 존재가 과학자들이 판단을 결국은 바른 방향으로 제약하며 과학하기에는 엄격한 인식적 규범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과학은 상대주의 과학관을 벗어나는 것은 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매우 어려워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과학의 토대가 철학적으로 빈약함에도 현대과학의 성과는 매우 성공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철학적으로 학문의 토대를 털고나면 과연 어떤 학문이 그 정당성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과학이 여기에 매우 민감하게 구는 것은 과학이 절대적 진리나 법칙, 원리의 발견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전작에서 읽었던 장하석 교수의 책처럼 목표를 단순히 진상찾기 정도로 낮춘다면 해결된다. 

 거기에 과학자들은 과학철학을 좀처럼 신경쓰지도 않는다. 빅뱅이전을 고민하는물리학자나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가 과연 위 4명의 과학철학자들의 엄정한 과학하기를 신경쓰거나 자신의 연구의 논리적 철학적 빈약함을 생각하며 연구를 수행할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런걸 신경안써도 과학은 사실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장대익 교수는 이른 문학 비평가와 소설가의 예로 들었는데, 성공적인 소설가임에도 문학 비평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문학 비평에 신경쓰는 소설가는 다른 형태로 소설을 바라 보는 혜안을 갖긴하겠지만 그것이 또한 성공적 소설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과학철학자는 여기서 문학비평가에 과학자는 소설가에 해당한다. 즉, 과학철학적 시각을 갖춘 과학자는 성공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단순히 과학에만 빠져 있는 것 이상의 혜안을 얻고 과학을 전혀 생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과학철학의 과학에 대한 의미를 긍정적으로 부여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당연히 결핍된 인간이 하는 인문학의 일종이기에 그냥 한계를 인정하고 그 범위내에서 해 나가야할까? 아니면 과감히 신에 도전하는 것을 멈추고 원리나 우주의 진리 같은 것에서 진상을 밝히는 수준으로 내려가야할까? 아니면 성공적이니 이런 논리적 문제를 신경쓰지 말고 단순히 과학하기만을 해야할까?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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