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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ㅣ 대한민국 도슨트 12
김경엽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2월
평점 :
부모님도 나도 고향이 서울이기에 어린 시절 난 지방을 경험해 본적이 없다. 지방이란 그저 도시가 아닌 시골이자 낙후된 곳, 그리고 놀러가는 곳 정도로 여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심지어 지리관념이 없던 초딩시절엔 서울이 지방보다 더 큰 줄 알았었다. 대학조차 서울로 가버렸기에 나의 첫 지방 생활은 군대였고 장소는 포천이었다. 어렴풋이 이동갈비와 일동막걸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야 일동과 이동이 지역명인 것을 알았다. 좀 그렇지만 일전에 나는 이동갈비는 포장마차처럼 이동식 차량에서 파는 간이식 갈비라 생각했었다. 지역명을 동사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혼하고 성인이 되어서야 지금 살고 있는 원주에 자리 잡았다. 물론 의도는 없었다. 결혼을 했고, 별거를 피하려면 원주 아니고선 대안이 딱히 없었다. 연고도 애착도 없었기에 조금 살다 떠나려니 했는데 그게 12년이다. 머문 기간으로 치면 사실상 제2의 고향인 셈이고 인생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나 현재로썬 딱히 떠날 만한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평생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자연히 나의 두 아들은 원주가 고향이자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곳이 되어 버렸다. 재밌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책 원주가 도서관에서 눈에 확 들어왔다. 난 사실 서울을 살며 내가 사는 지역 외에는 서울의 다른 지역을 거의 가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원주는 달랐다. 나름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인지 책에서 소개하는 지역의 상당부분을 경험했다. 원주는 인구 36만의 강원도 제1의 도시이고 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병존하는 유일한 지역이다. 영동고속, 제2영동고속,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KTX도 지나가며, 공항이 있고, 지하철도 곧 연결된다. 남한강과 섬강이 있어 수운도 좋고, 강 인근이기에 경작지도 많지만 강원도의 입구이기에 동쪽엔 치악산이란 높은 산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과거엔 군부대, 특히 미군부대가 주둔했기에 군사도시 이미지가 강했다. 나도 어릴적 원주하면 의정부 마냥 군대가 떠오르곤 했다.
원주의 역사는 깊다. 강가에 평야와 산지가 있으니 사람이 살기 좋다. 그래서 구석기문화, 신석기문화, 청동기문화재가 어김없이 출토된다. 삼국시대 들어선 처음엔 마한이었다. 차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땅이 되었다. 남북국시대에는 신라 5소경 중 하나인 북원소경이 원주였다. 고려가 되어서야 이름이 원주로 바뀌고 오늘날까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강원도의 원자가 원주일만큼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강원 감영이 있을 정도였다.
남한강과 섬강이 있다보니 식량생산이 많았고, 조운이 가능해 고려시대에 지금의 부론 일대에 흥원창이 있었다. 배가 21척 상주할 정도였으며 수도 개경까지 배로 3일이면 갈 수 있었다. 흥원창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고 거대한 화강암 표지석만이 여기에 흥원창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사찰이 들어섰다. 거돈사와 법천사, 흥법사다. 거돈사는 9세가 창건 추정이고 7500평 규모의 큰 사찰이다. 원공국사는 전주이씨로 이름은 지종이며 그를 기리는 원공국사승묘탑비가 남아있다. 그 비문을 무려 최충이 지었을 정도다. 거돈사지란 이름처럼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법천사지는 황룡사지와 익산의 미륵사지에 이어 한국 제3의 규모를 자랑한다. 무려 4만 평이다. 절의 입구인 당간지주로부터 중심 금당터까지 무려 100m나 떨어져있을 정도다. 지광국사 해린으로 유명한데 고려 문종은 자신의 넷째 왕자를 그에게 출가시켰는데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다. 흥법사지는 1만평 규모이고 당나라 유학파인 진공대사 충담의 진공대사탑비가 남았다. 이 탑비는 당태종의 글씨를 따랐다는데 그래서인지 임진왜란때 글씨를 탐낸 왜국이 탑을 질질 끌고가다 깨어졌다고 한다.
현대 원주에서 유명인사는 지학순 주교다. 그는 인권과 생태에 대한 선지적 인물이자 민주화 투사다. 지학순은 원주 원동성당의 초대교구장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농어촌과 광산촌 사람들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고 신용협동조합을 원동성당에 만들었다. 이는 1980년 원주가 전국 생활 협동조합의 메카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원주 한살림으로 이어진다.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지학순은 1974년 6월 김포공항에서 귀국하자마자 정보요원들에게 납치되어 구금된다. 그리고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으로 입건된다. 지학순은 7월 23일 국내기자들 앞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여 최초로 유신을 정면 반박한다. 8월 공판에서 지학순은 무려 15년 징역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당한다. 지학순 주교의 이런 결기는 평소 그를 흠모하던 젊은 사제들을 움직였다. 원동성당에 젊은 사제가 모여 지금의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이 결성된다. 이런 여파로 지학순은 결국 1975년 2월 17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양심선언 후 226일 만이었다.
원주엔 미로예술시장이 있다. 처음엔 중앙시장이었는데 2층 건물 규모로 1970년 지은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원주는 신시가지가 들어서며 구도심이 공동화하고, 마트들도 들어서며 중앙시장은 경영난에 빠진다. 물론 유동인구가 많아 접근성이 좋은 1층의 괜찮았으나 2층이 문제였다. 2015년이 되어 중앙시장이 문화관광형 시장이 되면서 청년사업가들이 입주했고 이들이 다양한 창업가게를 열면서 다양해졌고 입소문을 타 지금처럼 유명해졌다. 중앙시장은 2층의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가, 나, 다, 라 네 개의 동인데 복잡한 미로 같아 이름이 미로예술중앙시장이 되었다.
중앙시장 맞은 편에도 건물이 있는데 그것이 자유시장이다. 자유시장은 큰 건물인데 1층은 온갖 종류의 잡화를 판다. 특이한 곳은 지하 1층으로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기름떡볶이 등의 분식이 매우 유명하고, 다양한 찻집이 많다. 또한 돈까스 집이 많은데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특징있다.
원주 지정면에는 뮤지엄 산이 있다. 산(SAN)은 우리 말 산을 뜻하기도 하지만 space, art, nature를 합한 말이기도 하다. 한솔에서 만들었으며 유명한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그래서 넓은 공간을 거닐며 다양한 풍경을 접할 수 있고, 한 눈에 모든게 보이지 않아 재미를 준다. 뮤지엄 산 건물의 노출콘크리트와 파주에서 온 돌인 파주석을 썼다. 그래서 다양한 느낌을 주며 여러 전시물과 조형물, 꽃, 자연이 가득하다. 산 꼭대기에 있어 차로 좀 올라가야 한다.
원주는 어느 덧 군사도시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문화예술도시의 늬낌을 풍기고 있다. 인구는 강원도 최대이지만 혁신도시와 기업도시의 개발이 마무리 되며 증가폭이 정체하고 있다. 원주는 지방도시들이 대개 그렇듯 가운데 부분에 작은 도시 부분이 자리하고 사방을 넓고 인구가 적은 면들이 둘러싼다. 물론 기업도시가 자리한 지정면이 인구 2만 4천 정도이고 산업단지가 존재하는 문막읍이 인구 1만 7천 정도로 많긴 하다. 지방소멸의 시대에도 원주는 강원도의 중심도시로 자리할 것 같다. 앞으로의 미래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