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로 맛보는 와삭바삭 프랑스 역사 이케가미 슌이치 유럽사 시리즈
이케가미 슌이치 지음, 김경원 옮김, 강혜영 그림 / 돌베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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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는 과자와 음식, 패션 문화로 유명하다. 사실 이는 과다 포장된 것인데 프랑스가 국가차원에서 이 부분에서 독보적인 브랜드를 구축하도록 상당한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인근 국가인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는 오히려 프랑스보다 이 부분에서 나은 측면도 있어서 프랑스가 유럽에서 가장 났다고 외국인이 함부로 말하면 상당히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아시아도 마찬가지인데 서구인이 생각하기에 아시아의 간식과 음식, 패션, 문화 하면 일본을 가장 먼저 선두주자로 생각할 것이며 이렇게 된 데는 일본정부의 노력이 상당히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으면 한국인과 중국인은 납득을 할 수 없다는 듯 마찬가지로 무척 화를 낼 것이다.

 과자는 소금과 물과는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소금과 물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재이기에 오래전 부터 국가권력이 강하게 수직적 지배를 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과자는 있으면 매우 좋고 없어도 죽지는 않기에 상대적으로 느슨한 문화적 지배 권력이 작용한다. 과자는 과거엔 그 재료를 수도사나 왕족, 귀족들만 구할 수 있어 무척 사치품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최고급 과자라할지도로 누구나 조금만 무리하면 구입할 수 있기에 과자는 민주적이다. 그리고 과자는 패션이나 사교모임처럼 지역 문화의 꽃이고 세련되고 섬세한 감각이 중요한 제품이다. 

 프랑스에선 과자가 태고적부터 주술과 종교적 제사에 사용된 듯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결혼식에 과자가 교환되었고 로마는 신혼부부가 과자를 봉헌하는 의식을 치뤘다. 프랑스 로렌지방에서는 층층히 올린 고프로 위에 공식적으로 첫 키스를 했고 브르뉴튜 지방에서는 청혼 때 과자를 보냈고 이혼할때도 보냈다. 과거엔 웨딩 케이크가 커야한다는 생각에 지름이 무려 1.5m에 달했다고 한다. 

 프랑스 인의 조상 프랑크 족과 게르만 족은 죽은 자에게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벌꿀이 들어간 과자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을 기독교 이후에도 유지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현지 문화와 관습과 어느 정도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대교황 그레고리우스 때 7대 악덕을 선정했다. 이는 오만, 탐욕, 음란, 분노, 대식, 질투, 나태로 과자를 이중 대식과 연관될 수 있어 어느 정도 견제를 받았지만 성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크게 제재되지 않았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에울로기아나 우블리라는 과자가 있었다. 이는 그리스 어로 축복을 의미하는데 공복에 먹었다. 수도사들이 식당에 모여 이것을 먹었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적 인연을 의미했다. 우블리는 납작한 성체빵 오스티아와 유사했다. 오스티아는 이스트를 쓰지 않는 무발효 빵으로 화덕에서 얇게 구워 만들었다. 오스티아는 귀한 빵이었으므로 만드는 사람은 교회의 매서운 감시를 받았다. 사창가와 도박장 출입금지, 규정준수, 몸가짐이 조신하고 평판이 좋아야 했다. 우블리는 밀가루에 물과 와인을 더해 만들었다. 흰천으로 싸서 일부는 미사에 썼는데 영성체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먹는 한 단계 낮은 것이었다. 사제가 나눠주었으며 일시적 구원을 의미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엔 아랍세계의 먹을 거리가 들어왔다. 설탕과 향신료, 오렌지, 레몬, 살구가 그것들이다. 콩피르와 잼, 설탕절임등도 들어왔는데 푀이타주도 전래되었다. 푀이타주는 밀가루에 올리브 유를 넣고 반죽해서 얇게 편 다름 셈세하게 여러 겹으로 겹쳐서 접는 것이었다. 펭페디스는 벌꿀과 밀가루로 만든 빵에 향신료를 듬뿍 넣어 만든 것으로 역시 아랍을 통해 들어왔다. 이 밀가루는 점차 호밀가루로 바뀌었다. 

 프랑스 과자는 아랍에 이어 이탈리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르네 상스 시기 이탈리아 식문화가 많이 유입되었는데 주요 인사들의 결혼과도 관련이 깊었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기 비약적으로 세련된 과자를 만들었다. 과일 파이, 잼, 과일 설탕 졸임, 누가등이 그들의 성과물이다. 이 때 들어온 것으로 파스티야주가 있는데 이는 잘게 부수어 전분을 첨가한 설탕에 콩과 식물에서 추출한 끈적한 분비물인 트래지켠스를 물에 녹여 섞은 반죽을 세공한 것이다. 마카롱은 달걀 흰자와 설탕, 아몬드 가루로 만든 것이고, 프랑니판은 우유, 설탕, 밀가루, 달걀, 버터를 가열해 만든 크림이다. 이들은 모두 카드린 드 메데시스가 프랑스로 시집오면 전파된 것들이다. 

 그녀는 스펀지 케이크도 전래시켰으며 이탈리아에서 젤라또도 가지고 왔다. 젤라또는 16세기 시작한 이탈리아 아이스크림이다. 당시 프랑스는 식사 시간에 고기도 맨 손으로 뜯었는데 그녀가 포크도 전수해줘 의례를 갖출 수 있었으며 향수와 양산도 전수되었다. 

 근대로 오며 카카오가 신대륙에서 전례되었다. 카카오 콩이 건조와 발효등을 거쳐 가공되면 코코아가 된다. 코코아를 뜨거운 물에 부어 녹인게 코코아차이며 코코아를 갈아서 코코아 매스로 만든 다음 그것을 압착 분리해 지방을 분리한게 코코아 버터다. 반죽한 코코아 매스에 설탕과 우유를 섞은 후 굳힌 것이 쵸콜릿이다. 

 종교전쟁은 유럽 국가들 간의 미식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구교인 대륙의 카톨릭 국가들은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애착을 갖는 것이 기독교 문명형성에 기여하는 훌륭한 행위라 생각하고 이를 장려하였다. 반면 영국이나 독일의 신교는 요리와 음식은 기아를 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식욕의 증진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는 훌륭한 식문화를 자랑하는 반면 독일과 영국이 상대적을 여기서 부진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양 지역이 지리적 차이와 기후로 인해 접할 수 있는 식재료에 상당한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근대 들어 설탕 소비량이 급증한다. 때문에 노예 무역이 필요했는데 설탕의 재배를 위해선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근대 유럽의 노예 및 식민지 쟁탈전을 설탕 확보를 위한 각국의 치열한 경쟁으로 보기도 한다. 프랑스는 서인도 제도의 엔틸레스 제도에서 17세기부터 플랜테이션 농장을 가동했다. 18-19세기 프랑스의 설탕 소비량을 급증하는데 이는 커피의 소비량을 늘어났기 때문이다. 커피는 처음에 그냥 먹다가 폴란드의 게오르고 코시츠키가 퍼티에 우유 넣어 먹는 방법을 전파하였다. 그는 커피 가루를 거르고 우유는 넣은 카페 오레를 크루아상과 같이 먹는 법을 고안해 크게 유행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은 1845년 3.6kg에서 1871년 7.8kg으로 두 배 넘게 증가한다. 아이스크림 소비의 증가도 설탕 소비량을 급증시켰으며 바야흐로 설탕의 대중화 시대가 열리게 된다.

 크림은 버터를 만드는 용도다. 귀하고 비싸며 보관이 어렵다. 크림은 19세기에 큰 인기를 얻었는데 우유에서 유지방을 분리하여 만들었다. 1879년 크림 분리기가 발명되었다. 

 고급 디저트 문화는 사실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귀족이 대부분 몰락하여 전용 요리사들이 시중에 가게를 내게 되었고, 부르주들들이 성장하며 새로운 소비층을 이루었다. 프랑스 파이에는 근대에 저널리스트와 외국 스파이 및 사절, 의원 등 독신자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이들에게 요리사들이 차린 레스토랑이 매우 인기가 좋았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많은 과자가 개발되었다. 에클레르는 18세기 리옹에서 탄생했는데 슈반죽으로 만든 과자다. 처음엔 아몬드는 잘게 부수어 섞다가 나중에는 아몬드 대신 커피, 초코, 생크림을 채웠다. 파리 브레스트는 슈 반죽으로 자전거 바퀴 모양을 만들고 가운데 머랭과 프랄린을 넣었다. 밀푀유는 푀이타주와 크렘 파티시에르를 쌓아올린 과자다. 생도노레는 고급 상점가인 생도노레 거리의 과자점에서 탄생했다. 왕관 모양의 브리오슈에 크림 파티시에를 채운 과자다. 를지지 와스르는 수녀라는 뜻으로 커다란 슈 위에 작은 슈를 얹고 그 위에 녹인 초콜릿이나 커피를 부운 것이다. 타르트 타탱은 사과 타르트의 일종으로 반죽 위에 사과를 그대로 얹은 것이다. 퓌이 다무르는 파이 반죽을 이중으로 겹쳐 작고 둥근 우물처럼 만들고 바닐라 맛 또는 프랄린을 넣은 크렘 파티시에르나 잼으로 속을 채운 다음 표면에 설탕옷을 입한 과자다. 마들렌은 1755년 폴란드 국왕 스타니 솔라닌 레친스크의 연회에서 탄생했다. 원래 연회엔 타르트가 나오기로 했는데 망했다. 그래서 젊은 하인 마들렌 폴비에가 달걀 거품기를 사용해 할머니에게 배운 가리비 모양의 과자를 만든게 마들렌의 시초다. 무스는 과자를 굳히기 위한 방식이다. 가열 대신 냉각을 해 부드로운 식감을 자랑하는데 과일을 퓌레 상태로 만들어 크림과 섞어 먹으며 냉동을 시킬 수 있어 인기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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