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는 독특한 점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왕조의 수명이 유독 길다는 것이다. 신빙성이 부족하지만 고조선은 거의 2천년, 고구려, 백제 700년 정도, 신라는 900년, 발해 2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이다. 중국은 거의 대부분의 왕조가 200-300년 정도의 수명을 보인다. 한국은 이에 비하면 무척이나 긴 편이다. 고작 200년이었던 발해의 수명이 상당히 의례적으로 느껴진다.

 가장 최근의 왕조는 역시 조선과 고려다. 둘 다 강역이 한반도 정도로 만주 지역을 상실한 왕조였고 역사도 500년 정도로 비슷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거의 조선에만 머물러 있다. 대부분의 사극이나 영화, 책 등의 저작물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이 주제다. 이유는 아무래도 두 가지 일 듯 하다. 아무래도 시기적으로 훨씬 가까워 관심과 공감이 가고(조선은 가깝게는 100년에서 멀면 500년 전이지만 고려는 여기에 500년을 더 멀리 해야한다.), 조선왕조실록이나는 막강한 기록물 덕분에 창작물로 다루기 무척 편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한 책을 조금 보았지만 고려 관련 저작물이 적어서 인지 나도 고려에 관해 본 책은 위 6권 정도가 전부다. 물론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공영방송에서 고려-거란 전쟁이 인기 속에 방영 중이기에 박시백의 고려사를 오늘 들춰보았다. 박시백은 조선왕조실록도 거의 10년 동안 그렸는데 기록이 풍부해서 1권 당 거의 왕 1명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이번 고려사는 역시 기록이 부족해서 딱 5권으로 끝나는 듯 하다. 4권까지의 내용이 원갑섭기이니 아마도 5권이 마지막일 것이다.

 고려는 조선과 제법 다르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고, 유지기간 내내 중원이 안정되었기에 철저히 사대할 수 밖에 없었다. 신분제는 고려보다 발전했고 능력주의 국가였지만 지나친 유학에 대한 신봉이 자주성과 스스로의 발전, 국제관계에서의 뒤쳐짐을 낳았다. 특히, 근대 들어 해양세력의 대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중국에만 의지한 나머지 임진왜란을 겪고 급기야는 일본에 의해 망국하고 말았다. 

 고려는 불교국가다. 물론 이는 신앙과 기복의 측면이고 통치이념은 조선 만큼은 아니지만 유학에 의지했다. 유지 기간 내내 중국이 안정되지 못했기에 자주성은 조선보다 강했지만 강한 북방왕조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당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국시에 걸맞지 못하게 만주로의 진출을 커녕 내내 방어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다. 골품제와 매달렸던 신라에 달리 과거제를 도입하여 신분제가 진일보 하였다.

 박시백의 고려왕조 실록은 역시 태조부터 시작한다. 태조 왕건은 뛰어난 능력으로 통일을 이뤄낸다. 견훤은 강대한 적이었는데 태조는 구 신라 세력과 호족 세력에 유화책을 견훤은 강경책을 펼쳤다. 이것이 차이가 되어 태조에겐 여러 세력이 귀순해왔고, 견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견훤은 후계구도에 실패하고 큰 아들 신검의 쿠데타로 실각하며 통일이 이뤄진다 견훤이 후계를 제대로 세우거나 집안 단속 잘하기, 혹은 신라 세력에 유화책을 썼다면 통일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태조의 이런 유화책은 통일엔 성공적이었지만 고려 초기에 적잖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태조는 호족의 기득권을 모두 보장하고, 왕씨성을 남발했으며, 많은 호족 딸을 부인으로 삼는다. 그렇다보니 2대 임금 혜종, 3대 정종이 정치적 격랑에 휘말려 빠르게 승하한다. 아마도 암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4대 광종이 강한 힘으로 노비안검법등을 시행하고 호족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하자 안정을 찾는다. 고려 초기엔 중국의 정세가 흔들려 많은 중국, 발해, 여진, 거란 귀화인이 고려로 들어온다. 고려는 이들은 잘 받아들여 국력을 강화한다. 

 고려는 성종대에 이르러 상당히 안정된다. 하지만 거란이 침공한다. 이들은 북방을 평정하고, 송을 치려했는데 그려려면 후방의 고려를 평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거란에 적대적이었고 쉽게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3차례에 걸친 침입이 이뤄지나 고려의 군사력은 막강했다. 거란은 진군할 때 마다 고려의 여러 성을 점령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진군해도 후방이 불안했고, 늘 늘 이로 인해 급습을 받거나 격퇴되었다. 3차침입에선 강감찬에 의해 귀주에서 10여만이 섬멸된다. 이 사건 이후 거란과 고려의 관계는 안정된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써주며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었고 거란 역시 고려의 매운 맛을 본 후 더이상 침공하지 않는다

 이후 준동한 것은 여진이었다. 윤관과 척준경을 필두로 이들을 어렵사리 제압하고 동북 9성을 쌓지만 워낙 성간 거리가 멀고 변방이라 관리가 어려웠다. 여기에 거란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된 상태였다. 결국 여진의 요청에 고려조정은 9성을 내준다. 20만 대군이 수년에 걸쳐 어렵게 얻어낸 땅이었다. 여진은 이후 거란을 멸하고 금을 세운다. 하지만 금은 요처럼 고려에 고압적이었으나 침공하지 않았다. 고려의 강성함, 그리고 여진황제의 조상이 고려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따른다. 하여튼 고려는 거의 100여년간 모처럼의 평화를 누린다

 하지만 평화는 내부에서 깨어진다. 어리석은 임금 의종이 즉위하는데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방탕했다. 고려판 연산군이랄까. 그는 재위 20년이 넘어 무신 정변에 의해 실각한다. 이후 고려는 난장판이 되는데 정중부, 경대승, 이의방, 이의민 등 집권자가 계속해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이 난장판은 최충헌이 최씨무신정권 시대를 열며 안정된다. 최충헌은 정치적 감각이 있어 정국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입맛대로 정부제체를 조직하고 세대를 넘어서는 장기집권 시대를 열게 된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 그리고 최항, 최의까지의 시대다. 그리고 이 최씨 집권 시기에 원이 일어선다. 초기 고려는 원, 거란과 협력하여 금의 잔당을 토벌하는 등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원은 고려에 슬슬 무리한 요구를 시작한다. 이에 원 사신 저고여가 살해당하고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는 최씨무신정권으로 인해 상당히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여기에 원은 사상 최강의 군대로 고려는 전역이 초토화된다. 고려 조정은 사신을 달래어 몇 차례 원의 군대를 물리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천도한다. 최우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선 원에 반드시 저항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최우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육지를 버리면서 백성들은 생지옥에 빠지게 된다.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식량이 부족했고 고려의 전술은 청야전술로 삶의 터전도 버려야 했다. 각지에서 살육 약탈이 일어났고, 원으로 끌려간 고려 백성만 수십만이었다. 이 기간은 거의 40년에 달하는데 어쩌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는 이 때에 비하면 오히려 약했을 거란 생각마저 든다. 

 최씨 정권이 최의 때에 끝나면서 강화가 이뤄진다. 고려 원종은 이후 황제가 되는 쿠빌라이이 잘 항복하면서 그의 관심을 산다. 그래서 고려는 작은 나라임에도 오래 버텼고 무엇보다도 항복을 잘 했기에 국력에 비해 상당한 대접을 받는다. 쿠빌라이는 원종의 요구를 많이 들어주었지만 남송과 일본의 점령에 집착한다. 남송은 정복하지만 일본 원정은 태풍에 의해 계속 실패한다. 고려는 배를 만들고 병사를 보내는등 시달리자만 쿠빌라이가 죽고나서는 이 문제가 끝난다.

 고려는 제법 대접을 받았지만 원의 제후국으로 상당한 간섭을 받았다. 이전에 양계 지역이었던 곳들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로 원의 영토로 전락하고 삼별초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탐라도 빼앗긴다. 고려의 왕들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였고 어려서 원에서 자라나게 된다. 고려는 이전까지 중국의 왕조들에게 제후국을 칭하면서도 사실상 황제에 해당하는 정부조직과 칭호를 사용해왔는데 이게 모두 불가능해진다. 또한 왕은 원에 친히 입조하였고 원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왕이 교체되는 일도 많았다. 이러다보니 고려가 아닌 원에 충성하고 배신하는 자들이 많았다.

 원은 고려에 처녀를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환관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려는 이 때만 해도 조정에서 거세된 환관이 없었는데 원의 요구에 의해 환관과 처녀는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들 처녀와 환관이 원에서 처신이 좋았고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고려 여인들과 환관들이 원제국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차지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이에 고려에서는 딸과 자식을 환관으로 만들어 원으로 자발적으로 보내는 일도 성행하게 된다. 

 책의 4권까지의 내용은 원간섭기 까지다. 이후 원이 무너지며 공민왕이 들어서고 고려의 마지막 개혁이 실패하며 조선으로 넘어가는 내용이 5권의 내용이 될 듯하다. 아무래도 조선왕조실록의 1권과 상당히 겹치게 될 듯한데 고려의 입장에서 망국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차별성을 두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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