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다트넬의 신작 '인간이 되다'가 출간했다. 전작 '오리진'을 워낙 감명 깊게 본지라 이번 저서도 적잖게 기대가 되었다. '인간이 되다'를 보며 알게 되었는데 루이스 다트넬은 인류 문명 3부작으로 이 책들을 진행했다고 한다. 첫 작은 '사피엔스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과학지식', 두번째가 오리진, 세 번째가 인간이 되다 순이다. 오리진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지구의 자연지리 환경의 변화가 인간의 진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물질, 환경, 지리면에 초점을 두었다면 '인간이 되다'는 인간 자체의 문화의 심리에 대해 중점을 두었다. 


1. 인간 이타성의 진화, 독재자의 출현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인간이 이기적이라 생각하지만 인간은 존재 자체가 협력적이다. 세포의 연합을 이루어 다세포 상태로 서로 분화하고 협력하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고, 그 세포 안에서는 미토콘드리아와 같이 공생한는 상태며, 같이 한 몸이 아니어도 장속과 온몸에 세균과 소화 및 다른 여타과정에서 협력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사람과도 매우 협력적이며 타고나게 선하다. 이런 면을 강조한 책은 '협력의 유전자', '휴먼 카인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이다. 

 '인간이 되다'에서도 사람의 이런 협력적 진화를 강조한다. 인간의 협력을 위해서 두 가지 심리가 진화했다. 공격성의 감소, 유례없는 수준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성의 발달이다. 공격성은 반응성 공격성과 주도성 공격성이 있다. 반응성은 위협에 대응하는 본능 같은 것이며 주도성은 충동과 감정이 아닌 사전에 계획하는 공격이다. 인간은 전자는 크게 줄이고 후자는 더욱 정교화시켰다. 

 실제로 다른 영장류들은 제법 평화로운 보노보까지 쳐도 인간에 비해 물리적 공격빈도가 100배에 이른다. 서로 이렇게 공격적이니 협력이 될리 만무하다. 그래서 인간은 수렵사회에서도 대개 평등하고 독재적 알파나 서열 싸움이 거의 없다. 그리고 인간이 발전시킨 협력성과 도구는 압도적 독재자의 출현을 상당히 오랜 시간 견제했다. 인간은 서로 협력하여 2인자 및 다른 약한 무리가 협력하여 손쉽게 1인자를 제거한다. 또한 인간은 도구로 무기가 있기에 제법 강한 일인자더라도 멀리서 여럿이 원거리 무기를 사용해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에서 개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물리적 힘이 아닌 사회적 관계망에 힘과 관대함, 협조를 기반으로 쌓은 명성, 즉 평판이 되었다. 그래서 초기 수렵채집사회의 우두머리나 지도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항상 나누고 평판을 유지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하지만 농업의 발전과 초기 문명이 출현하면서 독재자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수렵사회에서는 음식의 저장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항상 이동했기에 저장하더라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매우 번거로웠다. 하지만 농경은 잉여생산물을 발생시켰고 양곡은 저장이 용이했다. 때문에 나누는 것보다 저장을 하고 축적과 배분에 관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세습을 하여 부가 축적되어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특권층이 생겨나고 사회가 계급화되었다. 

 또한 금속기술의 발전이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과거 석기와 나무가 무기일 때는 누구나 무기의 재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청동과 철기는 귀했고, 제련에 특별한 기술과 시설이 필요했다. 부가 축적된 소수가 이것을 손에 넣는 것이 가능했고 그들이 이것을 자신을 보위할 사람들에게 무기로 만들어 무장시켜 군대로 조직할 수 있었다. 

 이타성의 발전은 상호이타성에서 시작한다. 상호이타성은 친족이 아닌, 즉 유전적 연관관계가 없는 개체들끼리 서로 돕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쥐가 굶주린 다른 박쥐를 위해 먹은 피를 게워서 전해주는 것이다. 호혜를 받은 박쥐는 이를 기억했다 다음 번에 반드시 돕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물과 수렵채집 수준의 인간은 잉여를 저장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에 다 먹지 못할 남는 것을 다른 개체에게 나눠주는 것이 다음번을 위한 보험수단이자 안전장치가 되었다.

 다음 단계는 간접적 호혜성이다. 사회가 커지면 내가 호혜를 베푼 개체를 기억하기도 다시 만나기도 어렵다. 때문에 간접적 호혜성은 내가 다른 개체를 돕고, 도움 받은 개체는 또 다른 개체를 도와서 사회 전체가 항상 다른 개체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체제의 구축이다. 이 경우 내가 도움 받을 만한 개체인지가 중요하다. 이것이 평판이다. 그리고 평판이 가능하려면 다른 사람에 의한 뒷담화와 목격이 필요하다. 또한 무임승차자나 사기꾼을 처벌하기 위한 이타적 처벌도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은 공정하지 못한 것, 사기에 대해 매우 불관용적이며 민감하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며 목격과 뒷담화에 의한 평판도 쉽지 않아졌다. 그 다음 단계가 종교적 계율이나 신, 성문법이다. 특히 성문법은 제도화된 평판 체계라 할 수 있다. 오늘 날에는 P2P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낯선 사람들 간의 거래를 촉진하기 위한 평판제도를 리뷰 및 별점등으로 진행하고 있다. 


2. 감염병


 





 

 지구상의 수많은 미생물 중 인간을 감염시키는 것은 1128종이다. 50%가 세균, 20%는 바이러스, 10%는 균류와 기생성 원생동물이고 나머지 287종은 기생충이다. 병원성 미생물 중 60%는 인수감염능력이 있다. 인간은 농경을 시작하면서 같이 모여 살고, 가축을 키우게 되었는데 이는 감염병의 창궐과 발생을 불러왔다. 동물과 오랜 시간 같이 하다보니 동물의 감염병이 인수감염병으로 진화하였고 또 모여 살기에 더 잘 전파되었다. 

 감염병의 역사에는 인간을 대량으로 살상한 감염병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다. '농경의 배신'에서는 농경이 인간을 절멸시킨 하나의 원인으로 감염병의 창궐을 꼽았고, '한국인의 기원'에서는 지구 기후의 한랭하는 생산성과 영양상태를 악화시켜 감염병의 창궐로 사회를 붕괴시키고 이동을 촉진했음을 주장한다. 

 감염병 중 말리라이는 원래 사하라 이남의 풍토병이고 황열병은 아메리카의 토착병이다. 황열병은 초기 고열과 근육통, 두통, 간과 신장을 손상시켜서 치사율이 매우 높다. 감염병은 인간의 역사에서 생각보다 많이 다뤄지지 않지만 그 영향은 생각보다 절대적이다.

 미국은 영국과 독립전쟁을 하면서 초창기 매우 불리했다. 개전 2년간 승전이 없었을 정도다.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고 병력을 정예병이었다. 미국은 2년만인 1777년 10월 뉴욕주 새러토가에서 처음 승리했는데 이로 인해 전황이 뒤집협 유럽의 각국이 영국을 견제하고자 미국에 협력하면서 전세가 기울 수 있었다. 

 영국은 미 남부에서 고전했다. 미 남부는 아열대 기후로 말라리아와 황열병이 창궐하는 곳이다. 당시 말라리아 약인 기나나무 껍질이 알려져 있었지만 영국은 인도에서 이를 상당 수 소진했다. 반면 미국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고, 이미 미 이민자들이 세대를 거치며 남부의 질병에 적응한 상태였다. 때문에 남부에서의 승리는 미국이 독립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다.

 히스파이올라 섬은 카리브해에서 쿠바 다음으로 큰 섬으로 지금의 아이티다. 프랑스가 여기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1775년 세계 커피의 50%, 설탕, 목화와 담배, 코코아, 인디고를 수출한 경제의 중심지였다. 열대의 고된 노동으로 50만의 흑인 노예를 유지했고 노예 손실도 많아 매년 3만을 보충해야 했다. 1791년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은 이에 불안을 느껴 2만 3천병력을 파병했으나 무려 60%가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노예출신 투생 투베르튀르가 생도맹그, 즉 아이티를 흑인 독립국가로 선포한다. 180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경제의 중심지를 되찾고자 2만 5천 병사를 파병한다. 최정예인 이들은 지도자 투베르튀르를 생포하고 승기를 잡았으나 적들이 내륙으로 숨어 게릴라전을 펼치자 결국 감염병을 당해내지 못하고 1/3의 병력이 감염되고 많다. 이후 지속된 전쟁에서 프랑스는 무려 5만의 병력을 병으로 잃게 된다. 

 원래 나폴레옹은 아이티를 되찾고 이를 거점으로 경제력을 회복하여 루이지애나주를 경영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감염병으로 인해 실패함으로써 식민지를 정리하고 유럽의 경영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래서 신생국 미국에 루이지애나를 판매하게 된다. 여러모로 미국은 감염병에 상당히 신세지게 된 셈이다.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접근했고 침투하려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감염병이 워낙 드세 해안의 좁은 범위에만 거주했고 케이프타운 지역 정도에만 거주가 가능했다. 때문에 오랜 흑인 노예무역도 아프리카 자체 집단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세기들어 말라리아를 막는 키니네가 보급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키니네는 매우 써서 설탕을 탄 탄산수에 녹여 먹었는데 이것이 인디언 토닉 워터로 진토닉 칵테일의 근원이다. 1880년대에 이르러 네덜란드 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고품질의 열나무 껍질을 대량생산하면서 키니네의 가격이 크게 하락하였는데 이로 인해 아프리카의 전대륙 침탈 및 식민지화가 본격화하였다. 

 감염병의 확산에는 교역과 전쟁도 크게 한몫한다. 전쟁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병사들이 더럽게 비위생적인 곳에 모여 살았고, 영양상태와 부상으로 감염에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된다. 이들은 또한 처음 보는 먼지역에 가서 감염병에 걸리고 전쟁 후에는 귀국하여 자기 지역에 이를 퍼뜨리게 된다. 항생제가 생기기전 대부분의 전쟁에서 전사자는 대개 전투보다는 감염병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1850년 크림 전쟁에서 영국군은 전투보다 이질과 발진티푸스로 사망한 병사가 1배나 더 많았다. 17세기 전반 신성로마제국의 30년 전쟁에서 군인 사상자는 50만이었는데 이중 66%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기원전 1000년 경 유라시아 문명들은 높은 인구 밀도와 교역망을 세웠는데 감염병도 같이 전파되었다. 아테네 역병이 그것이다. 로마의 전성기에 로마의 인구는 100만이었다. 하지만 165년 파르티아와 싸우던 로마군에 안토니우스 역병이 전파된다. 이 병은 잘 닦여진 로마의 도로와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어 로마 인구의 10-30%를 죽게 만들었다. 249년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에디오피아에서 발생한다. 이 역시 로마 전체에 퍼지게 되었고 로마 전체인구의 1/3인 500만이 사망하게 된다. 이 당시는 로마의 위기였고 대량 사망과 사회혼란으로 정치혼란과 금융시스템이 붕괴하고 기독교 전파의 결정적 계기기 된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제2의 전성기를 마련하고 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수복한다. 하지만 541년 가래톳 페스트가 창궐한다. 창궐 2년만에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의 인구 절반 가까이가 사망한다. 그리고 동로마 전지역에서 무려 2천만에서 5천만의 인구가 죽는다. 동로마 인구의 인구 격감으로 경제불안과 세수가 감소하였고 심지어 군인 봉급을 크게 삭감해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국방력의 약화로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으며 동로마와 라이벌인 사산조 페르시아가 감염병으로 쇠퇴한 틈을 마호메드의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1346년 흑해의 카파를 포위한 몽골군은 페스트로 죽인 시체를 투석기로 날리는 최초의 생물학전을 수행한다. 1347년 유럽 시칠리아에 페스트가 처음 도착하였고 피렌체 수민은 60%가 사망한다. 흑사병은 1353년까지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인구의 1/3에서 1/2를 사망하게 한다. 5천만에서 1억 수준인데 향후 인구회복에는 무려 200년이 걸리게 된다 .노동력의 급감으로 농민과 장인의 권한은 크게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중세봉건제가 붕괴한다. 땅값의 하락으로 농민은 땅을 구매하게 되었고 임금증가로 삶의 질이 개선되고 불평등이 감소하였다. 봉건제에서는 토지를 농민이 사용하는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하였지만 흑사병 이후로는 임금노동과 지대지불의 현대적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인구 감소로 인해 양곡에 여유가 생기면서 주식작물만 재배하던 것에서 다양한 농산물재배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인구 부양을 위해 거의 모든 토지가 경작지였지만 목초지로 일부를 돌리는 것이 가능하였고 이는 모직산업을 발전시켜 영국의 경우 나라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게 된다. 

 천연두는 아메라카 대륙을 절멸시켰다. 유럽인 토착 전 아메리카의 인구는 5500만에서 6천만으로 추정되지만 천연두의 창궐 이후인 1600년에는 500만 수준으로 줄어든다. 90%가 사망한 것이다. 추정이긴 하지만 이런 아메리카 토착민의 절멸로 인해 대륙의 경작지 상당수가 초지로 돌아가 대기중의 이산화 탄소 흡수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온실효과가 낮아져 17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소빙기가 도래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1918년 미국 캔자스 주의 한 육군 병원에서 스페인 독감이 처음 보고 된다. 일반 독감의 10배 치명률이었고 사망W곡선을 보여 20-40대에게도 병이 치명적이었다. 면역계에 과잉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독감 팬데믹은 당시 세계인구의 1/3인 5억명을 감염시켰고 이중 5천만에서 1억이 사망했다. 1차 대전 당시 독일 군은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에 독감이 퍼져 상당수 병력이 감염되어 전투를 원활히 수행할 수 없었다. 감염병이 패퇴의 한 원인인 셈이다. 인도도 스페인 독감으로 무려 1200만에서 1800만이 사망한다. 당시 1차 대전 중이라 영국은 인도의 병력과 식량을 모두 동원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양 불량을 일으켜 감염병을 더욱 확대시켰다. 전후 인도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항의하고 자치권을 얻어내려 했으나 영국은 이를 거부한다 .1919년 인도 내에 대대적인 사회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향후 인도 독립의 원천이 된다. 


3. 인구의 힘








 인구는 고대 전쟁에서 절대적 요인이다. 전쟁을 위한 보급, 물자의 보충에 인구는 절대적이다. 특히 현대전에서는 총력전이 이뤄지기에 대규모 징집과 군수공장의 운영에 전 국민이 동원된다. 때문에 책 '인구의 힘'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인구의 힘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구는 수요로 작용하기에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발전을 과학기술의 발달로만 생각하지만 경제성장을 급격이 이뤄낸 모든 나라들은 그것이 인구성장과 더불어 같이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인구가 감소하거나 쇠퇴하는 곳들은 경제적 활력이 크게 줄어든다. 

 프랑스는 1803-1812년 나폴레옹 전쟁기간 100만이 사망한다. 이런 사회적 혼란으로 출산율이 크게 감소하는데 그래서 산업혁명 당시 다른 유럽 경쟁국들이 인구가 크게 증가했음에도 프랑스는 인구가 정체한다. 원래 중세까지 프랑스는 유럽의 최강국이었고 여기엔 인구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프랑스 인구는 유럽 인구의 25%를 차지했다. 나폴레옹때도 2800만으로 러시아 다음이었고 독일보다 10%많았고 영국보단 2배나 많았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유럽 인구가 2배 증가하는 동안 프랑스는 고작 40%증가에 그친다. 19세기 말 프랑스 인구는 4천만에 머무는데 영국은 그 사이 4배증가하여 인구에서 프랑스를 추월했고 독일은 5600만에 이른다. 결국 인구에서 뒤진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패배하고 이후 독일과 영국에 계속 열세를 보이게 된다. 프랑스의 인구 정체는 나폴레옹 전쟁기도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장자상속제를 폐지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가정은 재산의 보존을 위해 자녀의 수를 줄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니었으며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구가 크게 증가했을지도 모른다. 

 1차 대전도 사실상 인구싸움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 헝가리오스트리아제국, 오스만 제국은 2500만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상대방인 연합국은 3800만명을 동원했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2600-2700만의 인구를 상실했다. 때문에 제2의 인구대국에서 2차 대전 후 젊은 남자의 부족으로 출산율이 급감한다. 러시아는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인구 부양비가 요동쳤다. 1990년 중후반에서 2000년 초반 러시아는 경기가 매우 좋았는데 이는 유가상승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 인구구조로 인해 인구부양비가 급격히 적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이제 2030년까지 인구는 급감하면서 인구부양비가 크게 증가할 예정이다. 소련은 전쟁으로 성비도 붕괴했다. 2차 대전후 성비는 0.64였는데 이로 인해 기혼 여성수가 급감하고, 이혼율은 증가했으며 나이 차가 많은 부부가 증가하고, 혼외 자녀도 늘어났다. 러시아의 성비는 이때의 여파로 지금도 0.87에 불과하다. 여성과잉으로 이혼과 혼외출산, 혼전 성관계가 지금도 많다. 

 16-19세기 대서양으로 끌려간 아프라키인은 무려 1250만에 달한다. 이 중 무려 200만에 몇달에 걸친 고된 항해로 인해 사망한다. 그외 사하라 종단 무역, 홍해 노예무역, 인도양 노예 무역으로 600만이 추가로 유출되었다. 그래서 사하라 이남의 인구는 19세기 5천만에 그쳤는데 노예 무역으로 인한 인구유출이 아니었다면 1억 정도의 인구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상인은 남성 노예를 선호했다. 그래서 1.8:1정도의 성비로 노예를 팔아넘겼다. 그래서 사하라 이남은 장기가 남성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전통적인 남성일을 여성이 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이런 남성 유출지역들은 지금도 성평등적 문화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남성이 부족하다보니 일부 다처제가 성행하고 있으며 이는 성병의 확산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서아프리카는 에이즈 감염률이 높게 나타난다. 언급한 것처럼 풍토병으로 노예의 공급과 수급을 유럽인이 담당하지 않고 현지 부족들을 이용했다. 그렇다보니 수백년간 서로 간의 신뢰가 끊어졌고 불신의 문화가 팽배해졌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진출하지 못한 지역에 제도와 사회적 기반 시설을 건설하지 않았는데 이런 것들이 아프리카 지역의 미발전의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이 독립하기 이전 영국은 미국으로 매년 죄수를 2천명 씩 보냈다. 그것이 교도소에 보내는 것보다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으로 곤란해지자 호주로 선회한다. 1868년까지 15만 7천명의 재소자를 보냈는데 당연히 84%가 남성이었다. 때문에 호주에 초기 심각한 성비불균형이 일어난다. 


4. 중독 물질들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진화하였고 이런 행위를 할 때마다 특정 호르몬이 만족감을 주는 보상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자연계의 특정 물질들은 그것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보상호르몬을 강력하게 불러일으켜 생존과 역행하는 행동임에도 인간은 이를 강하게 추정하게 되었다. 이런 물질들을 중독물질이라 부르며 이는 상당한 경제규모를 형성했고 인간 역사를 움직였다.

 먼저 알코올이다. 알코올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기에 재료가 다를 뿐이지 인간 문명에 보편적이다. 알코올은 수인성 전염병을 일이크닌 미생물을 죽이기에 안전한 수분 섭취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알코올은 인간의 전전두엽을 억제하여 제어 기능이 느슨해져 긴장이 풀리고 불안감이, 자의식이 적어져 사람을 외향적으로 변화시킨다. 

 인간은 알코올 탈수소 효소를 사용해 알코올을 분해하는데 다른 영장류보다 40배나 강력하다. 영장류는 오래도록 알코올 분해효소를 진화시켰는데 아마 떨어진 과일이 자연 발효된 것을 먹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효모균은 양조 과정에서 당을 분해하여 에탄올로 바꾸는데 너무 높은 알코올 농도로 인해 더 이상 성장 못할 때 까지 성장하고 이 한계가 14도다. 하지만 인간은 증류를 통해 이 농도를 넘어선다. 에탄올은 끓는 점이 78도에 불과해 술을 끓이면 에탄올이 먼저 증발하고 이를 냉각시키면 고농도의 술이 되는 것이다. 증류주는 고농도의 알코올이기에 쉽게 변질되지 않아 먼거리 수송이 가능했다 .

 럼은 16세기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인이 사탕수수 즙으로 만들었다. 17세기 중엽 영국인이 바베이도스에서 설탕 재료의 부산물인 당밀로 제조하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래서 럼은 가격이 싸면서 농도가 높아 보존이 오래되어 대서양 무역의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돈 대신 아프리카에서 럼을 주고 노예를 구입하고 그 노예를 사탕수수 농장으로 보내어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부산물로 럼을 생산해서 다시 노예를 사오는 방식이다. 

 카페인도 인간을 중독시킨다. 세계 인구의 90%는 카페인을 섭취한다. 카페인은 커피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가공식품과 음식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커피는 튀프키예의 카흐베이서 유래한 말이다. 이탈리아로 퍼져 카페란 말이 영어의 커피가 되었다. 유럽에서 초기 커피하우스는 토론과 계몽사상의 전파에 이바지한다. 

 차와 커피에 대한 열정은 장거리 해상 교역을 촉진한다. 18세기 초까지 유럽의 커피는 모두 예멘의 것이었으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인도 제도의 식민지들에게 커피를 재배하는데 성공해 암스테르담이 커피의 수도가 된다. 이후 생도맹그에서 프랑스가 커피를 재배한다. 하지만 아이티 독립으로 농장이 황폐화하자 다음 농장은 브라질이 된다. 19세기 브라질의 커피 생산은 1822년 독립한 이후로 무려 75배나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커피는 사치품에서 대중화하게 된다.

 차는 네덜란드가 커피를 장악했기에 영국이 집중했다. 영국은 국제무역에서 잘 손상되지 않는 발효되고 산화한 홍차를 거래했다. 그리고 여기에 설탕과 우유를 들이부어 지금의 밀크티를 만들어낸다. 차도 대량생산과 수입으로 대중화한다. 영국은 중국이 차 생산을 독점하자 차나무를 빼돌려 인도 아삼 지역에서 재배하기 시작한다 .

 차는 미국의 독립과도 관련한다. 식민지 미국은 차를 수입했는데 밀거래로 네덜란드 산은 싸게 수입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동인도 회사에 차 재고가 쌓이게 되자 영국의회가 차조례를 통과시킨다. 중국에서 아메리카로 차를 직접 수출하게 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를 세금 전가로 파악하여 분노하였고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다. 영국은 메사추세츠주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보스턴항을 폐쇠하고 이로 인해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난다. 

 세계 인구는 매년 800만이 사망한다. 이중 15%가 흡연으로 인해 사망한다. 이게 다 유럽인이 아메리카에서 담배를 들여온 후 전 세계로 퍼뜨린 까닭이다. 영국은 담배 농장을 시도하였는데 이것이 미국의 정착으로 이어졌다. 담배는 환금 작물이었는데 이로 인해 식민지 미국이 자급 농업 경제에서 상업 농업 경제로 이행하게 된다. 상업이 성장하자 더 많은 이주민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담배는 지력을 심하게 고갈시킨다. 동부해안에서 점차 서부로 경작지를 옮길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토착민과의 갈등이 일어났고 미국은 점차 서부로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담배는 고도의 노동집약 농업이다. 노동력이 부족했고 당연히 이를 노예 무역을 더욱 확장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실 책 '중독의 시대'에 나온 것처럼 담배는 중독물질로 해악시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유럽에서 팽배하였다. 하지만 1차 2차 대전에서 연합국 측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궐련 형태의 담배를 제공하였고 대부분이 이에 중독되어 담배가 사회적으로 해악이라는 분위기는 크게 희석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중독물질은 아니지만 레몬주스 부분을 정리한다. 18세기까지 유럽의 장거리 항해와 해군의 고질병은 괴혈병이었다. 비타민 부족으로 생기는 이 병의 해결방안으로 영국은 레몬주스를 고안해내었고 이런 해군의 강력함은 영국이 해상을 제패하고 나폴레옹을 패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레몬은 엉뚱하게도 시칠리아 마피아를 낳았다.

 영국의 해군 본부는 1795-1814년까지 레몬주스는 730만 리터나 수입하였는데 이 대부분이 감귤류의 주산지 이탈리아 시칠리아 산이었다. 시칠리아는 당시만 해도 유럽 본토에 비해 매우 낙후하였고 심지어 19세기까지 봉건제가 유지되었다. 갑작스런 부의 유입으로 시칠리아는 근대적인 상업행정, 사법, 치안 제도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치안 부재로 각종 감귤 농장이 도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농장주들이 생각한 방법은 토착 폭력배를 고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주객이 전도되어 폭력배들은 오히려 강제로 보호받는 것을 강제하게 되었고 이를 명목으로 막대한 보호비를 뜯어내게 되었다. 마피아는 이렇게 시칠리아에서 성장해 이탈리아 본토의 정계, 재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가난한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 대거 미국으로 이민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마피아도 같이 가서 미국 영화 대부의 주인공들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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