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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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기자였던 구본준의 또 다른 건축 책이다. 그는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그가 쓴 다른 책인 두 남자의 집짓기를 내가 봤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했다. 그는 2014년 이탈리아 출장 중 돌연사했다. 아직 40대의 젊은 나이였다. 최근 건축책은 유현준의 책을 주로 보고 있지만 과거엔 구본준이 있었던 셈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더 좋은 책을 많이 냈을 것이 확실해 아쉽다. 한국의 미 특강을 쓴 오주석, 역사를 쓴 남경태 작가도 구본준 만큼은 아니지만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같은 이유로 무척 아쉬운 분들이다.

 이 책은 2013년에 발간한 책으로 사실상 그의 유작이다. 다른 건축책들과는 좀 다르게 한국의 건축에 집중하고 있어서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시기는 근대와 과거, 현대를 모두 아우른다. 

 책의 서두를 장식한 것은 이진아 기념 도서관이다. 이진아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무척 사랑한 딸이었다. 그 딸은 2003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딸을 무척 사랑했던 아버지는 세상에 그녀를 남기고 싶었고 그런 그가 건축비를 대고 지자체가 토지를 대어 완성한 것이 이진아기념도서관이다. 이 건물은 건축 자체가 뜻 깊은 시도이기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의 벽돌을 활용하여 의자를 만든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서울엔 많은 종교 건축물이 있다. 명동 성당, 불교 조계사, 천도교 중앙대성당, 개신교의 정동교회와 경동교회,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 그렇다. 이중 서울 대성당은 고딕 양식이 아닌 로마네스크 형식인데도 한국적 양식을 많이 적용해 더욱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대개 교회 건물은 고딕 양식으로 지으며 이는 신에 가까워지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서울 대성당은 그렇지 않다. 여기엔 건축가의 뜻이 담겼다. 건축가는 1914년 성공회의 트롤로프 주교였다. 그는 건축가 아서딕슨에 서한을 보내 종교 건축물은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설득한다. 수개월의 뱃길로 조선에 도착한 아서딕슨은 한국의 건축물과 가옥을 살핀다. 그리고 고딕을 포기한다. 그래서 서울 대성당은 기와 같은 지붕에 한옥의 창호 같은 창문, 오방색의 스테인글라스를 갖게 된다. 이런 현지 전략으로 서울 대성당은 다른 근대 건물들과는 다르게 한옥들과 같이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1990년대초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성노예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어서 1992년부터 일본대사관에서 일본군 성노예 사건에 항의하는 수요시위가 시작된다. 2000년대 들어 어느 새 고령화한 피해자들이 사망하기 시작하면서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처음엔 독립공원 내에 부지를 마련하려 했으나 늘 그렇듯 몇몇 보수단체의 반대로 위치가 마포구 성미산으로 옮겨진다. 국회와 정부가 마련한 돈은 겨우 5억이었기에 민간시민과 일본의 시민들이 돈을 모아 자산 20억이 만들어진다. 마포의 100평짜리 단독주택 구매에만 17억이 쓰이고 건축가는 고작 3억으로 건축을 해낸다. 바깥은 높은 벽을 세워 작은 건물을 크게 보이게 하였고, 할머니들의 얼굴과 손바닥 부조도 눈에 띈다. 집의 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은 할머니들이 끌려가 생활하던 공간처럼 꾸며졌다. 박물관은 전쟁에 끌려간 할머니들의 삶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로 완공되었다.

 조선은 유교 건물을 많이 지었다. 향교는 공립유학 교육기관이고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다. 향교는 대개 고을의 중앙에 위치했는데 지금도 오랜 도시 지역의 중앙엔 교동이 있다. 바로 향교가 있던 마을이란 뜻이다. 서원은 풍수가 좋은 곳에 그리고 지역의 특성과 모시는 사람, 건축주의 특성이 반영되어 개성이 넘친다. 

 서원은 공통적으로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학생을 가르쳤기에 은행나무가 반드시 존재하고 교수 및 기숙사와 배향장소가 있다. 도동서원은 김굉필을 모시는 서원이다. 김굉필은 나도 처음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지 않으나 조선 사림들에겐 정신적으로 큰 울림을 준 사람이다. 젊은 시절을 탕아로 보내다 늦은 나이에 김종직을 만나 수학하여 40이 되어서야 입직한다. 당시 양반들은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뤘는데 대부분 돈을 주고 사람을 썼고 자신은 제사만 지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김굉필은 부, 모, 계모까지 총 9년 상을 스스로 해낸 사람이다. 워낙 강직해 연산 때 파직되고 사사되었다. 중종때 복귀되었는데 그의 강직함이 워낙 대단해 동방 5현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1번인데 동방오현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다. 도동서원은 이런 김굉필을 기리는 서원이기에 많은 건축비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래서 돌을 활용한 재미난 장식들이 많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호주의 대표적 건물이다. 국가의 이미지를 이 정도로 잘 드러낸 건물도 많지 않은데 호주 정부는 이를 계획하고 설계를 공모한다. 당선자는 당시 39세로 덴마크의 신예 이외른 우촌이었다. 조개 껍데기를 연상시키는 여러 구조체를 설계한 그의 건물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건물은 정면이 따로 없었고 구조에도 구분이 없었다. 포개지는 거대한 고깔은 그 자체로 벽이자 지붕이자 관문이었다. 

 모든 게 좋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호주 정부는 2년 정도의 건축 기간에 350만 달러의 예산을 예상했다. 하지만 해안가이다 보니 지반 문제가 발생했고 당시 낮은 건축 수준으로 인해 실현 가능한 재료와 구조의 변경 및 설계 등으로 실제 건축 기간은 10년 이상에 예산은 총 5700만 달러가 들었다. 호주 정부와 건축가의 갈등은 심해졌고 자신의 이상이 현실에 밀리는 느낌을 받은 우촌은 그대로 귀향해버린다. 호주정부는 자국의 건축가들을 이용해 현실적인 작업을 벌려 오페라 하우스를 마무리한다. 우촌은 개관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먼 훗날에야 오페라 하우스를 다시 방문한다.

 조선의 5개 궁궐 중 창덕궁은 후원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창덕궁의 후원은 우리 전통처럼 자연스러움이 그 특징이다. 창덕궁의 또 다른 특징은 정자가 많다는 것이다. 가장 화려한 정자는 부용정으로 열십자 지붕에 한 차례 각을 더 따낸 정자로 정조가 애용했다. 관람정은 전국에서 유일한 부채꼴 모양의 지붕을 가진 정자고 승재정은 작은 공예품 같이 아름다운 정자로 보통 사방이 트인 다른 정자와 달리 창호가 있고, 툇마루도 있다. 아마 겨울에도 애용한 것이 아닐지. 존덕정은 디자인이 독특한데 지붕이 2겹이고 한 모서리에 가는 기둥이 3개씩 붙어 있다. 청의정은 농업국가인 조선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자의 지붕이 초가다. 왕은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선농단에서 올렸고 친경했다. 그리고 매년 청의정의 초가 지붕을 교체했다. 선농단 제사 후 제물로 사용한 소를 잡아 탕을 끓여 주변 60세 이상 백성에게 대접했는데 이것이 설렁탕의 시초란 이야기가 있다. 

 강릉에 가본 사람은 선교장을 한 번 정도를 들어봤을 것이다. 선교장은 집의 이름으로 현존하는 조선건물 중 가장 크다. 보통 양반의 집엔 당이나 각이 붙는데 선교장은 워낙 커서 장이 붙은 것이다. 선교장은 강릉에 위치하는데 그것이 더 대단하다. 강원 지역은 농경지가 척박하고 좁기 때문이다. 선교장 가문의 땅은 주문진에서 삼척에 이를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선교장 가문의 시작은 권씨부인이다. 본래 충주로 시집갔었는데 남편이 죽고 전처의 장자가 모든 가산을 상속하자 자신의 아이와 강릉으로 돌아와 염전 사업을 해서 자수성가한다. 그들은 개척된 땅은 비과세하는 법을 이용해 강원도의 척박한 땅을 농지로 바꾸며 땅을 늘려갔다. 

 선교장은 한양의 유력가와 통혼하여 세력을 유지했고, 문화적 후원과 교류도 자주해서 정치감각과 문화감각을 유지했다. 김정희나 여운형도 방문했다. 조선시대 양반에게 관동팔경과 금강산은 주요 관광지였는데 선교장은 그 초입으로 같이 방문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선교장은 손님대접에 상당한 신경을 썼는데 소반만 300개를 대접하고 손님이 떠날때는 옷도 지어 선물했다. 사랑채는 큰 사랑채, 중간 사랑채, 아랫사랑채로 나눠 손님의 학문적 수준과 지위에 따라 위에서 아래 순으로 배치했다.

 선교장은 처음부터 큰 건물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며 꾸준히 증축하여 매번 당주의 취향과 철학이 반영되어 건축물이 다양하다. 선교장의 6대 이근우는 1908년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고자 인재 양성을 위해 동진학교를 설립했다. 교사로 여운형과 이시형을 초빙할 정도였고 학생에게 숙식과 학비를 제공했으나 일제에 의해 3년만에 폐교 된다.

 이근우는 일제 때 중추원 참의를 지내기도 했으나 뒤로는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댔다. 선교장은 해 방 후 토지개혁으로 땅을 강제 매각당하고 지가 증권을 얻었으나 산업자본으로 전환에 실패하여 과거의 위상을 잃는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이후에도 가문에서는 강릉시장과 은행장, 대학 부총장이 연이어 배출되었고 선교장의 유명한 열화당의 이름을 딴 출판사 열화당도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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