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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평점 :
한국의 역사는 매우 길며, 그 예술의 역사 역시 매우 길다. 책은 도자기, 불교 사찰, 탑, 불화, 고분, 건축, 서원, 궁, 서체, 회화, 공예까지 한국 미술의 거의 모든 것을 총 망라한다. 책은 기본적으로 시대순으로 진행되지만 각 시대의 중점이 되는 미술품을 주로 다루며 그 흐름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역사와 예술사의 흐름, 그리고 우리의 미술품을 눈으로 다양하게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1. 삼국시대
가. 삼국시대의 도기
삼국시대의 도기는 회색 연질도기에서 흑색 경질도기로 전환된다. 가마에서 1000도 이상 고온으로 구워 견고하다. 고구려 도기는 신라, 가야 도기와 계통이 다르고 발굴양도 이상하리 만치 적다. 백제도기는 고구려 보다는 경질이나 신라 가야보다는 연질이다. 그리고 특이한 기형이 많다. 신라, 가야 도기는 최고품질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5세기 들어 대량생산되며 정교미가 다소 쇠퇴하고 6세기에 불교가 유행하자 대형고분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며 제작 도기의 양이 크게 줄어든다. 신라의 상형도기는 수레나 마차, 지게, 배 등 구성이 기발하고 형태가 다양하다. 가야의 도기는 일본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다.
통일 신라의 도기 기술이 발전하여 청자의 초보 형태인 삼채와 녹유가 되었다. 삼채는 당나라의 것으로 납으로 만든 연유에서 철, 구리를 섞어 초록, 노랑, 갈색의 3색을 낸다. 녹유는 잿물 유약을 도기에 입힌 것으로 환원염이면 청록산화염으로 구우면 환갈색이 된다.
나. 삼국의 무덤
고구려는 초기 돌무지 무덤이다. 장군총은 7층으로 무려 사방 33미터에 높이가 13미터다. 고구려는 3세기부터 돌흙방무덤이 유행한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초기 초상화 중심으로 공적, 사적 생활상이 나아다가 중기에는 초상화가 간략화하고 행렬도와 생활풍속도가 나온다. 후기 벽화는 장식무늬화 사신도다. 550년 무렵이면 프레스코대신 벽에 직접 그려 생동감이 있다.
백제무령왕릉은 완벽한 벽돌무덤으로 한 칸 크기 무덤으로 중국 남조식이다.
신라는 부자 세습을 확립한 눌지 마립간 시기부터 거대 봉분을 축조한다. 신라는 엄청난 양의 순금 부장품을 묻었는데 금관총 발굴 당시 금의 총량은 7.5kg이었다. 신라는 고도의 금 세공기술을 보유했다. 누금기법은 금속알갱이와 금속실을 붙이는 기법으로 기원전 3천년 서아시아에서 유래한 기법으로 신라인은 이것을 구현했다. 신라금관은 총 6점 출토됬다. 5점은 금관총, 황남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에서 1점은 도굴된 것을 압수했다. 신라금관은 등근테에 뫼산자모양 세움장식 3개에 사슴뿔모양 장식 한 쌍을 붙이는 것이 기본이다. 처음에는 이것을 왕관으로 여겼으나 여성의 무덤에서 금관이 남성의 무덤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어 원점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신라 천마도는 말안장 아래 흙이 튀는 것을 막는 대래다. 천마도는 자작나무로 만든 것인데 이 나무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 지역의 나무다. 즉, 천마도는 아무래도 신라와 고구려의 관련성을 의미한다.
가야의 김해대성동에서는 청동솥에 출토되었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휴대용 취사도구다. 부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4세기 부여가 숙신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 부여인이 가야 집단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다. 삼국의 불교문화
불교는 삼국에서 앞장서서 수용했다. 이는 불교의 위계질서가 고대국가의 위계질서와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부처, 보살, 나한, 천장, 중생의 위계질서를 가졌는데 이게 왕, 귀족, 지식인, 대중의 현실세계와 잘 등치했다. 초기 전래 불교는 탑 중심이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는 탑 중심으로 주위에 회랑을 두었다. 부속건물은 좌우대칭이다. 기본적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반이 남북 일직선 배치였다.
고구려는 목탑 중심으로 1탑 3금당이었다. 목탑이 팔각탑이었다.
백제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건립했다. 한국 최대 가람으로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수도 이전 및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가 물리칠 9적이 대상이었다. 각각의 층이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이었다. 여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없는데 이것 자체가 이들을 같인 민족으로 인식하고 하나로 여겼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황룡사는 창건 후 무려 6차례나 낙뢰를 맞아 중수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전소된 후엔 더 이상 중건되지 않고 빈터가 되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은 현재 3층이지만 원래 7층으로 추정된다.
대승불교가 전래되고 슬슬 탑에서 불상으로 중심이 이동한다. 고구려 백제는 하나의 광배상에 여래상을 모시고 좌우에 보살상을 작세 배치하는 1광배 3존불이 유행했다. 고구려는 국가가 불교를 적극 지원하지 않아 불상 수가 적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백제의 상징적인 불상이다. 신라는 미륵신앙와 화랑결합으로 호국불교로 국가주관의 불교행사가 많았다.
7세기 신라는 경주 남산에 불상을 조성했다. 경주 남산은 전체가 화강암 골산으로 200곳의 불적이 있다. 신라는 반가사유상을 많이 제작했다. 신라의 높은 보관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낮은 보관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명작이다. 둘 다 등신대의 크기로 속이 텅 빈 중공식 주조다. 동판이 아주 얇아 주조 과정의 기포가 전혀 없어 난이도가 높다.
신라는 하대에 이르러 왕위쟁탈전이 벌어진다. 정치적 혼란 속 불상과 석탑은 긴장미가 사라진 매너리즘이 일어난다. 이에 반해 지방호족은 자신의 문화를 창조한다. 호족의 정신적 지주가 선종이다. 하대신라는 철불의 시기다. 철불은 이상적 절대자가 아니라 현세적 능력의 인간상이었다.
신라의 가람배치는 쌍탑 1금당이다. 3층의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완성되었다. 신라는 중대에는 석탑이 하대에는 승탑이 유행했다. 특히 선종에서는 승탑이 유행했다.
라. 신라의 금속공예
통일신라의 금속공예는 청동기에서 높은 수준이었다. 청동에 장식을 가하는 방법은 평탈기법과 입사기법이 있다. 평탈기법은 얇은 금판, 은판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낸 다음 옻칠로 부착한다. 입사기법은 청동표면에 음각으로 그림을 새겨 그 얖은 홈안을 가느 금실, 은실로 메우는 방법이다.
2. 고려시대
가, 고려의 청자
고려청자는 고도의 기술이다. 청자는 중국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고려만이 이를 제대로 구현했고 오히려 더 발전시켰다. 10세기 중국 월주요의 청자를 다완으로 수입하여 사용하다가 5대 10국 혼란기에 무역이 끊기자 자체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10세기 후반의 초기 청자 가마인 황해도 배천 원산리 가마가 길이 40미터로 월주요식 벽돌가마다.
월주요식 벽돌가마는 한국 전통도기기술과 결합하여 흙가마로 변모하여 크기가 10미터로 줄어든다. 11세기 강진, 부안, 해남, 고흥, 장흥에서 고려청자가 제작된다. 고려 양인 중 잡척이 농민보다 낮은 신분으로 도자기, 먹, 종이, 소금을 생산하며 향, 소, 부곡에 거주했는데 이들이 이를 청자를 생산했다. 11세기 중국 북방청자인 요주요의 영향을 받아 같은 무늬를 틀로 찍은 압출 양각기법이 유행한다.
송의 서긍은 1124년 송 휘종에 고려 도경을 저술해 바치며 고려청자의 비색을 언급했다. 매병은 고려 청자의 대표적 기형으로 당대의 술병이나 고려는 꿀이나 참기름을 담기도 했다. 정병은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데 사요했다. 주전자는 손잡이와 뚜껄에 고리를 다록 서로 끈으로 연결했다. 고려의 궁 만월대에는 기와에 청자기와를 사용했다.
도자기의 미는 기형, 빛깔, 무늬의 3요소다. 12세기 고려청자는 기형, 빛깔은 최고 수준이었다. 다만 양각, 음각, 투각의 기법은 무늬효과가 좀 떨어졌다. 그래서 상감이 등장한다. 상감이전엔 백토를 묽게 하여 붓으로 무늬를 그리는 백화기법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자토를 쓴 철화기법도 사용되었다. 13세기 상감기법이 등장한다. 청자의 표현영역은 확장한다. 산화동으로 붉은 색을 가하는 동화기법, 금을 쓴 화금청자, 철분이 완전히 제거된 태토로 백자를 제작하고, 철분이 많은 안료를 쓴 철채청자, 검정색의 흑유청자가 제작된다.
고려백자는 철분이 거의 없고 점토와 유약으로 만들어 하얗지만 질감이 매끄럽지 않은 연질 백자다. 고려청자는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다. 공민왕때 이미 크게 쇠퇴하고 홍건적, 왜구의 창궐로 서남해안이 초토화되어 자기 생산지가 붕괴하고 도공이 대거 이탈한다.
나. 고려의 나전
나전은 당에서 시작하여 신라, 일본으로 전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칠기가 꽃을 피웠다. 송은 나전칠기의 수준이 떨어졌고 고려 나전이 독보적이었다. 고려 왕실도 나전에 공을 들였다. 목종 때 관영 공예품 제작소로 중상서를 왕실에 설치했고 훗날 공조소로 이름이 바뀌어 여말까지 존속한다. 나전칠기는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굵은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자개를 붙인 뒤 옻칠을 덧입혀 반반히 만든 것이다. 헝겊 바르기-칠하기-나전 시문-칠하기-나전 무니의 칠 벗겨내기-광배기의 과정을 거친다.
고려 나전의 특징은 주름질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의 뒷면을 채새한 뒤 기물 표면에 붙이는 대모기법을 사용해 붉은 주황, 노랑 빛의 다양성을 냈다. 이는 고려 고유의 기술이다. 그리고 무늬 구성에 금속선을 병행했다.
3. 조선시대
가. 도자기
분청사기는 고려상감청자의 전통을 이어 15세기 중엽까지 전성기였다. 1467년 경기 광주의 국영도자기 제작소인 관요설치이전까지 활성화했다. 각 지방에 산재한 지방 가마에서 생산해 양식과 조형이 자유로웠다. 분청사기는 5가지 종류가 있다. 상감 분청, 인화분청(작은 무늬를 도장으로 만들어 찍기), 박지, 조화 분청(백토를 칠하고 양각, 음각 무늬), 철화분청(백토 분장 후 철화안료로 그림 그리기), 귀얄 담금 분청(백토를 귀얄로 그려 자국을 남기거나 그릇을 백토에 담금)이 있다.
조선 백자는 순백에 대한 숭상이 있다. 동양3국의 도자기는 초점이 다르다. 중국은 형태, 일본은 색, 한국은 선에 중점을 둔다. 조선 백자는 명의 우수한 백자의 자극을 받고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조선은 백자 생산을 위해 전국의 백토 조사 결과 강원 양구, 경상 하동, 산청 진주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1467년 경기도 광주에 관용 백자를 생산하도록 사용원에서 분원을 설치한다. 300개소의 백자 가마터가 광주에 들어서고 가마터는 땔나무의 소모로 인해 10년을 주기로 이동한다.
조선백자는 청화백자로 발전한다다.청화안료는 이란이 원산지로 희귀하고 회회청이라 부른다. 세조가 명을 내려 국내에서 찾아봤으나 없었고 수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 중기 철화백자는 회회청 수입이 어려워 철화로 대신하며 나타난다. 조선 중기 백자는 회색 내지 갈색을 띠다가 다시 순백색을 회복한다.
조선말기가 되자 도자기도 매너리즘과 청나라풍의 영향으로 백자의 기벽이 두터워지고 둔장해진다.
나, 조선의 회화
조선은 무수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초상화는 임금의 초상 어진, 공신의 공신초상, 서원과 가문의 영당의 선비초상이 있다. 공신의 초상은 처음에는 공신각에 봉안했으나 훗날 집안에 내려 가문의 영광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초상은 외형과 정신을 같이 그려냈다. 숯으로 소묘했고 그림종이에 옮겼고, 완성된 초본을 틀에 고정시키고 비단을 덮어 씌우고 윤관선을 그려 채색했다.
조선초기는 유행한 산수화는 소상팔경도다. 중국 동정호 남쪽의 소수와 상수가 합쳐지는 풍광을 이른 봄과 늦은 가을에 8개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16세기 산수화를 곁들은 계회도가 유행한다. 계는 사대부들이 친목을 위해 시와 술을 즐기며 어울린 모임이다. 조선 초중기 계회도가 100점이상이다. 계회도는 3단의 축으로 상단은 계회의 명칭, 중단은 그림, 하단은 참석자의 명단이다.
조선시대 회화사는 초기는 안견의 화풍, 중기는 명나라 절화화풍이 유행한다. 절화화풍은 절강성 출신 화가의 호방한 필법과 활기 넘치는 화풍이다. 산수화가 자연의 서정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산수인물화다. 조선후기는 속화, 진경산수화, 문인화 3대 장르가 확립한다. 진경산수화는 소중화로 중국에 대한 동경이 사라지자 우리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랑이 생기며 확립한다. 문인화는 그림에 화가 자신의 마음을 담아낸다는 내면적 리얼리즘의 산물이다.
단원과 혜원은 풍속화의 대가다. 단원은 서민과 서민의 심성을 그렸고 필치가 강하며, 채색을 절제했고 배경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반면 혜원은 양반을 주로 그려 그들의 마음을 그렸고 필치가 여리고 부드러우며 채색을 많이 했고 배경을 치밀하게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