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겸재 정선 - 진경산수를 개척한 우리나라 화성 ㅣ 새로 쓰는 화인열전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6년 2월
평점 :
조선 후기는 회화가 진경 산수화로 변하고, 그림의 대상과 주제가 성리학적 관념을 넘어서 일상생활, 일반 백성으로 이동하는 한국 예술사의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그 변곡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겸재 정선이다. 정선이 개척한 진경 산수화에 대해 사실 교과서에서 절반 만을 가르친다. 진경 산수화가 조선의 산수를 실제에 가깝게 그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산수화의 주제와 대상이 중국의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산수에서 조선의 산수로 옮겨간 것은 맞지만 진경산수는 그것을 실제에 가깝게 치밀하게 그리기 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인상을 그리는 것에 가깝다.
즉,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산과, 바다, 강,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되 실제를 정확히 묘사하기보다는 대상에게서 받은 생각과 느낌 등을 화인이 주관적으로 그리는 것이된다. 서양 예술 사조로 친다면 인상주의나 추상주의로 나아가는 모더니즘 경향과 매우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님이 겸재 정신에 대해서 쓴 책이다. 과거에도 이런 책을 쓰셨는데 그간 한국 미술에 대한 연구가 양,질적으로 모두 깊어지며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책을 거의 다시 쓰셨다 한다.
정선은 조선시대 사람 치고는 84세까지 장수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젊어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정선은 40세까지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60이 넘어서야 그 진가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정선의 대표작인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포는 모두 국보급 문화재로 정선이 70대 이후에 그린 것들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선의 회화 발전 시기를 다음의 3단계로 나눈다.
우선 모색기로 60대 이전으로 진경산수를 개척해나가는 시기다. 신묘년 풍악도첩, 북원수회도, 사계산수화첩, 의금부계회도, 구학첩, 내연산 삼용추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다음은 60대로 확립기이다. 진경산수 화풍을 완성한 시기다. 대표작은 청풍계도, 서원소정도, 경교명승첩, 연강임술첩이 있다. 마지막은 완숙기로 70대 이후다. 진경산수의 경지에 이르러 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시기다. 대표작은 계상정거도, 정묘년 해악전신첩, 인왕제색도이다.
정선은 평생 그림을 쉬지 않고 그렸다. 예술을 사랑하기도 하고 여기 저기서 밀려드는 그림 요청을 대개 수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다작한 작가이며 작품도 현재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정선은 다른 화인들과 다르게 양반 출신이다. 광주 정씨로 증조부 정창문이 벼슬하지 못했고 그 아들 3형제도 급제를 못했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3대가 벼슬을 하지 못하면 한미한 집안으로 추락했는데 정선의 가세가 딱 그러했다. 그래서 정선은 40세까지 궁핍한 삶을 이어간다. 그런 정선에게 관직의 길을 열어준 것이 안동김씨 집안이다. 이들은 청운동 일대에 살았고 이 지역을 장동이라 불러 다른 안동김씨와 구분해 장동김씨라 불렸다. 순조, 헌종, 철종의 장인인 김조순, 김조근, 김문근이 바로 이 장동김씨다. 이들은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후예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이 공조참판, 김수항이 영의정, 김수증도 영의정에 오르며 집안이 궤도에 오른다. 그리고 김수항의 아들 6인이 창자 돌림으로 겸재와 인연이 깊다.
이들 중 김창집이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들의 고조부가 겸재의 고조부와 매우 친했다. 그래서 집안이 가까웠던 것이다. 김창집의 동생 김창흡은 형과 다르게 진사시에 합격하도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한다. 그는 진경산수화와 비슷하게 진경시를 추구했는데 이게 정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창흡은 정선의 학문적 스승이었다. 장동김씨 들은 회화에 관심이 깊어 많은 작품을 수장했는데 정선도 이를 감상하며 회화에 대한 조예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겸재는 학문에도 밝았는데 대학과 중용 등 경학에 능했고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직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다 가세가 힘들어 김창집에 관직을 요청해 그의 추천으로 41세가 되어서야 종9품의 말단직 천문학겸교수가 된다. 당시 김창집이 좌상으로 관상감의 제조였기에 가능했다. 관상감의 직책은 대개 중인이 맡았지만 이처럼 한미한 양반들이 진출하기도 했다.
겸재는 36세에 처음 금강산을 유람하고 신묘년 풍악도첩을 그린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금강산을 유람하고 해악전신첩도 그린다. 겸재 당대에는 중국과 교류가 많아 많은 중국의 화풍이 조선에 들어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정선도 남종문인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를 묘사하거나 그런 풍으로 그린 그림들이 젊어서는 많다. 겸재는 이처럼 당대의 조선회화의 전통인 절파풍 전통에 신사조인 중국의 남종문인화풍에서 시작해 자신의 개성인 진경산수화로 나아간 셈이다.
겸재는 신묘년 풍악도첩에서 부감법과 수지법과 점경인물을 보인다. 겸재는 중국과 우리의 자연이 다르기에 중국의 나무 그리는 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우리 산천에 걸맞는 줄기가 굽은 소나무와 무리짓는 솔방울을 그렸다. 그리고 중국의 점경인물(작은 인물 그리기)은 자세하지 않고 단순한 반면 겸재는 그것을 따르면서도 동작을 실감나게 표현해 차별점을 두었다. 그리고 겸재의 작품에는 유머와 시사성이 있다. 그림을 보면 이게 무슨일인지 추론해볼만한 서사가 있는 경우가 많고, 금강전도 같은 그림에도 곳곳에 사자바위를 그려넣는 등의 해악이 있다.
겸재는 해악전신첩을 금강산 방문 후 그렸고 35년인 전성기 72세때 이를 다시 그렸다. 둘다 남아 있어 겸재의 화풍이 진경산수로 어떻게 발전하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해악전신첩의 전신은 대상의 외형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 담아내는 것을 말한다. 원래 전신수법은 인물의 정신을 담아내는 초상화의 기법이었으나 그것이 산수까지 확대된 것이다.
겸재는 45세인 1720는 하양현감에 제수된다. 하지만 이듬해인 1721년 신임사화가 생긴다. 이는 경종때 노론 4대신이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그에게 정무대리까지 맡길 것을 주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이 주장은 관철되었으나 훗날 소론이 극렬히 반대하여 이 주장을 펼쳤던 노론 4대신이 화가 미친다. 그들 중 하나가 김창집이었다. 그의 은혜를 입은 겸재로서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조선시대 화가 주변 사람에게 미치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창집은 유배되어 사사된다. 하지만 경종이 오래 살지 못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판이 뒤집히고, 김창집은 결국 복권된다.
겸재는 50대에 영남의 명승 쌍도정도를 그린다. 이는 성주 관아의 객사인 백화현의 정원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쌍도인 이유는 정원 내에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두 개 인공섬이 다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양현감 시절 겸재는 환곡을 제대로 걷지 못해 최하위 인사고과를 받는다. 그러다 55세 정기인사에서 종6품 한성부 주부를 제수 받고 이어 의금부 도사가 된다. 의금부 인사들은 자주 계회를 가졌는데 겸재도 의금부계회도를 그린다.
한편 겸재는 사헌부 지평 김한운의 탄핵상소로 파면된다. 표면적 사유는 겸재가 잡기로 발신하여 전문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실제 겸재는 대과로 입직하지 못했고, 학문이나 관료로서의 재능보다는 환쟁이로서의 명성이 훨씬 컸기에 이와 같은 공격을 평생에 걸쳐 받게 된다. 탄핵 후 겸재는 백악산 아래 인곡정사를 짓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한다. 60대에 이곳을 그린게 인곡유거도이다.
겸재는 진경산수로 평생 금강산과 영남의 명승, 장동8경으로 대변되는 한양의 명소를 주로 그렸다. 장동은 지금의 인왕산 동쪽과 백악산 서쪽 사이의 지역이다. 오늘날 청운동,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 신교동, 통인동, 통의동, 창신동, 궁정동, 효자동을 아우른다. '
정선은 1733년 청하현감에 제수된다. 청하는 지금은 포항시의 일부가 되어 지역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관리의 고과는 직속상관이 6개월마다 실시해서 보고했다. 이를 일고라 한다. 상중하 3등급으로 평가했는데 다행히 정선은 이번엔 십고십상을 받는다. 이는 10번 연속 상등급 평가를 받은 것으로 순포라 칭했고 보고시 채록하여 승진의 참고자료로 삼았다. 겸재는 청하현감 시절 친우인 삼척부사 이병연과 간성군수 이병성은 만나려 동해안을 거슬러 올랐는데 그러면서 관동8경을 유람하고 이를 화폭에 남긴다.
그는 내연산의 삼용추를 그렸다. 내연산은 영덕과 포항사이의 산으로 보경사라는 고찰이 있다. 내연산의 용추계곡에 3연 폭포가 있어 삼용추라 하는데 연산폭포, 관음폭포, 잠룡폭포의 순이다.
한편 정선은 60세의 나이에 92세 노모가 돌아가셔 서울로 상경한다. 3년 상을 치루고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는 동안 관동명승첩과, 청풍계도, 세검정도 등을 그린다. 세검정은 서울에 있는 정자로 지금이야 개울이 있는 주택가에 휩싸여 정취가 없지만 과거엔 개천이 흐르고 산천이 느껴지는 정자로 장안의 선비들이 장마철에 풍류를 즐기러 자주 찾는 곳이었다.
겸재는 65세인 1740년 양천현령으로 제수된다. 현령은 현감보다 품계가 높은 곳으로 정선은 승진한 셈이다. 다만 70세가 되자 현령에서 물러난다. 70세가 당시 조선의 현령의 정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전국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그리는데 이전에 비해 디테일은 생략하고 대상을 과감하게 재구성하여 원숙하고 개성적 필치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묵담채에 머무르지 않고 청록채색도 구사하며 산수화가 장엄하고 화려해진다.
겸재가 그린 계상정기도는 1천원권에 나온 도안이다. 이황의 인물화가 그려진 반대편에 있다. 이는 71세 때 그린 것으로 도산서원 자리에 있던 계상서당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않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70대에 정선은 다시 금강산을 그린다. 임진년 그린 해악전신첩을 다시 그려 정묘년 해악전신첩을 그린다.
겸재의 대표작 금강전도는 여러 폭이 있다. 정선은 금강산을 여러 번 그렸는데 신묘년 풍악대첩에 금강 내산이 있고, 72세 정묘년 해악전신첩에도 금강내산이 있다. 그래서 같은 대상을 그렸기에 그의 화풍이 얼마나 다르게 발전하였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는 76세에 인왕제색도를 그린다. 인곡정사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대작이다. 묵을 짙게 써서 대비를 이루는데 정선의 그림과 좀 다른 느낌이 든다. 저자는 당시 정선의 친우들이 죽음을 맞이한 시기라 인생에 대한 무상함과 슬픔이 가미된 것을 이유로 생각한다.
마지막 대작은 박연 폭포다. 이전까지만 해도 겸재는 대상의 디테일을 강조하는 편이었으나 이 작품에 이르러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버리고 과장으로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독특한 묵법과 필법으로 순수 조형의 힘과 아름다움을 보인다.
겸재는 79세인 1754년 사용원 첨정에서 사도시 청정 종4품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80세에 정3품 첨지중추부사로 승진한다. 경국대전에 80세에 이르면 양천을 불문하고 한 품계를 승진한다는 규정덕이었다. 그리고 숙종의 비 인원왕후의 칠순이 이듬해 있어서 다시 한 품계 승진한다. 그래서 무려 종2품 동지중추부사가 된다. 당상관이 된 셈인데, 그리 되면 조상들의 품계도 올려주게 된다. 집안의 영광인 셈이다.
겸재는 1759년 인곡정사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대가는 오래도록 살면서 평생을 수련해 발전하여 대기만성한다. 그는 진경산수로 조선만의 산수를 완성했고 18세기 이래로 많은 화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일천원권에서 그의 그림을 늘 볼 수 있는 이유다. 정선의 작품은 박물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의 탄생 350년을 기념하여 작품을 모아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녀온 분들인 귀한 기회를 놓치지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