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김누리 교수의 대한민국 교육혁명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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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생각보다 병들어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소득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국인은 겨우 24%만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59%는 더 벌어져야 한다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공정한 운동장에서 능력에 따라 배분하는게 옳다는 능력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답니다. 또한 자녀에게 관용을 가르쳐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겨우 45.3%가 찬성했는데 이는 조사 52개국 중 당연히 52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김누리 교수는 한국이 이런 정신병에 빠진 야만의 트라이 앵글로 경쟁-능력주의-공정을 말한다. 한국인은 이런 야만을 내면화시켜 약탈적 자본주의와 천민 자본주이에 허덕여 고통받으면서도 그것을 놀랍게도 자신의 무능과 노력 부족으로 치환시켜 내면화해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정상성의 병리성 현상이다. 

 한국은 경쟁이 상당히 치열한데 이렇게 된 이유로 저자는 3가지 정도를 꼽는다. 우선 일제국주의에서 시작한 사회적 다윈주의와 이후 미국의 시장 자유주의의 혼합이다. 둘다 무한한 경쟁을 옹호하는 체제로 이 둘은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사회 자체가 너무 불평등해 경쟁이 격렬하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자산을 국민소득으로 나눈 값을 피케티 지수라 하는데 이 값이 높을 수록 자본이 유리하고 노동이 불리한 세습자본주의 사회다. 한국은 이 수치가 무려 9인데 프랑스 혁명 당시 불평등했던 프랑스의 수치가 7.2에 불과하다. 마지막은 한국이 강력한 평등지향적 사회라는 점이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기존 기득권 세력이 완벽히 몰락하였는데 그렇다보니 강력한 평등지향과 경쟁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병리에 저항해야하는 사회의 주요 조직 중 하나가 대학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은 그런 일을 하기는 커녕 자본의 시녀로 완벽히 종속되어 있다. 물론 대학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독재정권까진 대학은 권력에 저항했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 대학은 지적 세계의 거주자가 아니라 시장의 소비재로 전락했다. 진리 탐구는 사라지고 기능적 정보만 넘쳐난다. 학생은 취업을 위해 소위 스펙 쌓기에만 열중한다. 그래서 지금의 대학은 학생회가 서지도 않고 온갖 사회 비리와 국제 문제가 터져도 조용하기만 하며 대자보하나 붙질 않는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신문사들이 감히 대학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적 탐구가 아닌 딱 재별이 대학에 원하는 기준으로 대학을 평가한다. 취업률이 얼마나 높냐, 영어 수업은 얼마나 뒤느냐 등의 식이다. 거기다가 자본 권력은 대학자체를 구매하기도 한다. 삼성은 성균관대를, 두산은 중앙대를 매입했다. 그러다보니 교수마저 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했고 학생은 자본의 도구로 기능하면서 그것이 어느 순간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자본은 직접 대학을 인수화하거나 대학 평가로 이데올로기를 장악하면서 대학을 탈정치화해버렸다.  

 특히나 한국은 대학의 공영성이 매우 낮다. 대부분의 대학이 사립대학이며, 그 사립대학 마저도 공공의 재정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다. OECD국가들의 경우 대학재정의 90%이상을 정부재원으로 충당받아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자유로운 학풍을 추구할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 고작 15%에 불과하다. 자본의 노예가 될 수 없으며 학생에게 막대한 등록금을 부과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이는 과거 이승만의 잘못이 크다. 그는 북한에 맞서 토지 개혁을 단행한다. 유상매수, 유상분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지주 자본들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였다. 다만 학교설립을 하면 땅의 소유권을 유지하고, 다양한 특혜를 제공하였는데 그러다보니 한국이 이처럼 사립학교가 난무하게 된 것이다. 이는 각종 사학 비리와 교육의 자본 종속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은 지나치게 공정에 몰두한다. 산업화 과정에서 각종 학벌과 인맥의 부작용을 경험했기에 그에 대한 반발이라 생각된다. 오죽하면 지난 대선의 화두가 공정이었을까. 하지만 공정을 불공정과 특권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공정하기만 하면 그 게임의 패자에겐 막대한 불평등과 차별이 부여되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공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공정은 사실 정의 구현의 수단이자 과정에 불과하다. 공정은 규칙이지만 정의는 원칙이며, 공정은 상식이나 정의는 철학이고, 공정은 수단이지만 정의는 목적이며, 공정은 시장논리이지만, 정의는 사회의 논리다. 지금 한국에서 이런 기만적 공정을 가장 정당화하는 분야가 교육이다. 공정을 명분으로 기계가 채점하는 수능은 자유와 개성, 사유를 말살한다. 그리고 상대평가로 인해 학생은 경쟁을 하게 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잃고 인간성을 상실한다. 이처럼 경쟁교육은 한국인을 잠재적 파시스트로 만들고, 능력주의는 헬조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정주의는 불평등과 차별의 사회를 고착화한다. 

 저자는 대안으로 독일의 사례를 제시한다. 독일은 2차 대전의 전범국이지만 68혁명 이후, 교육혁명을 이뤄내며 진보적, 도덕적 국가로 자리매김한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2015년 시리아 난민을 무려 117만이나 수용한다. 이는 독일의 경제가 튼튼한 덕분도 있지만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관용의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를 시민이 수용하지 않는다면 정치권은 재집권이 어렵기에 철학이 있어도 시행하질 못한다. 독일은 실제 2017-2019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가로 선정되었으며 2015년 이후 무려 400만의 난민을 수용했는데 이는 전국민의 5%에 해당하는 수치다. 

 독일은 과도한 학습도 노동으로 치부하여 과도한 학습 노동을 법으로 규제한다. 대개 초1-2학년은 하루 30분, 초 3-4는 40분, 5-6학년은 92분, 7-10학년은 120분 이하다. 시험도 1주일에 2과목 이상을 실시 할 수 없으며, 하루에 1과목 이상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대부분의 학교가 1시에서 3시면 수업이 끝나고 오후에 학생들은 영화나, 연극, 공연, 연애 등 철저한 자유시간을 보낸다. 

 독일의 대학 시험은 아비투어는 90%이상의 학생이 합격한다. 독일은 대학 희망 3원칙이 있는데 학생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 원하는 시기의 진학이다. 물론 독일도 국문과, 법대, 의대 등 지원희망을 많은 학과가 있다. 국문과가 인기 있는게 특이한데 독일은 방송, 출판, 언론 등 글쓰기와 관련한 지적 영역이 넓어 이 분야의 직업이 폭넓기 때문이다. 의대의 경우 인기가 많아 대부분 대기 시간이 7년이며 이 정도를 기다리면 거의 대부분이 입학이 허용된다. 그래서 독일엔 어린 대학생이 적은 편이다. 또한 놀랍게도 학과 대기시간이 길수록 학생의 학업성취도가 높다. 

 독일이 이렇게 된 것은 68혁명 때문이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독일 역시 전후 자신을 철저히 반성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진 못했다. 상당한 나치협력자들이 정재계에 가득했다. 하지만 68혁명이후 사회 개혁을 이뤄내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독일은 긴급조치법으로 68혁명을 주도하는 대학생을 대학에 가두었는데, 그들의 영역이 대학내로 제한되며 역설적으로 대학 개혁부터 시작해 사회개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독일에 68세대가 있다면 한국엔 86세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독재와는 잘 싸웠을지 몰라도, 이후 제대로 된 사회를 구축하지 못했다. 한국의 86세대는 군부독재하의 비정상사회를 민주정부하의 비정상사회로 바꿨을 뿐이다. 이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새로운 기득권이 되어 많은 영역에서 비정상성을 심화시켰다. 86세대는 결국 한국교육의 경쟁주의, 능력주의 우열사고, 권위주의를 척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신자유주의 식으로 왜곡하고 악화시켰다. 

 저자는 교육개혁을 위해 교사의 역할을 강조한다. 실제 독일의 교육개혁과 사회개혁에도 교사의 역할이 지대했다. 독일의 연방의회의 경우 13-15%의 의원이 교사출신이다. 또한 OECD 평균 교사 출신 의원도 10% 정도이며 핀란드가 20%로 최고다. 하지만 한국은 사실상 0명이며 서이초 사건 이후 교권에 대한 사회적 주목이 이뤄지며 이번 총선에서 간신히 2명이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국의 교사는 정치적 권한이 모두 사멸된 상태다. 이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의무때문이다. 이승만정권은 정권을 위해 교사를 마구 정치운동에 강제 동원하였는데 교사의 정치 중립 의무는 이런 행위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생겨났다. 하지만 박정희가 이것을 악용하면서 정치적 권리를 박탈한다. 저자는 교사는 지적으로 훌륭하고 직업적으로 높은 윤리성을 요구 받는 집단이기에 교사는 이대로 정치적 금치산자로 묶는 것은 민주주의의 퇴행이자 정치영역에서 사회적 손실이라 주장한다.

 저자는 대학의 개혁을 주장한다. 대학 개혁 방안으로 국가 차원의 대학 재정지원을 주장한다. 그리고 대학 차원의 대학 개혁도 요구하며 교수가 대학개혁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본다. 대입시험의 폐지, 대학서열의 폐지, 대학등록금 폐지도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 교육의 대전환도 주장한다. 능력주의에서 존엄주의로, 성장을 위한 교육에서 성숙을 위한 교육으로, 경쟁교육에서 연대교육으로, 지식교육에서 사유교육으로의 전환이다. 

 저자가 보기에 현대 한국의 과제는 인간 존엄성 회복과 사회 정의의 실현이다. 그리고 존엄교육은 능력주의 교육을 대체하는 것으로 자신이 얼마나 존귀하고, 타인 역시 얼마나 존귀한지를 인식하게 하는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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